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堯) 임금은 아들인 단주(丹朱)를 버리고 순(舜)에게 선위하였는데, 순 임금은 요임금의 덕을 거듭 빛냈으므로 요임금의 어짊이 더욱 후대까지 미쳤고, 문왕은 아들인 백읍고(伯邑考)를 버리고 무왕을 왕으로 세웠으므로 무왕은 문왕의 공적을 훌륭히 계승하여 주(周)나라의 왕업을 더욱 창성하게 하였다.
공자가 “당(唐)·우(虞)가 어진 신하에게 선위하고 하(夏)·은(殷)·주나라가 자손이 왕위를 이은 뜻은 한가지이다”라고 말한 것은 모두 사심이 없었다는 것을 지적한 말이다.
우리 태종이 선위한 것은 요 임금과 문왕이 품었던 마음이며, 우리 세종이 선위를 받으신 것은 순 임금이나 무왕과 같은 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종이 재위했을 때 일찍이 원자 제(禔)를 세자로 삼고 어진 스승과 벗을 가려서 교육의 방법을 극진히 하였으나, 세자는 자라서도 장난기가 있어서 학문과 덕이 나아가지 못하니 태종이 매우 근심하였다.
영락(永樂) 무술년(태종 18, 1418) 6월에 세자가 덕을 심하게 잃자 태종이 적손을 세워서 후사로 삼고자 하였는데, 대신들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세자의 교육을 위해서 온갖 방법을 다 쓰셨는데도 오히려 이런 상황이 되었는데, 이제 어린 손자를 세자로 책봉한다 하더라도 어찌 뒷날에도 현명하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아비를 폐하고 그 자식을 세우는 것은 의리로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진 이를 가려서 후사로 삼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 세종은 세자의 동복아우로서 서열은 셋째이고, 일찍이 충녕대군으로 봉해져 있었다.
태종이 “충녕이 여러 아들 가운데서 가장 어지니 그를 세자로 세우는 것이 옳겠다” 하고 마침내 충녕을 세자로 삼으니 종친과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이 절하며 하례하고, 내외가 모두 만족히 여겨 칭송하였다.
드디어 천자에게 상주(上奏)하니 천자가 칙서를 보내 이르기를 “적출(嫡出)의 장자를 후사로 세우는 것은 고금(古今)의 바꿀 수 없는 떳떳한 도리이지만 후사가 어질고 어질지 못함은 국가의 성쇠와 존망이 달린 것이다. 왕은 국가의 먼 장래를 염려하고 성쇠와 존망의 기미를 밝게 살펴 어진 이를 세워 후사로 삼고자 하니 왕의 선택을 윤허하겠다” 라고 하였다.
이 해 8월에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하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책명(策命)을 청하였다. 11월에 세종이 책보(冊寶)를 받들어 태종에게 ‘聖德神功上王’의 존호를 올렸다.
다음해인 기해년(세종 1, 1419) 봄 정월에 천자가 홍로시승(鴻臚寺丞) 유천(劉泉)을 보내 세종을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그 해 6월에 천자가 태종에게 조칙을 내리기를 “왕의 셋째 아들이 효성스럽고 학문에 힘써 종사를 계승할 만하다 하고, 또 자신은 연로하다 하여 전위할 것을 청하였다. 나는 왕의 식견이 총명하여 사리에 통달함을 생각하여 특별히 윤허한다. 대체로 대를 이을 때는 후사가 있어야 하고 보위를 전할 때는 마땅한 사람을 얻어야 한다. 이제 왕은 어진 이를 가리고 덕 있는 이에게 명하여 종사를 맡게 하였으니 백성들의 소망에 부응하였다. 나는 이를 진실로 아름답게 여기고 기뻐하여 왕에게 잔치를 내린다. 이는 왕실 일가의 경사일 뿐만 아니라 온 백성의 경사이다” 하였다.
또 세종에게 칙서를 내려 충효의 도를 권하여 힘쓰게 하고 잔치를 내려 주었다. 8월에 사신이 서울에 도착하여 두 임금이 경복궁의 근정전에서 잔치를 받으니 예악(禮樂)의 성대함에 온 나라가 떠들썩하였다.일찍이 원경왕후(元敬王后)께서 홍무(洪武) 정축년(태조 6, 1397) 4월 10일 임진에 세종을 한양의 잠저(潛邸)에서 낳으셨는데, 네 살 되던 해 왕후가 태종께서 세종을 안고 해 가운데 앉아 있는 꿈을 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종께서 왕위에 오르고 세종이 다시 대통(大統)을 이었으니 하늘이 덕 있는 이에게 명을 내리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세종은 즉위 전부터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조용하고 말수가 적어 위엄이 있고 엄숙하였다. 대위(大位)에 오른 후에는 총명과 지혜가 우뚝이 뛰어났으며 너그럽고 부드러운 기품으로 백성을 용납하고 대중을 기르는 덕이 있었다.
물건을 제작할 때는 홀로 지혜를 내어 힘차고 굳센 의지를 발휘하여 두려워할 만하고 본받을 만하였으며 단엄하고도 치우침이 없이 곧아서 공경함을 갖게 하였다.
