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증의정부좌의정(贈議政府左議政) 시충무(諡忠武)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증(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겸영경연사(兼領經筵事) 행(行) 갈성분위출기진무공신(竭誠奮威出氣振武功臣)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겸(兼) 형조판서(兼刑曺判書)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捴府都捴管) 사도부원수(四道副元帥) 시충무(謚忠武)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과 아울러 서문을 쓰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兼)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세자사(世子師) 이경여(李敬輿) 짓고,
정헌대부(正憲大夫)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겸(兼)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김좌명(金佐明) 쓰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曺判書) 겸(兼)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춘추관성균관사(知春秋館成均館事)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김수항(金壽恒) 전(篆)하다.
오랜 예전에 병장기를 들고 변경을 지키고 화란을 평정한 자는 많이 꼽을 수 있다. 함부로 한 사람이라도 죽이지 않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 힘을 쏟으면 인장(仁將)이라 칭한다. 그 후손에게 경사가 미친 이는 곧 당나라 곽분양(郭汾陽)과 송나라 무혜왕(武惠王) 조빈(曹彬) 뿐이라.
우리 동방이 또한 나라를 세운 후 신라와 고려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임금에게 병권을 위임받은[登壇授鉞] 사람이 적지 않으나 여기에 참여한 자가 없다. 우리 선조 때에 이르러 남쪽 왜구가 크게 침범하여 삼도(三都)가 무너지고 7년 동안 난리로 얽혔으니 이때 단단히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아 전쟁터로 나아나가 나라를 회복한 공렬(功㤠)을 이끈 자는 한 둘을 꼽기 힘들다. 시종 하나의 절개로 인(仁)으로 위엄을 갖추고, 의(義)로 용맹하고, 지극한 사랑으로 사람을 감복시키고 성공 후에 오히려 겸손하고, 분양(汾陽)과 무혜(武惠)의 풍모를 방불케 하는 이가 오직 계림공(鷄林松)이다.
공의 휘(諱)는 수일(守一)이고, 자(字)는 계순(季純)이다. 세계는 계림(鷄林)에서 나왔고, 비조(鼻祖) 휘는 알평(謁平)으로 신라 시조를 도와 개국 원훈(元勳)이 되었다. 신라 때 휘 거명(居明)이 있어 관직은 소판(蘇判)에 이르렀고, 그후 수백 년 동안 대대로 명인(名人)과 대관(大官)이 많았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 휘 성중(誠中)은 벼슬이 좌정승(左政丞)에 이르고 시호는 정순(靖順)이다. 정순이 휘 원(瑗)을 낳으니 통정대부 연안부사(延安府使)였다. 부사가 휘 혁손(赫孫)을 낳으니 생원으로 공에게 고조가 된다. 생원이 휘 오(塢)를 낳으니 장흥고주부(長興庫主簿)를 지냈고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판서가 휘 자침(自琛)을 낳으니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는데, 진사로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만나 충주(忠州)에 은둔해 일가를 이루었다. 찬성이 휘 난(鸞)을 낳았으나 배움을 이루지 못하고 또 일찍 죽었다. 영의정(領議政) 보조공신(補祚功臣)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에 증직되었다. 3대에 영예가 이어졌으니 공이 귀하게 된 때문이다. 의정공은 단양우씨(丹陽禹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좌의정 인열(仁㤠)의 6세손이며 참봉(參奉) 담령(聃齡)의 딸이다. 가정(嘉靖) 갑인년(甲寅年, 1554, 명종 9) 4월 1일 공을 낳았다.
공은 의표가 훤칠하고 장대하였으며, 국량이 침정하여 보는 사람들이 모두 원대한 포부를 이룰 사람이란 걸 알았다. 기개가 호탕하여 책을 물리치고 재주가 많아 활을 잡았다. 계미년(癸未年, 1583, 선조 16) 무과에 참가하여 처음에 훈련원에 예속되었다. 병술년(丙戌年, 1586) 에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이 되었다가 자리를 옮겨 남수(南帥)의 막하에 들어갔는데, 주수 신각(申恪)이 모든 병무 사무를 공에게 위임하였고, 일이 모두 잘 처리되었다. 경인년(庚寅年, 1590)에 선전관에 제수되었고, 신묘년(辛卯年, 1591)에 장기현감(長鬐縣監)으로 발탁되었다. 공은 무비에 유의하여 평시에도 느슨히 하지 않았다.
