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존비묘지명(李尊庇墓誌銘)
- 시대
- 고려
- 연대
- 1287년(충렬왕 13)
- 유형
- 묘지명·묵서명
- 크기
- 세로 81.0cm, 가로 51.0cm, 글자크기 1.5cm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가 168-6 국립중앙박물관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 /각자 /서자
- 미상 / 미상 / 미상
- 지정사항
- 비지정유산
- 연구정보
개관
이존비(李尊庇 : ?~1287)는 고성군(固城郡 :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군) 사람으로 처음 이름은 인성(仁成)이고, 자는 지정(持正)이다. 아버지 진(瑨)은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백씨(白氏)로 본관은 남포(藍浦 :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이며, 외조는 예부낭중(禮部郞中) 경선(景瑄)이다. 외삼촌 백문절(白文節)에게 글을 배워 문장과 예서(隸書)에 능했다. 원종 초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내시(內侍)로 들어갔다가 국학박사 직한림(國學博士 直翰林),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역임하였으며, 충렬왕 초 상서우승(尙書右丞)·사의대부(司議大夫)를 거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1279년(충렬왕 5)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오고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지밀직사사·세자원빈(知密直司事·世子元賓),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하였고 1287년(충렬왕 13) 일본을 정벌할 때 경상·충청·전라도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 병량(兵糧)·군선(軍船)을 조달하였으며, 뒤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이르렀다. 또 두 차례에 걸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인재를 선발하였다. 좌복야 한림학사(左僕射 翰林學士) 이주(李湊)의 큰딸과 결혼하여 4남 3녀를 낳았다. 1287년(충렬왕 13)에 향년 55세로 서거하니, 채전산(菜田山) 동쪽 기슭에 장례지냈다.
판독문/해석문
전체 3개
해석문 | 김용선 | ||
판독문 | 서울金石大觀 | ||
판독문 | 김용선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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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 2001 | 金龍善, 2001, 『高麗墓誌銘集成(第三版)』,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
논문 | 1994 | 「이암의 생애와 서예」 |
단행본 | 1984 | 許興植, 1984, 『韓國金石全文』中世下, 亞細亞文化社 |
단행본 | 1968 | 李蘭暎 編 李丙燾 監修, 1968, 『韓國金石文追補』, 中央大出版部 ; 1976, 亞細亞文化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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