정밀한 뜻은 입신의 경지에 올라 사물의 이치에 대해 자세하고 명확한 변별력이 있었다. 날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동이 틀 때 조회를 받고 정사를 본 다음 윤대(輪對)
1하였다. 경연에 나갔다가 내전(內殿)에 든 뒤에도 글을 보는 등 조금도 게으름이 없으니 정사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는 일이 없었다.
태종은 세종에게 전위한 후로는 나랏일을 적당한 사람에게 맡겼다고 생각하여 산수의 취미를 즐겨 자주 교외로 놀이를 나가 유쾌히 지냈다. 가끔 신하에게 이르기를 “밝은 임금을 얻어 국정을 맡겼으니 천하에 나처럼 근심 없는 이는 없을 것이다. 어찌 천하에 나 같은 이가 없겠는가? 고금을 통틀어서도 나 같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대개 국정을 근심함이 깊었기 때문에 그 기뻐함이 이와 같은 것이었다.
10월에는 사찰의 노비를 혁파하여 모두 관으로 귀속시켰으며 이어서 5교를 혁파하고 선종(禪宗)·교종(敎宗) 양종만 남겨 두니 이단의 종교가 크게 정비되었다.경자년(세종 2, 1420) 봄에 비로소 집현전을 설치하고, 학문에 밝은 선비를 뽑아 모아 고문(顧問)에 응하게 하였다. 이 해 여름에 원경왕후가 학질(瘧疾)에 걸려 궁궐 밖으로 피하였는데 왕후의 가마를 부축하여 따라 나가서 심지어는 노숙을 하며 약을 받들어 항상 곁을 떠나지 않았다. 7월에 왕후가 승하하시니 미음도 들지 않다가 태종께서 억지로 권하고 나서야 조금 들을 정도였다.
신축년(세종 3, 1421) 8월에 천자가 북진을 정벌할 때 말 1만 필을 바치니 천자가 가상히 여겨 포장하고 은폐(銀幣)를 하사하였다. 9월에 태종에게 ‘太上王’의 존호를 올렸다.
임인년(세종 4, 1422) 5월에 태종이 승하하자 3년 동안 최복을 입고 정사를 보았으며 이를 영세(永世)의 법으로 삼았다.
갑진년(세종 6, 1424) 가을에 명나라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가 승하하고, 인종(仁宗) 소황제(昭皇帝)가 등극하므로 사신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어 올리고 위로하였다. 등극함을 하례함에 예절을 극진히 다하니 천자가 기뻐하여 충성이 지극하다고 포장하고 채색 폐백을 내려 주었다.
을사년(세종 7, 1425)에 인종이 승하하고 선종(宣宗) 장황제(章皇帝)가 등극하자 또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하례하였다.
선덕(宣德) 병오년(세종 8, 1426) 봄에 천자가 지극한 정성을 칭찬하여 폐백을 보내셨는데 왕비까지 미쳤다.
이 해 겨울에 또 『五經』·『四書』·『性理大全』·『通鑑綱目』 등 서적을 보냈다. 이때부터 상(賞)을 보냄이 거르는 해가 없었으며, 나중에는 황제가 차던 보옥(寶玉)으로 만든 띠, 고리와 도검(刀劍)까지도 풀어서 보내 주었다.기유년(세종 11, 1429) 여름에는 성균관에 행차하여 선성(先聖)께 배알하고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다. 조정에서 백성들이 항상 우리나라 산물이 아닌 금·은을 해마다 명나라에 공물로 바치는 것을 계속하기 어렵다고 근심하였다. 이에 동생 함녕군(諴寧君) 인(裀)을 보내 연유를 갖추어 진술하니, 천자가 특별히 금과 은의 조공을 토산물로 대체해서 바칠 것을 허락하고 이인에게 상사품(賞賜品)을 매우 후하게 보내주었다.
이 해 겨울에 천자가 칙서를 보내 이르기를 “조정에서 내가 보낸 사람들이 왕의 나라에 도착한다면 왕은 예로써 대접하고 물건을 선사하지 말라.
왕의 부자는 조정을 공경히 섬긴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해가 갈수록 더욱 공경이 섬긴 것을 내가 깊이 알고 있으니 좌우 근신들이 이간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또 칙서를 보내 이르기를 “왕은 진실로 탁월한 어진 왕이다” 하였다. 이보다 먼저 파저강(婆猪江) 등의 야인(野人)이 다른 부락과 연합하여 그들의 노략질을 당한 요동(遼東), 개원(開原) 등 변방의 군민(軍民)들 중에서 우리나라로 도망 온 사람이 5백여 명에 이르렀는데 모두 북경으로 보내서 야인들이 분을 품어 우리 북쪽 변방을 침범하였다.계축년(세종 15, 1433) 봄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최윤덕(崔潤德), 중추원사(中樞院事) 이순몽(李順蒙) 등에게 명하여 치게 하니, 그 괴수 이만주(李滿住) 등이 새나 짐승이 달아나듯이 도망갔으므로 그들의 소굴을 헐어버리고 돌아왔다.