임진년(壬辰年)에 왜추 수길(秀吉)이 대거 입구(入寇)하여 부산과 동래를 함락하여 짓밟고, 파죽지세에 이일(李鎰)은 상주(尙州)에서 무너지고 신립(申砬)은 충주(忠州)에서 전사하였다. 진열이 와해되어 한 사람도 왜적과 싸우는 사람이 없었다. 공은 동지들과 함께 피눈물로 군사들과 맹서를 하고 흘연히 붉은 깃발을 세우고 적을 맞아 힘써 싸우니 앞뒤로 베어진 수급이 매우 많았다. 일을 듣고 선조가 기뻐하였다. 차례를 뛰어넘어 우병사(右兵使)에 제수하자 동료들이 그 공을 싫어하여 공이 거짓으로 공을 올렸다고 무고하니 전에 명하였던 것을 거두어들였다. 후에 조정의 공이 무고당함을 알고 계사년(癸巳年, 1593)에 밀양부사(密陽府使)로 벼슬을 올려주었다. 이윽고 본도의 수사(水使)로 옮겼다. 공은 강개(慷慨)하여 명을 받고 더욱 분발하니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앞장 서니 적이 모두 달아났다. 바닷가 모든 고을은 공에 의해 온전하였다. 이해 겨울 품계가 더해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고, 글을 내려 포상하며 말하길, 비로소 순국(殉國) 인사를 알았고 불필요하게 헛되이 나아가 녹훈을 쌓고 거듭된 은혜를 이어온 구신(舊臣)이 이내 평소의 정리로 나아가면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또 이르길, 너 같은 한 두 신하면 어찌 오늘 같은 창졸함이 있겠는가. 너로 하여금 일찍 군사 지휘를 맡겼으면 승첩의 소식이 있었을텐데 어찌 비로소 오늘에 듣게 되었는가. 다만 너를 늦게 안 것이 한(恨)이다. 등의 말이 있었다. 선조의 뜻을 살피면 여러 장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때 적이 남쪽 변방에 둔을 치니 백성들이 농사를 놓치고 적의 예봉이 남아있었다. 또 기와와 질병을 만나 길에 시체가 널려 있어 백성이 씨도 남지 않았다. 공이 틈틈이 둔전(屯田)을 베풀어 틈을 보아 경작하게 하고 조금씩 죽을 쑤어 먹이며 가을을 기다리니 모두가 온전할 수 있었다. 남쪽으로 흩어진 자들이 또한 되돌아왔다. 공의 덕에 감사한 한 사람이 있어 소매에 토지와 노비 문서를 숨기고 밤에 공에게 주며 말하길, 원컨대 이것은 공이 다시 살려준 은혜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하니 공이 엄히 사양하며 배척하였다. 사람들이 사지금(四知金)을 물리친 고사에 비유했다.
을미년(乙未年, 1595) 모친상을 당했다. 임금이 공을 중히 여겨 기복(起復)을 명하였으나 공이 여러 번 사양하였다. 임금이 끝내 기복을 명하니 이내 해영(海營)의 임무를 맡겼다. 공이 불탄 나머지를 수습하고 전함을 수리하였다. 수륙(水陸)을 통제하여 적을 만나면 번번이 깨뜨렸다.
병신년(丙申年, 1596) 체직되어 돌아와 여묘를 이루어 상제 노릇을 하였고, 가을에 탈상을 하자 회령부사(會寧府使)의 벼슬이 내려졌다. 조정의 논의는 남쪽의 우환이 아직 그치지 않았으니 공을 북으로 보내는 것은 마땅치 않다 하였고, 상이 그것을 따랐다.
정유년(丁酉年, 1597) 나주목사(羅州牧使)의 벼슬이 내렸으나 부임하기 전에 상국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가 되어 성주(星州)에 부(府)를 열고 공을 불러 중군(中軍)을 맡기려 하였다. 마침 고을의 수령이 비어 상국은 공으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였다. 이때 천조(天朝)의 24 장수가 바야흐로 성중에 머물렀는데, 조정 사신의 행차가 많아 문서가 쌓였다. 공이 모두 처리하니 환심을 얻을 수 있어 처치가 지체되지 않았고 관문서가 깨끗하였다. 금오산성(金烏山城)의 수장을 겸해 병기를 수선하고 성첩을 완성하니 완급(緩急)을 믿을 만 했다. 상국이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정유년 적이 영남과 호남으로부터 병력을 되돌려 고을 경계를 핍박하니 공이 적산(赤山)과 고양(高陽) 사이에서 힘써 싸웠다. 이로 말미암아 적이 백 리 가까이까지는 노략질을 할 수 없었다.
