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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극온묘지(鄭克溫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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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묘지명은 이규보(李奎報)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권35와 『동문선(東文選)』권122에 실려 있으며, 1215년(고종 2)에 이규보가 작성하였다.
묘지명의 주인공인 정극온(鄭克溫, ?~1215)은 전주(全州) 상질현(尙質縣) 사람이다. 증조와 조부는 미상이다. 아버지는 원녕(元寧)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정극온은 무신정권기인 명종·신종·희종·강종 때 관료로서 활동하였으며, 내시(內侍),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상장군(上將軍),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고려사』열전에 따르면 정극온은 서경지역 토벌전에 참여하여 공을 세워 금오위산원(金吾衛散員)이 되면서 벼슬을 시작하였다. 또한 정극온은 강종(康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는데, 당시 그에게 내린 고종의 교서에 따르면 강종의 사후 국가의 기무를 장악하여 고종이 즉위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하였다.
부인은 전씨(田氏)이며, 자식이 없다.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판예부사 정공묘지명(金紫光祿大夫 參知政事 判禮部事 鄭公墓誌銘)
모(某)월 모일에, 참지정사 판예부사(參知政事 判禮部事) 정공(鄭公)이 작고하였다. 장사를 지내려고 할 때 그의 부인이 울면서 상사(喪事)를 주관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장사에는 돌에 글을 새겨서 무덤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생각해서 후세에 나타내어 영원히 썩지 않게 할 자손이 없으니, 애통함이 이보다 더할 수가 없다. 내 비록 여자이지만 들으니, 정언(正言) 모(某)가 글을 잘한다고 한다. 너희들은 나를 위하여 서신을 가지고 가서 명사(銘詞)를 청하여라” 하였다.
모일에 내가 서액(西掖)에서 정오를 기다려 막 나오려 하는데, 부인의 서신이 왔다. 그 사연을 읽어보니, 민망스럽고 애석한 내용이었다. 내가 어찌 변변치 못한 글을 아껴서 그의 뜻을 져버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다음과 같이 서문을 짓는다.
공의 이름은 극온(克溫)인데, 전주(全州) 상질현(尙質縣) 사람이다. 흥위위중랑장(興威衛中朗將) 모(某)는 공에게 조부가 되고, 신호위대장군 겸 태복경(神虎衛大將軍 兼 太僕卿) 원녕(元寧)은 공의 부친이다.
공은 처음에 산동(山東)에 적을 두어1) 양온령동정(良醞令同正)이 되었다가, 불러 들여 내시(內侍)가 되었다. 진퇴에 예절이 분명하고 또 직무를 수행하는데 정성을 다하자, 임금은 그를 매우 큰 인물로 여겼다.
이에 앞서 서쪽 지방을 정벌한 전공에 대해서 아직 상을 주지 못하였는데, 임금이 그 공으로써 다시 금오위 산원(金吾衛 散員)에 임명하였다. 여러 번 옮겨 신호위낭장 겸 상서공부원외랑(神虎衛郎將 兼 尙書工部員外郞)에 이르고 조금 후에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으로 옮겼는데, 모두 내시직을 그대로 하였다. 또 여러 번 승진하여 흥위위장군 겸 예부시랑(興威衛將軍 兼 禮部侍郞)에 이르렀다.
이때 마침 강남 지방에 도둑이 성하자, 조정에서 삼군(三軍)을 내어 토벌하였는데, 공도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싸움에 나아갔다. 공은 본래 군사들에게 호감을 샀으며, 이때 더욱 군사들을 훈련시켰으므로 싸울 때마다 사로잡는 것이 많았다. 모든 적이 공의 군사를 만나면 물러가고 감히 그 칼날을 겨루려 하지 않았다.
공은 들어와서 대장군 겸 태복경(大將軍 兼 太僕卿)이 되었는데, 무릇 역임한 중요한 관직은 이 대장군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차례로 상장군(上將軍)이 되고, 관질이 바뀌어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가 되었으며, 기밀(機密)을 관장하여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가 되고, 풍헌(風憲)을 띠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남대(南臺)에 들어가서는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가 되고, 봉각(鳳閣)에 올라서는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었다. 봉각에서 자급이 옮겨 참지정사 겸 판예부(參知政事 兼 判禮部)가 되었다. 품계가 조산대부(朝散大夫) 정의대부(正議大夫)로부터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이르렀다. 이것이 공의 자세한 이력이다.
공은 일에 임하여 규각(圭角)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혁혁한 명성은 없었지만, 떠난 뒤에는 모두 은혜를 남겼다. 무릇 남쪽 지방에서 말고삐를 당길 때나 북쪽 변방에서 부월(斧鉞)을 잡을 때에는 위엄과 사랑이 중도를 얻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편히 여기어 지금까지 기리고 노래하여 마지않는다.
아! 공은 한평생 근신(謹愼)하고 인화(仁和)하였으니, 마땅히 수(壽)를 누렸어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하고, 은덕(隱德)과 음공(陰功)을 쌓았으니 마땅히 그 자손이 창성해야 할 터인데 마침내 후사가 없으니, 이는 명조(冥兆 : 미리 정해진 운명)를 믿지 못할 일이다. 부인 전씨(田氏)는 양온령(良醞令) 모(某)의 딸이다.
공이 작고한 것은 정우(貞祐) 3년(고종 3, 1215) 2월 모일이었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애도하여 3일 동안 조회하는 일을 정지하였고, 관리들에게 명하여 장례를 돕게 하자 백관들이 장례에 참석하였다. 시호를 모공(某公)이라 내리고 뇌사(誄詞)까지 지어서 은총을 베풀었다. 모월 일에 모산에서 장사지냈다. 나는 다음과 같이 그 묘소에 대해 명을 짓는다.
진실하고 어린 아버지는 범처럼 용맹스러웠다.
대대로 내려온 무관들은 모두 날래고 이름 날렸네.
공에 와서 크게 떨쳐 부공이 더욱 빛났고 시대를 잘 만나 높이 등용되었네.
나가서는 장수, 들어와서는 정승이었으니
손에는 부월(斧鉞), 허리엔 인장이었네.
기밀과 밀계는 남들이 엿보지 못하였으며
네 조정을 보필하여 구덕(舊德)이 더욱 빛났네.
운수가 좋지 못하여 큰 기둥이 쓰러졌고
백도(伯道)에게 아들이 없었으니 하늘도 무심하네.
누가 가묘(家廟)를 이어받아 제사를 받들겠는가. 무엇으로 위로하리.
나라에서 그 상사를 주관하였다.
백관이 장례에 참석하니 떠나는 길 빛났네.
남아가 이와 같다면 아들 없는 것 무어 슬퍼하리.
저 산 언덕을 보소.
소나무 가래나무 울창하이.
공의 집이 만세에 보전하리라.
슬프도다.
그의 부인 눈물 흘려 치마 적시며, 간절히 명(銘)을 청하는데
그 사연 마음이 측은하다.
명을 지어 돌에 새기니 황천에 빛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