갑인년(세종 16, 1434) 봄에 또 성균관에서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선비를 뽑았다. 3월 병오일에 헌릉(獻陵)을 배알하니 감로(甘露)
2가 송백(松柏)에 내리고 또 경복궁 후원 소나무에도 내렸다. 이에 백관이 하례하기를 청했으나 받지 아니하였다.
함길도 북문(北門)의 연강주군(沿江州郡)은 본래 고구려의 옛 강토인데다가 우리 조종(祖宗)이 왕업을 일으킨 땅이다. 그런데 야인의 점령지로 있다가 이때에 비로소 회령(會寧)·종성(鍾城)·온성(穩城)·경원(慶源)·경흥(慶興) 등 여러 진(鎭)을 설치하여 모두 옛 강토를 회복하였다.
을묘년(세종 17, 1435) 봄에 명나라 선종(宣宗)이 승하하시고 지금 상황제가 즉위하였으므로 표문을 받들어 위로하니 천자가 사신에게 비단을 보내왔다.
정통(正統) 무오년(세종 20, 1438) 8월에 황제가 다시 원유관복(遠遊冠服)을 하사하였다.
임술년(세종 24, 1442) 5월에 달달(達達)이 사람을 시켜 글을 가지고 북문에 이르렀으므로 변경의 장수를 시켜 마중하면서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왕이 없는 법이다. 이제 대명(大明)이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너희가 어찌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가?” 하고 끝내 거절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종께서 급히 사신을 보내 북경에 상주하니 천자가 기뻐하며 상을 내렸다.
갑자년(세종 26, 1444) 봄에 칙서를 보내 “지시한 변방의 일을 모두 잘 따르고 받들어 어기거나 게으름이 없으니 왕은 어질도다” 하고 특별히 곤룡포(袞龍袍)를 내려 은총을 표시하였다.
대마(對馬)와 일기(壹岐) 등의 섬에 사는 왜적(倭賊)들이 명나라 연해(沿海)의 땅을 침범하고 또 제주의 지경도 범하는데 변방의 장수가 다 잡지 못하여 본도(本島)로 도망친 자가 있었다. 세종께서 사람을 보내어 도주(島主)를 밝게 깨우쳐서 잡아 보내라 하니, 도주가 명을 받들고 모두 잡아 보냈으므로 북경으로 압송하여 처단을 받게 하였는데, 그 수가 대략 60여 명이었다.
천자가 매우 가상히 여기고 칙서를 보내어 이르기를 “왕은 능히 선왕께서 하늘을 공경하고 대국을 섬기던 마음을 본받아 예를 따르고 정성스러움이 날로 갈수록 더욱 두텁게 한다.
조정의 돌봄과 대우를 더욱 융숭하게 하는 것은 두 나라가 한 마음이고, 처음과 끝이 한결같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변방을 침범한 왜적을 잡아 보내니, 왕이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뜻을 알겠고, 또 변방을 지키는 데 사람을 잘 써서 횡포를 막은 공이 큰 것을 알겠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조정에서 어짊을 아름답게 여기고 중요하게 여겨 예로 대우하기를 융숭하게 하니 덕 있는 이는 사랑과 영화를 받는다는 옛말은 왕에게 해당된다” 하였다. 동량북(東良北)에 사는 오랑캐 낭포야온두(浪浦也穩豆)는 일찍이 자기 아비를 죽인 자인데, 이 해에 우리나라에 와서 조공하였다. 세종께서 생각하시기를 “대역죄를 진 사람은 천지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왕법으로 보아도 용서하지 못할 일인데, 동량북은 우리 국경에 가깝고 오랫동안 왕화(王化)를 받은 자이니 베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유사(有司)를 시켜 국경에서 찢어 죽이고 하교하여 야인들을 타이르니 야인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을축년(세종 27, 1445)에 근심과 과로로 병을 얻자 지금 전하께 명하여 정무를 참여하여 결정하게 하였다.
병인년(세종 28, 1446)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여 음운(音韻)의 온갖 변화를 다 기록할 수 있게 하니, 오랑캐와 중국의 모든 말을 다 옮겨 적어 통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되었으니 그 제작의 정미함은 고금에 뛰어났다.
무진년(세종 30, 1448)에 원손 홍위(弘暐)를 봉하여 왕세손(王世孫)으로 삼았고, 기사년(태종 31, 1449) 가을에 지금 상황제가 즉위하니 표문을 보내 하례하고 또 말을 보내어 변방의 경비를 도우니, 황제가 한림시강(翰林侍講) 예겸(倪謙)과 형과급사중(刑科給事中) 사마순(司馬恂)을 보내어 폐백을 주었다.
우리나라는 명나라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 때 구장면복(九章冕服)을 받았는데, 이는 품질(品秩)이 친왕(親王)에 준하였다. 오직 왕세자께서 아직 면복(冕服)이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부족하게 여기던 중 세종께서 칠장(七章) 면복을 청하여 마침내 받았다. 세종께서는 지극한 효도를 하여 날마다 수강궁(壽康宮)에 문안드릴 때면 기쁜 표정과 부드러운 얼굴을 하였다. 옥을 잡은 듯, 가득 찬 것을 든 듯 조심하는 몸가짐은 전대의 제왕께서 미칠 수 없던 것이었으며, 상을 당하거나 제례를 당해서는 예와 정성을 극진히 하시는 등 모두가 법도에 맞았다. 비빈(妃嬪) 이하를 은혜로 대접하여 각각 그 분수를 다하니 이간질하는 말이 없었다.