기해년(己亥年1599) 가을 북도방어사(北道防禦使)에 제수되었고 이내 본도 절도사(節度使)로 옮겼다. 북쪽 변방은 난리가 일어날 조짐이 보여 인심이 소란하여 공이 어짊과 위엄으로 아울러 행해 진무하니 겨우 진정되어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고 감복했다. 이때 노토부락(老土部落)이 우리나라가 어려운 것을 알고 우리를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공이 병력으로 한 번 떨쳐 국위를 펴고자 하였으나 묘당의 계책이 모두 흔단(釁端)이 생기는 것을 곤란하다 하였다. 공이 순찰사 상국 윤승훈(尹承勳)과 뜻이 같아 조정에 삼가 청해 선조가 비로소 허락하였다. 공이 정예 기병 4천을 뽑아 강을 건너 멀리 습격하여 장정을 죽이고 집을 불살랐다. 군사가 온전히 돌아오니 오랑캐의 여러 부족과 부락이 비로소 위엄에 떨고 서로 이끌고 귀화하였다. 선조가 공에게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를 더하여 포상했다.
신축년(辛丑年, 1601) 특별히 1년의 선정을 베푸니 백성들의 선망이 뒤따랐다. 임인년(壬寅年1602) 부절을 반납하고 남쪽으로 돌아왔다. 계묘년(癸卯年, 1603)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의 벼슬이 내려 창원(昌原)에 영을 차렸다. 조정의 논의는 진주(晉州)가 가히 다른 날을 보장할 수 있는 곳이라 하고, 또 공의(公議)에 따라 이내 진주로 영을 옮겼다. 공은 가시나무를 잘라 성부(城府)와 누각, 망루, 치첩을 세우니 전과 같이 화려하였으나 백성들이 괴로워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일자(一資)를 더하여 정경(正卿)의 질로 올랐다. 방백과 어사가 공의 치적을 서로 보고하니 임금이 비단을 내려 포상했다.
을사년(乙巳年, 1605) 선무(宣武)에 녹훈되었다. 공이 충을 앞세우고 적을 물리친 공이 으뜸이었으나 당시의 여러 장수들이 막혀 누락되는 것을 당해 다만 정헌(正憲)을 더했으나 끝내 조정에서 가로 막으니 사람들이 잘못이라 했다. 선원(仙源)과 학곡(鶴谷) 두 상공은 처음 공을 알지 못했다. 선원이 상주의 수령이 되고, 학곡이 어사로 본도를 살필 때 모두 공을 좋지 않게 보았고 어떤 사람은 공을 위해 위험하다 하였다. 공이 말하길, 모두 청아한 명망이 있는 사람이다. 어찌 사람을 해하겠는가 하였다. 이후 양공이 미처 듣지 못한 것을 듣게 되어 모두 공에게 허여하고 서로 자세히 알게 되었다.
병오년(丙午年, 1606) 길주목사(吉州牧使) 겸 방어사(防禦使)에 제수되었는데, 전일 공을 싫어한 자가 배척한 것이다. 공이 공법을 받들어 백성들의 피해를 없애니 백성들이 비로소 안도했다. 가을에 이르러 병으로 사직을 청해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정미년(丁未年, 1607) 수원부사(水原府使)의 벼슬이 내렸다. 수원은 땅이 크고 사람이 많았으나 전원(田園)이 제도를 벗어난 것이 많았다. 공이 법으로 하나 같이 다스렸다. 왕자(王子)가 관속(官粟) 백 포를 빌려달라 하니, 공이 말하길 수령이 어찌 왕자와 사사로이 주고받을 수 있는가. 국가의 창고를 어찌 다른 사람과 가히 멋대로 할 수 있는가 하고 곧바로 사양하였다. 왕자 또한 감히 공을 꾸짖지 못하였다.
