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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 태조왕릉 중수기적비(駕洛國太祖王陵重修紀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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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海金石文總覽』
가락국(駕洛國) 태조왕릉(太祖王陵) 중수기적비(重修紀蹟碑)
전통정대부(前通政大夫) 규장각 부제학(奎章閣副提學) 완산 이범세(完山 李範世) 찬
전정헌대부(前正憲大夫) 행 장례원경(掌禮院卿) 겸임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 부평 이헌경(富平 李軒卿) 서
전통정대부(前通政大夫) 첨지 돈녕원사(敦寧院事) 원임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 월성 이교덕(月城 李教悳) 전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상(商)나라의 손자는 그 수가 억(億)뿐만 아니다”고 했는데, 가락국 태조왕의 후손은 김·허 양성이 있다. 운잉(雲仍)1이 매우 번성하여 신라 이후로 명신(名臣) 석유(碩儒)는 우뚝하게 서로 바라보며 도덕(道德) 문장(文章) 훈업(勳業) 절행(節行)은 역사에 빛나므로 세상의 망족(望族)이 되었다. 간절히 생각건대 태조왕께서는 일찍이 인문(人文)을 열었었고 널리 판도(版圖)를 개척했으니 그 풍요하고 거룩한 공렬은 지금까지 민몰하지 않은자 있다. 그러한 바로써 본지백세(本支百世)에 복록이 슬기롭고 장원하므로 영지(靈芝) 예천(體泉)의 뿌리와 근원이 있는 것과 같으니, 가끔 필부가 일시의 운을 타고 자손이 많거나 부귀를 이루어 누리는 자와는 비교할 바 아니다. 태조의 장지는 김해 구지봉 남쪽에 있으니 납릉(納陵)이라고 한다. 역대의 어진 임금이 능감을 설치하고 위토전(位土田)을 내려주고, 예관을 파견하여 치제하고, 무릇 수호·숭보에 극력하지 않음이 없었다. 지금까지 1800여년에 전배제공(前輩諸公)의 능침 수호에 노력한 자도 한 두번에 그치지는 않았으나 그 후 여러번 상전 벽해를 겪었음에 중수하는 예전은 오래동안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지난 갑자년(1924년) 봄에 참봉 김영두(金瀯斗)는 널리 여러 종족에게 의논해서 크게 능을 중수하였다. 무릇 남릉(納陵)의 후손이 되는 자는 모두 향응, 힘을 다하여 협조를 이루었다. 그 특별히 현저한 자로서 말하건대 오로지 대소 석물 전등 및 중도를 설치한 자는 부산 김성학(金性學)이 있었고, 새로히 철홍문(鐵紅門)을 건립한 자는 부산 김종필(金鍾弼)이 있었고, 능 서쪽의 담장을 수축한 자는 밀양 김복태(金福泰)가 있었고, 능상의 곡장(曲墻)과 전각 앞 담장은 동래·부산 양 화수계로부터 개축하였고, 능하에는 옛날의 회로당이 있는데 곧 종중 장로의 집회하는 장소로 청도 김용희(金容禧)가 수선했으며, 심지어 김성학의 부인 박씨는 사사로히 패물 등속을 내어서 연신루(延神樓) 복도(複道)를 개설했으니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시키기에 넉넉하다. 대개 성학은 봉선(奉先)하는 정성이 돈독하여 계도(啓導)함이 있었기 때문에 능 모양은 아름답게 장관으로 고쳐지고 향례는 차질이 없으므로 해서 신령과 사람들이 서로 즐거웠다. 공사가 이미 완성됨에 여러분이 다 말하기를 “마땅히 비석을 세워 사실을 새기자.”고 하였다. 제종의 성금 50원 이상을 의연한 자는 다 비석 후면에 이름을 계재하고 후세에 명백히 고해서 보고 느낌을 일으키게 하고 이보다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나의 친구인 충주 김현주(金顯周)군이 하루는 그 중계수요를 초록해 와 나에게 보이고 나에게는 글을 요구하면서 그 사실을 새기게 하였다. 근래 풍기는 날마다 변천하고 세속은 나날이 해이하여 추원보본하는 일이 있음을 아는 사람마저 드물다. 이른 바 고가세족(古家世族)의 분묘·제각도 한결 그 퇴락과 황폐에 방임해서 돌아보지 않은 자가 여기나 저기나 다 이러하다. 구차스럽게 수호의 능력이 부족하다면 오히려 말할 수 있으려니와 그 하루라도 여기 마음 두기에 유능한 자이랴! 이번 납릉(納陵)을 중수하는 일에 나는 능히 감상이 없지도 않다. 이것이 과연 추원보본하는 바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납능의 후손이 지금 번성한 자는 진실로 그 음덕(蔭德)의 도움과 적성(積慶)의 계승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사람들은 안다. 그 능히 추원보본하는 정성을 일제히 내어서 장래의 복을 모우는 자도 또 어찌 한정하리요. 나는 알기에 다음날 납능을 지내면서 이 비문을 읽는 자는 그 반드시 반성함이 있어 부끄러움을 알게 될 것이다.
가락기원후 1886년 정묘(1927년) 8월 일
경향종중 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