여러 아들을 마땅한 도로써 가르치니 적서(嫡庶)와 존비(尊卑)에 따른 등급이 분명하였으며 모두 학문을 좋아하고 이치에 통달하여, 평생 교만하고 게으르고 사치하는 습관은 찾을 수 없었다. 아침저녁으로 혼정신성(昏定晨省)할 때면 실에 꿴 구슬과 기러기 줄처럼 나란히 들어가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종사(螽斯)
3·인지(麟趾)
4 같은 경사가 있음을 감탄하였다.
처음 태종께서 제를 외방으로 내쳤으나 세종은 때때로 불러 보았고, 끝내 서울로 돌아오게 한 뒤 친애하여 거리낌이 없으니 여러 신하들이 굳이 간하여 옳지 않다 하였지만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두 형과 아우들을 대함에도 형제의 정을 다 하였고, 종실의 여러 친척도 자주 만나 술을 내려 즐거움을 나누었다. 유복(有服)의 친척은 모두 재능에 따라 벼슬을 내리고 촌수가 멀거나 벼슬하지 않는 자에게는 부역을 면제하거나 세금을 감면하여 긍휼히 여겼으며, 외척까지도 대우함이 또한 마땅함을 얻었다.
또 종학(宗學)을 설치하여 태조의 자손으로서 종적(宗籍)에 들어 있는 자는 모두 글을 배우게 하니 교육의 방법이 지극하였다. 여러 신하를 예로써 대우하되 능력 있는 자는 가상히 여기시고, 무능한 자는 불쌍히 여기시니 중한 형벌을 받은 자가 없었으며 환관들에게는 엄숙하게 대하여 일의 권한을 맡기지 않았다.
사대(事大)의 예는 지극한 정성에서 우러나와 명나라에 보내는 문서와 방물은 모두 몸소 살피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여러 황제께서 사랑하고 돌보아 물품을 하사한 것이 융숭하고, 가상히 여겨 포장하는 말이 전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왜국이 보배를 바치고 야인들이 예물을 가지고 와 남에서나 북에서 오는 사신이 끊이지 아니하여, 높이고 친하고 감격하여 추대함이 마음으로 복종함에서 나왔다.
사람을 쓰거나 배척하는 법을 세워서 지극히 자세하고도 잘 갖추니, 이 때문에 요행으로 벼슬을 얻는 경우가 자취를 감추고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등용하게 되었다. 수령이 하직할 때는 직접 인견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정사를 하도록 타이르니 사람마다 스스로 힘썼다.
농상에 유의하여 책을 만들어 권유하고, 몸소 밭가는 것을 살피고 거두는 것을 보니 사람들이 농사짓기를 즐겨 하였다. 손실의 폐단을 개혁하여 공법(貢法)을 정하고 토지를 여섯 등급으로 나눴으며, 농사의 작황에 따라 아홉 등급으로 나누어서 이에 따라 세금을 조정하여 삼대(三代)의 공철(貢徹)의 법을 복구하였다.
유사에게 명하여 종(鐘)과 경쇠를 만들고 율관(律管)을 불어 음을 조화시키니 아악(雅樂)이 아주 새로워졌다. 회례(會禮)에 사용하던 여악(女樂)을 처음으로 철폐하였으며, 또 조종의 공덕을 서술하여 정대업(定大業)
5, 여민락(與民樂)
6 등의 악장을 지으니 소리와 의식이 지극히 아름답게 되었다.
『唐俗樂譜』를 만들어 느리고 빠른 음조를 고르게 하여 사람마다 악보만 있으면 악사가 아니라도 모든 악곡을 각각 바르게 다를 수 있도록 하였으니 이 또한 전에 없던 일이다.
고금의 예설(禮說)을 참작하여 오례의(五禮儀)를 정하니 본성과 의식이 알맞게 갖추어졌으며, 처음으로 양로연(養老宴)의 예를 베풀어 백성 가운데 남자면 친히 참석하시고, 여자면 왕비가 친히 잔치를 베풀었으며, 주군(州郡)에 있는 노인은 해당 수령이 직접 대접하게 하였다. 백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달마다 술과 고기를 보내고, 팔순 이상의 노인에게는 작위를 내리되 차등이 있게 하니, 임금의 은혜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재변을 당할 때면 하늘을 두려워하고 구황과 휼민에 마음과 힘을 다하시는 등 모든 일에 실질적으로 힘쓰고 겉치레를 하지 않으셨다.
『七政算內外篇』을 편찬하고 각종 의상(儀象)과 규표(圭表)를 만들었으며, 흠경각(欽敬閣)과 보루각(報漏閣)을 지었다. 혼상(渾象)·성구정시의(星咎定時儀)·앙부의(仰釜儀)·한양일출입분(漢陽日出入分)은 모두 몸소 제작한 것이니 이에 천문과 역수(曆數)가 비로소 틀림이 없게 되었다.