무신년(戊申年, 1608) 나라에 큰 슬픔이 있었고 옥사가 거듭 일어났다. 조정이 바야흐로 위기에 처하자 공에게 명하여 들어와 호위하게 하였다. 대개 공의 위엄과 명망을 빌리기 위해서였다. 광해(光海)가 처음 왕위에 올라 제주목사(濟州牧使)의 벼슬을 내렸으나 공이 수질(水疾)로 사양하니 체직되어 이내 옛 벼슬에 두었다. 여름 북병사(北兵使)의 벼슬을 내리니 공이 더욱 먼 곳으로 떠날 계책이었으나 목전에서 이르지 못했으나 방비를 튼튼히 했다. 조정에서 북쪽을 중히 여겨 임기를 채우고자 공을 머무르게 했다.
신해년(辛亥年, 1611)에 돌아와 중추부(中樞府)와 겸하여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 포도대장(捕盜大將), 원유사(園囿司) 제조(提調)의 벼슬을 내렸다.
임자년(壬子年, 1612) 평안병사(平安兵使)에 제수되어 군사와 백성에 관한 정사를 돌보고 북쪽을 감시하는데 변함이 없었다.
갑인년(甲寅年, 1614) 만기가 되어 돌아와 중추부와 겸하여 정미년과 기유년과 같이 하였다. 또 숙위(宿衛)를 총괄하고 무고(武庫)를 관장하였다.
병진년(丙辰年, 1616) 노고로써 숭정(崇政)으로 올랐다. 정사년(丁巳年, 1617) 묘당이 오랑캐의 세가 더욱 강성해졌다 하여 공이 아니면 진압할 수 없다 하여 다시 북절(北節)을 공에게 맡겼다. 평생 삼장화양(三掌華陽)에 견줄 수 있다.
무오년(戊午年, 1618) 왕의 군대가 패해 서북쪽이 크게 놀랐다. 오랑캐의 사신을 강에 다다라 우리를 힐난하며 말하길, 이미 우리에게 화의를 말하더니 어찌 군사를 내어 명을 도왔는가 하였다. 공이 다시 말하길, 천조(天朝)는 곧 부모이다. 아들이 아비를 구하는 것이 어찌 문제가 되는가. 또 양국이 이미 화의하였고 변방의 오랑캐가 철수하였으니 고마운 마음이 있지 않은가 하니, 오랑캐가 다시 힐문하지 못하였다.
기미년(己未年, 1619) 체직되어 돌아오려 하였으나 하락받지 못했다. 공이 연이어 집안의 상을 당해 옥관지청(玉關之請)으로 조정에 여러 차례 진달하였다. 교체하란 명이 내려졌으나 오히려 대신 내보내지 않았으니 사람 구하기가 어려웠다.
계해년(癸亥年, 1623) 반정이 일어나 선전관이 성밖에 말 달려왔다. 공이 기와 북을 세우고 정당에 앉아 장사를 모아 성문을 닫았다. 미처 자전(慈殿)이 복위되고 옛 임금이 쫓겨났단 소식을 듣고 비로서 갑옷을 풀고 명을 받았다. 공의 처신이 평상시와 비상시가 같으니 듣는 이가 모두 감복하였다. 서추(西樞)로 돌아와 예전 관직을 겸하였다. 또 묘정에 참여하였는데, 언제나 특진관(特進官)으로 경연에 올랐다. 임금이 북로(北路)의 일을 물으니, 공이 대답하길 북로의 병사는 잔약하고 백성은 흩어졌으니 오직 읍(邑)을 택해 장수를 뽑아 지키게 하면 가히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하니 왕이 좋다고 칭찬하였다.
