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국(高麗國) 경렬공(敬烈公) 묘지명
대중대부 검교대자대사 행전중감 지상서도성사(大中大夫 檢校大子大師 行殿中監 知尙書都省事) 박경산(朴景山) 지음
광국공신 금자광록대부 검교태위 수사공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공부사(匡國功臣 金紫光錄
1大夫 檢校太尉 守司空 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判尙書工部事)의 성은 한(韓)이고, 이름은 유충(惟忠)이다. 옛 이름은 주(柱)이고, 자는 안석(安石)인데, 청주(淸州) 관내 대흥군(大興郡)
2 사람이다.
돌아가신 검교우복야 수상서호부시랑 어서검토관(檢校右僕射 守尙書戶部侍郞 御書檢討官) 원경(元卿)의 아들이고, 우복야 수좌사낭중 기거주 지제고(右僕射 守左司郞中 起居注 知制誥)로 추봉된 억(億)의 손자이다. 어머니 오원군태부인 이씨(五原郡太夫人 李氏)는 돌아가신 중추사 상서우복야 한림학사승지 지제고(中樞使 尙書右僕射 翰林學士承旨 知制誥) 영간(令幹)의 아들인 시전중내급사(試殿中內給事) 인효(因孝)의 딸이다.
문득 어느 날 밤 꿈에 큰 기둥이 솟아 올라 하늘을 찌르는 것을 보고 이에 임신하여 공을 낳았으므로, 이름을 주(柱)라고 하였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생김새와 용모가 깨끗하고 준수하였다. 16세에 스승에게 나아가 배웠는데, 가르침을 번거로워 하지 않아 재주와 학술이 뛰어나게 훌륭하였다. 21세에 사성시(司成試 : 國子監試)에 급제하였다. 25세 때인 숙종(肅宗) 시절, 예종(睿宗)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태자로 있을 때에 임금의 명을 받아 많은 선비들에게 정시(廷試 : 覆試)를 치르게 하였는데, 공이 영시(令試)에 나아가 을과(乙科)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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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남경유수관장서기(南京留守官掌書記)가 되었는데 일을 분명하게 처리하였으므로 이속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부임한 지 2년이 되던 해에 예종이 남쪽으로 행차하자, 그 치적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3년이 되어 임기가 차서 서울로 돌아오자 임금이 명하여 내시(內侍)에 소속되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어서교감(御書校勘)에 임명되었다. 그가 담당한 일들이 정확하고 깔끔하게 처리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임금이 추진하려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명하였다.
임금이 요(大遼)에 사신을 보내면서 공을 도부서(都部署)로 삼았는데 돌아올 때까지 8~9년이나 걸렸다. 무술년(예종 13, 1118)에 송(大宋)에 선발되어 들어갈 때에는 행리도관구(行李都管句)가 되고, 귀국하자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에 임명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임금이 공의 청렴함과 곧음을 아껴서, 사람들을 바르게 하고자 좌우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여 다시 내시에 속하게 하였다.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서 명을 받들어 태자[潛龍]로 행궁(行宮)에 있는 인종(仁宗)을 모시면서 지위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이 되었다. 예종이 병이 들자 인종을 태자로 삼았으나, 나이가 아직 어렸다.
4 시중(侍中) 김연(金緣)이 궁궐에 들어와 간병하게 되자 임금이 돌아보며 말하였다. “태자가 나이가 어린데, 만일 군국(軍國)의 큰일을 다스리게 한다면 누구를 의지할 만합니까.” 시중이 아뢰었다. “한주(韓柱)라면 괜찮을 것입니다.”
예종이 승하하자 인종이 왕위를 이었는데, 유조(遺詔)를 받들어 공을 권지우부승선(權知右副承宣)에 임명하니, 무릇 장례를 지내는 의례와 임금을 섬기는 마음에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당시 모후(母后)의 아버지인 국공(國公 : 李資謙)이 권력을 오로지 하여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다. 공이 왕명을 출납하는 직책[喉舌之任]에 있었으므로 그 일을 바로 잡고자 하였는데, 국공이 공의 강직함을 미워하여 죄를 거짓으로 보고하여 남쪽 지방으로 쫓아 보내었다. 공이 강남으로 유배된 지 여러 해가 되어 문득 꿈 속에서 예종을 알현하였다. 조용하게 모시면서 여쭈어보자 임금이 말하였다. “그대는 이름을 고쳐서 유충(惟忠)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소.” 곧 그 뜻을 깨달아 간절하게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병오년(인종 4, 1126)에 국공이 패망하자 임금이 곧 소환하여 어전에서 만나보고 친히 위로하였다. 공이 강남에 있었을 때 꿈에서 선왕이 이름을 고쳐준 일을 말씀드리니, 임금이 기이하게 여기고 즉시 명하여 유충이라고 하였다. 다시 내시에 소속되어 주문(奏文)을 쓰고 또 임시로 승제[權承制]가 되었으며, 이어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을묘년(인종 13)에 서경(西京)이 반역하였다.