『三綱行實』을 편찬한 것은 풍속을 격려함이며,『明皇戒鑑』을 편찬한 것은 안일함과 향락(享樂)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신 것이다.
『通鑑訓義』와 『治平要覽』을 편찬한 것은 역대의 흥망을 돌아보게 한 것이다. 『歷代兵要』를 편찬한 것은 평화로운 때에도 전쟁을 대비하는 마음을 잊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이 밖에 여러 의약서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교정하여 새 것처럼 하였다. 주자(鑄字)와 기리고(記里鼓)
7 따위도 어느 하나 유의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진설(陣說)을 지어 병법을 익히고, 전함(戰艦)을 수리하고 화통(火筩)을 더 제조하고, 성곽을 수리하고, 군사를 훈련하게 하니 무비(武備)가 더욱 엄하여졌다.
법률이 분명하고 옥사를 처리함이 공평하여 형벌이 줄어들었으며, 술을 경계하고 형벌을 내리는 것을 가엾이 여김에 모두 교서를 내려 관리를 단속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비록 백공기예(百工技藝)들도 모두 그 능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상림원관(上林園官)이 화기(花器)를 고루 갖추기를 청하자 하교(下敎)하기를 “나는 천성이 화초를 좋아하지 않으니 유사는 마땅히 실질적인 것에 힘써라. 뽕나무와 닥나무 과실수는 모두 일상생활에 긴요한 것이다. 그대들은 이제부터 이러한 것으로 일을 삼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일찍이 대신들에게 “옛날의 역사를 보니 태평한 시대에도 오히려 임금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까지 간절히 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제 비록 세상이 편안하다 하나 아직 옛날의 태평시대에는 미치지 못함에도 곧은 말하는 사람을 볼 수 없으니 어찌된 일인가?” 하고 항상 마음을 열고 간언을 구하며 신하들로 하여금 하고 싶은 말을 다하게 하였는데, 말이 비록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벌을 주는 일이 없었다. 일은 대소를 막론하고 반드시 대신들과 상의한 뒤에 처리하였기 때문에 잘못되는 일이 없었다.
경태(景泰) 원년(세종 32, 1450) 경오 봄 2월에 병이 드시니, 의원은 그 기술을 다하였고, 신에게도 두루 빌었으나 끝내 효험이 없어 17일 임진에 별궁(別宮)에서 승하하시니 춘추가 54세고, 왕위에 오른 지 33년 되었다. 신하와 백성이 크게 왕의 은택을 입어 모두 “큰 덕은 반드시 수를 누리는 법이니 길이 만년을 누릴 것이다” 하였지만 갑자기 만백성을 버리셨다. 아, 슬프다. 대소 신료(大小臣僚)들과 하인들에 이르기까지 실성통곡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금상 전하께서 유명(遺命)을 받들어 재궁(梓宮) 앞에서 즉위하시고 거상(居喪)에 예를 다 하였다.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책보를 받들어 ‘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의 호를 올리고, 묘호(廟號)를 ‘世宗’이라 하였다.
이 해 여름 6월 12일 갑신에 영릉의 서실(西室)에 합장하니 이 또한 유명이었다. 명나라에 부고가 전해지자 천자가 매우 슬퍼하고 사신을 보내어 제사를 내리고, 고명(誥命)으로 ‘莊憲’이라 시호를 내렸다. 우리 전하에게는 후한 부의를 내리고 왕위를 이어받게 하였으며 곤면구장(袞冕九章)을 내리고 왕비에게는 관복을 주었다.
우리 전하에게 주신 고명에 대략 이르기를 “고(故) 조선국왕 이모(李某)는 자애하고 은혜롭고 겸손하며 공순하고, 총명하고 특달(特達)하여 선을 즐기고 이치를 따라 조그마한 일에도 조심하였다.
하늘을 공경하며 명나라를 따르기를 꾸준히 정성스럽게 했으므로, 왕의 어질고 후덕함은 백성을 믿고 따르게 하였고, 공적은 변경에까지 드러났다. 조선이 개국한 이래로 왕과 같은 이는 드물었다. 그대 이모는 바로 왕의 세자로서 충효를 행함에 정성스럽고, 공경하고 조심하여 게으르지 아니하니 순서로나 덕으로나 왕위를 계승하기에 마땅하다. 오직 충성하고 효도하여 길이 부왕의 행실을 따를 것이다” 하였다.
대체로 우리 세종의 거룩한 덕이 사해(四海)에 빛나서 명나라 조정에 알려졌기 때문에 생전의 영예를 받으심과 사후의 애도를 받으심이 이토록 지극하였던 것이다. 아, 훌륭하시다.
왕후의 성은 심씨(沈氏)로 청송(靑松)의 이름난 집이다. 증조 휘 용(龍)은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 청화부원군(淸華府院君)에 증직되었다. 할아버지 휘 덕부(德符)는 고려 공민왕(恭愍王)을 섬겨 두 번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고, 우리 공정왕(恭靖王)에 이르러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이 되어 청성백(靑城伯)에 봉하였다. 아버지 휘 온(溫)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使)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봉하였다. 어머니 안씨(安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하였는데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천보(天保)의 딸이다.