갑자년(甲子年, 인조 2) 서수(西帥)가 병사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다. 밤 이고(二鼓)에 임금이 편전에 납시어 군신을 불러 일을 도모했는데, 부원수(副元帥)의 나아가 말을 달려 역적을 토벌하라 명했다. 덧붙여 이르기를, 이수일이 아니면 불가하다 하였다. 임금이 곧 공에게 사도부원수(四道副元帥) 평안병사(平安兵使)에 제수하자 공이 해가 뜨자 하직하여 물러났다. 창졸지간에 임무를 맡았으나 아직 병사가 조련되지 않았고, 다만 옛날 부리던 부곡(部曲)과 금병(禁兵) 2백으로 서쪽으로 말달려 서흥(瑞興)에 다달았다. 병력이 주둔한 곳에 당도하니 그 세가 쇠잔하였고 적은 많고 우리는 적었다. 사람들이 모두 위험하다 하였으나 공은 충의(忠義)로 격려하고 반드시 죽어 돌아갈 마음이 없다 하였다. 적이 협곡을 따라 지름길을 끼고 나아가 피해 공의 뒤를 에워쌌다. 이때 원수(元帥)가 적을 뒤쫓아 이르렀다. 공은 수하에 병력이 없다 말하고 원수는 사졸과 더불어 천여 인이었다. 공이 이미 원수와 더불어 만나 진퇴의 지속을 스스로 오로지 할 수 없어 함께 장단(長湍)에 이르렀다. 대가가 남쪽으로 파천했고 흉봉(凶鋒)이 이미 경사(京師)를 차지했단 소식을 들었다. 원수가 여러 장수를 모아 뒷일을 도모했는데, 공이 눈물을 뿌리며 앞으로 나아가 부하를 독려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원수 역시 선봉 정충신(鄭忠信)과 남이흥(南以興) 등을 보내 추격하게 하고 공과 더불어 함께 안현(鞍峴)을 점거했다. 두 장수가 왼쪽에 있고, 공은 오른쪽에서 기각지세(掎角之勢)로 기다렸다. 날이 밝자 적의 모든 무리가 침범해 왔다. 공이 북을 울리며 무리를 독려하고 합쳐 싸워 오래지 않아 공이 장수와 경졸을 모두 내어 적의 중군을 무너뜨렸는데 곧 항왜(降倭)의 죽은 자가 우리보다 많았다. 적세가 이로 말미암아 크게 무너져 드디어 패배에 이르렀다. 원수는 군대의 후미에 있었다. 공이 먼저 행재소에 승첩을 알리고 여러 장수를 독촉하여 적을 추격하여 경안(慶安)으로 진격했다. 역괴(逆魁) 등이 수하에게 살해되자 공은 병사를 파해 경성의 진으로 돌아왔다.
첩서(捷書)가 먼저 이르니 곧 공을 보국(輔國)으로 올렸다. 임금이 도성으로 돌아오자 원수가 백의(白衣)로, 공은 고건(櫜鞬)을 갖추어 강외에서 맞아 알현하였다. 임금이 가마를 멈추고 노고를 치하며 이르기를, 경의 힘에 의해 궁궐이 숙청(肅淸)되었다고 하였다. 공이 울면서 사양하며 말하기를, 죄가 실로 많습니다. 신이 어찌 이 싸움에 힘이 되었습니까 하였다. 원수가 공을 불쾌하게 여기고 공을 논할 때 원수는 공을 3등에 두고자 하였다. 대신이 말하길, 이목(耳目)이 문서를 보았는데 부수(副帥)의 공이 마땅히 1등인데 어찌 3등으로 내렸는가 하였다. 원수가 강하게 주장하여 공을 제2등에 두었으니 여론이 놀라고 분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공이 태연히 아무 꺼리낌 없는 마음이었다. 입으로는 다른 것을 말하지 않으니 모두가 큰 나무라 칭찬했다. 공이 휘하 사졸이 공이 있음에도 역시 누락되어 모두 창을 지고 분해하며 임금께 글을 올려 스스로 하소연하고자 했다. 공이 말하길, 안현의 승첩은 우리 왕의 우령에 이끌려 힘입은 것으로 나와 원수는 공이 없을 뿐이다 하고 힘써 막았다. 공이 공훈을 사양하고 또 서곤(西閫)을 사양하였으나 청을 이루지 못하였다. 진무(振武)라 공신호가 내리고, 봉군호는 계림(鷄林)이다. 거듭 철옹(鐵甕)에 부임하자 서쪽 백성들이 창과 독을 다시 본 듯 호랑이가 가고 어머니가 돌아온 듯하였다. 가을 부원군으로 체직되어 돌아왔다.