5 공이 상경 중군병마사(上京 中軍兵馬使)로서 군사를 선발하여 조련하였는데, 서경을 정벌하는 원수<金富軾>의 뜻과 다소 어긋났다. ▨
<뒷면>
원수가 서경을 평정하고 대궐로 돌아와 탄핵하였으므로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차출되었으나, 3년이 지나 임기가 끝나자 서울로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공부(工部)와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임명되고, 곧 수사공 이부상서 판비서성사(守司空 吏部尙書 判秘書省事)에 올랐으며, 또한 좌복야 추밀사(左僕射 樞密使)가 되었다.
갑자년(인종 22, 1144)에 과거[春闈]를 주관하여 선비들을 엄밀하게 뽑고,
6 이 해에 참지정사(叅知政事)에 임명되었다. 을축년(인종 23, 1145)에 중서시랑평장사 판예부사(中書侍郞平章事 判禮部事)가 더해졌으나, 직(職)을 바꾸지 않았다.
병인년(인종 24, 1146)에 인종이 승하하자, 지금의 임금<毅宗>이 즉위하였다. 공이 재상[相府]으로 있으면서 논의하는 것이 충성스럽고 곧았지만 스스로 굽히지 않았으므로 인심에 많이 거스르게 되었다. 이에 또 재상에서 파직되어 사공 좌복야 판비서성사(司空 左僕射 判秘書省事)가 되었으나 관청에 나오지 않았다. 임금이 거듭 내인(內人)을 집으로 보내어 여러 차례 위로하고 설득하면서 다시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는 옛 사람들의 이른바 ‘도를 굽히지 않고 사람을 섬기면 어디에서라도 세 번은 쫓겨난다.’라고 한 것이다.
이 해 가을에 마침내 병이 들어, 67세로 절에서 돌아가셨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비(批)를 내려 옛 관직을 회복시켜 주었으며, 제사를 지내고 조문을 표하는 의식을 모두 갖추게 하였다. 시호를 경렬공(敬烈公)이라 하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공(公)과 상(相)의 예(禮)로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조정의 사서(士庶) 가운데에는 비록 공을 달가와 하지 않는 사람들 간에 구구한 의논도 있었지만 감히 법에 어긋나는 일로 나무라지는 못하였다. 이로써 공의 평생의 지조와 절개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은 돌아가신 이부상서 문덕전학사 지제고(吏部尙書 文德殿學士 知制誥) 김상우(金商佑)공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4남 4녀를 낳았다. 장남은 두 살 때 일찍 죽었고, 둘째 문유(文裕)는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고, 셋째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대선(大選)에 들어 중태사(重太師)가 되었고 지금 영복사(永福寺)의 주지로 있으니 이름이 문혜(文慧)이다. 넷째 문준(文俊) 역시 과거에 올라 비서교서랑(秘書校書郞)이 되었다. 장녀는 좌우위녹사참군사(左右衛錄事叅軍事) 유광택(劉光澤)에 시집갔고, 둘째는 시공역서령 겸 보문각교감(試供驛署令 兼 寶文閣校勘) 윤인첨(尹鱗瞻)에게 시집갔으며, 셋째는 내시 상서좌사원외랑(內侍 尙書左司員外郞) 임극정(任克正)에게 시집갔는데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넷째는 지수주사판관 양온령(知水州事判官 良醞令) 이봉의(李鳳儀)에게 시집갔는데, 모두들 집안을 지키는 주인이 되었다.
나는 공과 어릴 때부터 서로 친하여서 공의 평생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그 행적을 간략하게 적고, 또 명(銘)하여 이른다.
빛나도다, 한공(韓公)이여.
바른 도를 지켜서 굽히지 않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니 때에 구애받지 않았다.
군자의 옳음과 소인의 그름을
하늘이 바로 잡아 주지 않으니
아, 가히 슬프도다.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