왕후께서는 나면서부터 착하고 아름다웠으므로 태종께서 가려 뽑아 들여 빈(嬪)이 되어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하였다. 두 임금을 공경히 섬기어 두터운 은총을 받았고, 세종이 왕세자로 봉해지자 경빈(敬嬪)으로 봉해졌다가 세종이 즉위하자 봉하여 공비(恭妃)가 되었다.
선덕(宣德) 임자년(세종 14, 1432)에 예관(禮官)의 건의를 따라 공(恭)이란 미칭(美稱)을 버리고 왕비라고 고쳐 봉하였다. 왕후는 정숙한 덕이 있어 세종이 잠저에 계실 때에도 왕후가 나고 드실 때면 반드시 일어서서 깊이 경례를 표하였다.
왕후는 빈첩(嬪妾)들을 예로서 대접하고, 아래로 시녀에 이르기까지도 다 은혜를 베풀었으며, 서출(庶出)들도 모두 자기가 낳은 아들과 같이 여겨 어루만지고 사랑하였다. 임금께 수라를 올릴 때에는 반드시 몸소 나아가 살펴보며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였고, 경계를 드리는 내조는 있어도 사사로이 청하는 일은 없었다. 궁중이 바르니 덕화가 나라에 흘러 멀리 태사(太似)의 풍습을 따랐다.
정통(正統) 병인년(1446, 세종 28) 봄에 병을 얻으니 세종이 몸소 밤낮으로 돌보고 우리 전하께서는 곁에 모시어 탕약을 받들었으나 3월 24일 신묘에 승하하시니 향년이 52세였다. 시호를 ‘昭憲’이라 하고, 7월 19일 을유에 영릉의 동실에 장사지냈다.
왕후는 8남 2녀를 낳았으니 큰아들은 바로 금상 전하이고, 다음은 세조 유(瑈)이니 수양대군(首陽大君)에 봉해졌다. 다음은 용(瑢)이니 안평대군(安平大君)이고, 다음은 구(璆)이니 임영대군(臨瀛大君)이다. 다음은 여(璵)이니 광평대군(廣平大君)인데 먼저 돌아가셨다. 다음은 유(瑜)이니 금성대군(錦城大君)이고, 다음은 임(琳)이니 평원대군(平原大君)인데 또한 먼저 돌아가셨다. 다음은 염(琰)이니 영응대군(永膺大君)이다. 장녀는 성년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는데, 정소공주(貞昭公主)라고 하였다. 다음은 정의공주(貞懿公主)인데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에게 시집갔다.
신빈(愼嬪) 김씨는 여섯 아들을 낳았다. 장남은 증(璔)으로 계양군(桂陽君)이고, 다음은 공(玒)으로 의창군(義昌君)이다. 다음은 침(琛)으로 밀성군(密城君)이고, 다음은 곤(璭)으로 익현군(翼峴君)이다. 다음은 당(瑭)으로 영해군(寧海君)이고, 다음은 거(璖)로 담양군(潭陽君)인데 복중(服中)에 돌아가셨다.
혜빈양씨(惠嬪楊氏)는 세 아들을 낳았다. 장남은 어(𤥽)로 한남군(漢南君)에 봉하고 다음은 현(玹)이니 수춘군(壽春君)이고, 다음은 전(瑔)이니 영풍군(永豐君)에 봉하였다.
숙원(淑媛) 이씨는 1녀를 낳았는데, 정안옹주(貞安翁主)로 아직 어리다.
상침(尙寢) 송씨가 1녀를 낳았는데, 정현옹주(貞顯翁主)로 영천위(鈴川尉) 윤사로(尹師路)에게 시집갔고, 궁인 강씨가 1남을 낳았는데 영(瓔)으로 화의군(和義君)이다.
우리 전하의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는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으로 증직된 전(專)의 딸로 1남 1녀를 낳고 승하하셨다. 아들 홍위(弘暐)는 현재 왕세자로 있고 딸은 경혜공주(敬惠公主)로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에게 시집갔다. 사칙(司則) 양씨(楊氏)가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수양은 좌의정(左議政)으로 증직된 윤번(尹璠)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덕종(德宗)인데 도원군(桃源君)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측실(側室) 박씨가 1남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안평은 좌의정(左議政)으로 증직된 정연(鄭淵)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다. 장남 우직(友直)은 의춘군(宜春君)이고, 차남 우량(友諒)이니 덕양군(德陽君)이다.
임영(臨瀛)은 우의정(右議政)으로 증직된 최승녕(崔承寧)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주(澍)는 오산군(烏山君)이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광평은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신자수(申自守)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으니 부(溥)는 영순군(永順君)이고, 금성(錦城)은 좌의정으로 증직된 최사강(崔士康)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평원은 좌의정으로 증직된 홍이용(洪利用)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다.
영응(永膺)은 좌의정으로 증직된 정충경(鄭忠敬)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화의(和義)는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박중손(朴仲孫)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측실 김씨가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계양(桂陽)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한확(韓確)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어리고, 의창(義昌)은 부지통례문사(副知通禮門事) 김수(金修)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한남(漢南)은 호조정랑(戶曹正郞) 권격(權格)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어리고, 밀성(密城)은 인순부소윤(仁順府少尹) 민승서(閔承序)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고, 수춘(壽春)은 부지통례문사 정자제(鄭自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다.