을축년(乙丑年, 1625) 삽혈회맹(歃血會盟)에 참석하여 연석(宴錫), 토전(土田) 장획(臧獲), 은채(銀綵), 구마(廏馬), 도화(圖畫), 단청(丹靑)을 내려받고 통제사(統制使)의 벼슬이 내려졌다. 통영(統營)은 재부가 여러 진(鎭) 중 으뜸으로 살찌고 아첨하는 것이 모두 이곳에서 나왔다. 스스로 단속하여 절약하고 사사로이 수공(手工)에 투자하는 것을 막으니 감한 것이 항상 창고의 거의 반이었다. 삼남(三南)의 장부에 오르지 않은 곡식 천만을 파하고 뇌물이 이르지 못하도록 법을 바로잡으니 영중(營中)이 숙연하고 모든 길이 편하게 되었다.
정묘년(丁卯年, 1627) 임금이 강도(江都)로 행행하자 공이 주사(舟師)를 내어 들어가 호위하였다. 난이 끝나자 선속(船粟)과 연포(輦布)로 사농시(司農寺)를 도왔다. 임기가 차서 충주 옛 집으로 돌아와 사냥하며 노후를 마치려 하였다. 그러나 횡성(橫城)의 변란이 일어나자 질병을 무릅쓰고 조정으로 나아가 옛 봉호와 계해년의 다른 직무를 겸했다.
무진년(戊辰年, 1628) 형조판서에 벼슬이 내려졌다. 법문은 어렵지 않게 하고 옥사는 원한이 없게 하였다.
신미년(辛未年, 1631) 남한산성 수어사(守禦使)로 제수되었는데, 공이 힘써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임신년(壬申年, 1632) 여름 병이 심하자 특별히 약을 내렸고 의관을 보내 병을 살피게 하였으니 임금의 은혜가 두터웠다. 이해 5월 27일 사제(私第)의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9세였다. 부음이 전하자 조회를 폐하고 부의를 내렸고 또 제기를 내렸다. 2등의 예로써 충주(忠州)의 북촌(北村) 김생리(金生里) 석교(石橋) 남향[子坐午向] 언덕에 장사지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공은 완산이씨(完山李氏)에게 장가들었는데, 공정대왕(恭靖大王)의 4대손으로 장원감(長原監) 귀년(貴年)의 딸이다. 부인은 아름다운 덕행으로 지극한 품행이 있었다. 계모가 자애롭지 못했지만 끝내 효를 다하였다. 형제 중에 홀아비와 홀어미가 있으면 의식을 함께 나누었다. 성품이 또한 근검하고 아름다운 옷과 고운 분장은 예를 벗어나지 않았다. 경강(敬姜)을 이었고 늙어서도 손을 놀리지 않았다. 제수와 제주로 조상을 받드는데 돈독하였고 자혜롭게 자식을 키웠으니 아래로는 노복에 이르렀다. 규문(閨門)이 기뻐하고 종당(宗黨)이 규식으로 취했다. 공보다 17년 후인 정해년(丁亥年, 1647, 인조 25) 대단치 않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85세였다. 4월 국상으로 집에 임시 묘소를 두었다가, 기축년(己丑年, 1649) 공의 묘소에 합폄하였다.
3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정(淀)으로 통정대부 판결사(判決事)이고 차남은 용(溶)으로 일찍 죽었으나 좌랑에 증직되었다. 다음은 완(浣)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판서(判書)이다. 큰딸은 군수 최휘(崔椲)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군수 한필후(韓必厚)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좌랑(佐郞)에 증직된 채계주(蔡繼周)에게 시잡갔고, 다음은 대사헌 이시해(李時楷)에게 시집갔다.
측실에게서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재(滓)로 무과 급제 후 절충(折衝)이다. 큰딸은 봉사 이형(李泂)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사과(司果) 조문발(趙門發)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부사 장훈(張曛)에게 시집갔다.
정(淀)은 참판 김반(金槃)의 딸을 맞아 2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인석(仁碩)은 현감이고, 다음 인하(仁夏)는 무과 급제 후 병사를 지냈다. 딸은 수찬(修撰) 홍주삼(洪柱三)에게 시집갔다. 용(溶)은 증 참의(參議) 유헌증(兪憲曾)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완(浣)은 현감 정민구(鄭敏求)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다. 서자 인걸(仁傑)과 인척(仁倜)이 있다. 한필후는 두 아들을 두었으니 여해(如海)는 찰방(察訪)이고 여두(如斗)는 감역(監役)이다. 채계주는 두 딸을 두어, 도사(都事) 이성전(李晟傳)과 학생 윤민행(尹敏行)이다. 이시해는 세 딸을 두어, 학생 한석현(韓碩賢)과 지평(持平) 원만리(元萬里), 진사 정유악(鄭維岳)이다.