익현(翼峴)은 예빈소윤(禮賓少尹) 조철산(趙鐵山)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영풍(永豐)은 사헌집의(司憲執義) 박팽년(朴彭年)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영해(寧海)는 좌찬성(左贊成)으로 증직된 신윤동(申允童)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정의공주(貞懿公主)가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돈녕부승(敦寧府丞) 정광조(鄭光祖)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정현옹주(貞顯翁主)가 2남을 낳았는데 다 어리며, 의춘(宜春)은 우의정 남지(南智)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신이 그윽이 생각건대 조화의 묘함은 사물에 나타나고, 성인의 마음은 정사에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 세종께서는 생지(生知)의 성인으로 중용의 법도를 세워 인륜의 지극한 경지에 이르셨고, 선왕을 잘 계승하여 제왕의 효도를 다하셨다.
천자께서 그 충성되고 어짊을 포장하여 베푸심이 많았고, 이웃나라에서는 왕의 정성과 믿음에 감복하여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서로 줄지어 찾아왔다.
신은 시종(侍從)하기 10년이었고, 정부(政府)와 육조(六曹)에 출입한 20년동안 성덕을 가까이서 모셨는데, 진실로 지극히 광대(廣大)하여 정미(精微)함을 다하였고, 매우 고명(高明)하며 중용으로 말미암았으니 실로 동방의 요순이었다.
소헌왕후(昭憲王后)는 곤후(坤厚)의 덕으로 임금의 배필이 되어 한 나라의 국모로서 모범을 보이시니 덕화가 사방에 미쳤으며, 또 다남(多男)의 경사가 있어 우리 전하를 낳으시니 성덕이 있어 대통(大統)을 이었다.
또 어관(魚貫)의 사랑을 이루시고 종우(螽羽)와 같이 자손이 많으셨다. 진실로 하늘이 내신 배합으로 주나라의 태사와 짝할 만하다.
신은 필력이 보잘것없어 성덕을 칭송하기에 부족하니 천지의 큼을 그림으로 그리고, 일월의 밝음을 칭찬하려는 것과 같다. 그러나 명을 받들고 감히 사양하지 못하여 삼가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명(銘)을 바친다. 명에 이르기를,
순임금은 요임금을 이어, 거듭 빛내고 진실로 요의 덕에 맞았네.
무왕은 문왕을 이어, 왕업을 창성하게 하였네.
덕이 성한 이는 제(帝)가 되고, 공이 높은 이는 왕이 되네.
빛나는 문채가 있어, 곧 밝은 빛을 주셨도다.
어진이에게 주고 아들에게 줌은 하늘이 진실로 명함이요,
혹 선위하고 혹 계승함은 오직 공(公)이요 사(私)가 아니네.
생각건대 우리 세종은 하늘이 내신 생지(生知)이시고,
효제(孝悌)의 성품이요 충신의 자질이시네.
학문을 좋아하시어 게으르지 아니하시니, 주공(周公)의 뜻이며, 공자의 생각이로다.
밝고 밝은 태종은 오직 미묘하고 깊으셨네.
어두운 이를 폐하고 덕 있는 이를 명하시니, 요 임금과 문왕의 마음이로다.
천자의 조정에 아뢰니 황제의 허락이 내리셨네.
부지런하다가 지치시어 이에 왕위를 물려 주셨네.
천자가 책명(冊命)을 내리어 사신이 드디어 이르렀고,
천자가 연회를 내려 주시어 주행(周行)을 보이셨도다.
도가 그 몸에 쌓이어 총명하고 슬기롭네.
밤에 일어나고 늦게 잡수시며, 정성을 쏟아 다스림을 도모하시어
받은 책임을 능히 하시니 부왕께서 기뻐하셨도다.
양궁(兩宮)을 즐겁게 받드시며 기쁜 안색이고, 화한 얼굴이었네.
용루(龍樓)에서 문안드리니 더욱 정성되고 더욱 공손하셨도다.
상사에는 슬픔을 다 하시고 제사에는 정성을 다하셨네.
하늘이 감로(甘露) 내려 그 신령함을 밝히셨네.
궁중에선 화합하여 은혜가 치우침이 없으시고,
가법이 바르며 사람이 이간할 수 없었도다.
백형이 밖에 있으니 와 보기를 자주 하게 하고
얼마 후에 서울로 불러와서 우애함이 더욱 두터우셨도다.
효도를 미루어 우애하니 이에 형제가 화락하고,
화악(華萼)이 서로 즐기는 것은 서로 빛났고,
구족(九族)에 미치기까지 은택을 베풀었도다.
진진(振振)한 자손은 선선(詵詵)한 메뚜기로다.
의방(義方)으로 가르치니 서(書)를 읽고 시를 외우네.
등급이 분명하였고, 적서(嫡庶)가 분수 따라
모든 신하를 예우하여 형벌을 가하지 아니하였도다.
지성껏 대국을 섬기니 천자가 가상히 여겨 포장하셨도다.
무엇을 주셨는가. 조환(絛環)과 보도(寶刀)로다.