재(滓)는 지사(知事) 강복성(康復誠)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다. 이형은 5남 3녀를 두었고, 조문발은 2남 3녀를 두고, 장훈은 2녀를 두었다.
공은 인후(仁厚)함이 안으로 쌓이고, 화순(和順)은 밖으로 드러났다. 난을 만나 의기가 분발하고 적은 만나서는 행동거지가 편안하고 막힘이 없었다. 사졸들과 더불어 가장 아랫사람과도 감을 잘라 작게 나누었으니 사졸들이 모두 즐거이 따랐다. 적을 헤아려 기회를 잡았고 먼저 따지고 후에 싸웠다. 몸소 수십백 전투를 치렀어도 이것으로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 전후 고을 수령과 병사로 40여 년을 지내고 단속하고 단속하여 청빈함을 스스로 지녔다. 당시 무장들의 부귀영화로 공을 기피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또한 공을 부끄러워함이 없지 않았다. 더욱 돈독하게 안으로 힘썼다. 종족과 친구가 궁핍하여 불을 피울 수 없는 자나 가난하여 결혼할 수 없는자, 죽어도 염하여 장례할 수 없는 자는 모두 공이 취하여 재물을 댔다. 백부와 중부가 일찍 죽으니 고아를 돌보는 것을 자기가 낳은 것처럼 하였고 그로 하여금 각기 제자리를 찾게 하였다. 세상이 어지럽고 풍속이 더러워 평소 사대부로 기대하는 재화를 숭상하지 않은 자취가 거의 없으니, 이름을 더럽히고 몸을 망쳤다. 공이 홀로 바지 입고 멀리 피하고, 발을 들어 훌쩍 벗어나니 무반 중에 원우(元祐)의 완인(完人)이 될 수 있었다. 운은 성스러운 임금[昌辰]에 속하고 융숭함에 주의하였다. 진신 명류가 천거하길 공이 많았으니 모두 그와 더불어 종유함에 틈이 었었기 때문이다. 공이 겸손과 공손함을 스스로 길렀으니 물러나 사양하고 귀함을 잊었다. 사람을 대할 때 정성을 다하고 가난하거나 천한 것을 가리지 않으니 사람들이 이로써 다투어 가깝게 지냈다. 일찍이 인명으로 위엄을 삼지 않았고, 또한 숨긴 것을 들춰 밝히지 않았다. 아래로 거짓이 없었고 섬김에도 극진하니 군민(軍民)이 자애롭게 대했다.
영남의 진주, 성주, 통영 같은 곳과 기내(畿內)의 수원, 관북의 경성이 모두 정갈한 돌로 송덕비를 세웠다. 어지러이 화려한 장식이나 교언영색이 마음에서 싹트지 않았고 밖으로 형세를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일찍이 공의 됨됨이를 사모하여 낙제(駱第)에서 공을 뵙자 공은 아래 사람에게 예를 더욱 극진히 하였다. 내가 괴이하여 묻길, 공은 일대의 명장으로 훈위가 이미 높은데도 하급관리를 대할 때 어찌 공손하게 하냐 하였다. 공이 이르길, 나의 이름은 장수이고 그대는 임금의 근신이다. 장수로 삼아 임금을 가까이 하는 이들이 공경하지 않으면 조정을 가벼이 하는 것이고, 장수가 조정을 업신여기면 나라의 복이 아니고 적에게 몸을 굽히는 것이다고 하였다. 내가 탄식하여 의혹이 풀리니 더욱 공이 지금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겠다. 내가 더하여 강연(講筵)에 오를 때 공도 역시 등대(登對)하였는데, 상이 변방의 일을 묻자 공은 불을 밝힌 것처럼 진퇴승강(進退升降)의 여러 계책의 이해(利害)를 말씀드렸다. 온화한 모습이 학사, 대부가 조석으로 마주한 것 같았으니 전상(殿上)에 시립해 있던 여러 신하가 탄복하여 시원해 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후 내가 사신으로 영해(嶺海)에 이르면 이때 공이 마침 통제사[橫海之節]를 제수받았으니 삼변(三邊)의 사녀가 환호하며 좋아서 뛰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함께 말하길, 이영공(李令公)이 와서 바닷가 일반 백성으로 공의 학문과 덕의 여파르 입었으니 공의 어진 명성이 사람 깊숙이 들어와 이와 같지 않겠는가 하였다. 내가 돌아와 임금께 글을 올리니 임금 또한 가상히 여기셨다. 나는 이른바 분양(汾陽)과 무혜(武惠)의 풍모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사람이 같은 말이라도 옛과 지금 사람이 같지 않다. 분양이 당 왕실을 재조(再造)하니 공훈이 천하를 가리니 이것이 공에 비하면 오히려 조금 양보할 만하다. 사치스러움과 욕심을 끝까지 추구하면서 누가 공이 검약함을 잃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하겠는가. 곽희(郭晞)가 가르침을 어기고 범법한 것은 누가 공이 의로운 방법으로 위로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는가. 공자의 추정(趨庭)과 주선왕(周宣王)의 고실(考室) 아이는 하나는 어진 관리가 되어 치적이 크게 드러났고, 하나는 구례(具禮)이 단(壇)에 올라 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무혜가(武惠家)의 찬(璨)과 위(瑋)를 책망하지 않으며 고금(古今)의 사람들이 같다, 다르다 과연 어찌 하겠는가. 공의 자손은 능히 공의 마음을 위하는 마음이 있어 더욱 겸손하고 공손함을 돈독히 하고 공의 유훈을 저버리지 말고 시종(始終) 변화가 없으면 곧 이씨의 복은 다하지 않을 것이다.
공을 장사지낸 지 25년, 공의 맏아들 판결공 및 판서공이 공의 가장(家狀)으로 문을 두드려 울면서 청하길, 선인의 묘에 나무가 무성한데, 묘도에 오히려 비석[顯刻]이 없으니 대개 때를 기다린 것이다. 세상이 우리 선공을 알아도 공 같지 않으니 원컨대 청을 불후(不朽)로 청합니다 하였다. 내가 글공부에 종사한 지 오래지 않고 글은 내가 오히려 타인에 낫지 않으니 어찌 불후의 일을 감당하겠는가. 불후인은 또 감당할 수 없다. 하물며 불후한 공인가. 이로써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두 공이 끝내 물러나지 않아 내가 더이상 사양할 수 없어 드디어 차례로 세계와 관봉(官封), 자성(子姓), 졸장일월(卒葬日月)은 우와 같다. 명하여 가로되,
토다운 시와 심복하는 예는 극곡(郤縠)의 장수라네
먼저 모의하고 뒤에 싸우니 영평(營平)의 지혜로세
공이 또 아울러 취한 것 그 인(仁) 같은 것
병법에 길한 것은 장인(長人)으로 족하네
문란한 때를 당해 울분으로 몸을 돌보지 않네
긴 활 날선 칼, 모든 영에 붉은 깃발
땅에서는 긴 뱀 자르고 바다에선 악의 괴수 제압하네
극복하여 공훈 드니 공경과 장수 별처럼 빛나고
북병사 세 번으로 자물쇠 굳건하고
두 차례 서곤(西閫) 왕의 영위 끝이 없네
거스른 반역 칼 휘둘러 남쪽 향하네
한밤중 넓적다리 치니 창졸간에 부월 받네
나의 머리 가지고서 호랑이굴 가리키네
깃발 들어 쫓아오니 북산에 묻히려나
굳센 무장 갖춰 한강에서 어가 맞네
숙청(肅淸)의 공 서평(西平)에 어렴풋이 비슷하네
사직의 안위 전후 다만 힘입었네
어찌 그런가, 인(仁)과 지(智)가 모여있네
겸공(謙恭)으로 이끌어서 심소공대(心小功大)
이 몸에 경사 미쳐 만복이 밝게 빛나네
한강 상류 백운산 남쪽 터
울창하고 아름다운 성 영령 깃든 복 내리고
정결한 돌 동쪽에 새기니 공(功)을 가득 기록하네
나의 말 비웃지 마소. 어찌 천년을 징험할까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40년 정미(丁未, 1667) 3월 3일 세우다.
『백강집(白江集)』
1 권14, 비지(碑誌) 계림부원군이공신도비명병서(鷄林府院君李公神道碑銘幷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