또 무엇을 주셨는가. 곤룡포(袞龍袍)로다.
예로써 이웃을 사귀어 이웃나라가 친하고 화하도다.
산을 넘고 바다 건너 예물을 가지고 오니 만 리가 한 집이로다.
백성이 이미 잘 살고 번성하여 인의(仁義)로 점점 교화시켰네.
인에 그치고 효에 그치고 공경에 그치고 믿음에 그치셨도다.
중을 세우고 화(和)를 극도로 하니 인륜(人倫)이 요순이로다.
임관(任官)하는 법이 정하고 자세하매 요행을 바라는 자가 자취를 감추었도다.
어진이에게 직책을 맡기고 능한 사람을 부리니 각각 그 직책에 알맞았네.
전제(田制)를 이미 정하니 교활한 아전이 손을 움츠리고,
걸(桀)도 아니며 맥(貊)도 아니며 세금 받음이 어김없었네.
처음으로 의상(儀象)을 만드시고 다음으로 율력(律曆)을 정하시어
오례(五禮)를 손익(損益)하시니 정(情)과 문(文)이 극진하였도다.
음악의 소리와 의식을 새로이 하시어 조종의 공덕을 칭송하였네.
모임에 아악(雅樂)을 쓰고 비로소 여악(女樂)을 물리치고,
양로연(養老宴)에 친히 임하시어 매년 가을로서 정식을 삼으셨네.
서사(書史)를 편찬하여 정치의 득실을 거울삼고,
훈민정음을 제정하여 누속(陋俗)을 씻으셨도다.
공물(貢物)에 토산만을 하기로 천자의 칙서를 받았고
천자가 세자에게 칠장면복(七章冕服)을 내리니 온 나라에 빛이 났도다.
모든 시설하신 것이 자손에게 전할 만한 것 아님이 없었네.
진(鎭)을 북방에 설치하니 옛 강토 회복되었도다.
위엄과 덕이 멀리 덮으니 복종하지 않는 곳이 없었네.
군사가 북을 가리키매 적의 괴수 주둥이로 숨 쉬었네.
바로 소굴(巢窟)을 치니 저 스스로 전복되었고,
글월 한 장을 남으로 보내니 왜놈들이 항복하였네.
명나라 서울로 보내어 처단 받게 하였도다.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아니하시고,
다스려질 때에 어지러운 것을 잊지 아니하셨네.
성과 보루(堡壘)는 험한 데 의거하였고, 창과 칼을 준비하였네.
전함(戰艦)을 새로 만드니 견고함이 철석같아 화통(火筒)이 틀에서 발하면,
빠르기 벽력같아서 군자(軍資)와 기계가 전보다 훨씬 충실하였네.
호생(好生)의 마음으로 더욱 죄인을 불쌍하게 여기시니,
형벌이 공평하여 사람들이 억울함이 없었네.
백공기예(百工技藝)도 모두 법칙에 맞았네.
완호(玩好)를 좋아하지 아니하시고, 질실(質實)함을 위주하셨네.
더욱 겸손하여 바른말 구하기를 목마른 것같이 하셨으니,
높으신 덕이요 빛나는 문채로다.
이름 할 수 없는 거룩함이요, 막대한 공(功)이로다.
우나라 주나라와 더불어 짝하겠고, 한나라와 당나라에서도 듣지 못하던 것이었네.
33년간 부모 되고 임금 되시었네.
하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여
문득 신민(臣民)을 버리시니,
멀고 가까운 데에서 슬픔에 얽혀,
애모하기 어버이같이 하네.
우리 임금이 위(位)를 이으시매 지극한 효도가 천성에서 나오시니,
밝음으로 밝음을 이으시고 성인으로 성인을 이으셨도다.
장사의 상제(喪制)는 모두 유명(遺命)에 따르셨네.
천자가 조상을 하며 제(祭)를 내리고 뇌사(誄詞) 지으셨네.
절혜(節惠)로 이름을 정하여 아름다운 시호를 내리셨네.
후한 부의가 또한 이르러 은전을 베푸셨네.
왕작(王爵)을 잇게 하고 면복(冕服)을 주시었네.
내리심이 왕비에까지 미치어 구슬관과 유적(褕翟)이로다.
천자의 은혜가 실로 두텁네.
공손히 생각건대, 왕후는 하늘의 아가씨에 비하겠네.
왕가에 시집오시어 궁중의 정위(正位)에 앉으시니
태사(太姒)의 덕으로, 문왕의 짝이로세.
성주(聖主)를 낳으시니 나라 운수 더욱 성하도다.
곧 많은 아들 두어서 인지(麟趾)를 읊었도다.
실로 우리 동방에 억년의 경사였네.
아, 선왕의 거울 잃음을 탄식하시더니
다섯 돌이 못 되어 세종이 문득 돌아 가셨도다.
능을 만들어 같은 궁(宮)에 실(室)은 다르네.
우러러 일각(日角)을 생각하오니 오장이 아프고 찢어지네.
오직 이 거룩한 덕이 만대에 한결같으리.
삼가 대략을 기록하여 절하옵고 명사(銘詞)를 드리나이다.
하늘처럼 길이 가고 땅처럼 오래 가도록 한없이 빛나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