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용어명 | 차귀진성(濟州遮歸鎭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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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2228번지 일대에 일부 흔적이 남아있다. 고려 충렬왕 때에 목마장이 설치된 뒤 고려시대 말까지 원나라에서 마축(馬畜)을 관리하기 위해 아막(阿幕)을 설치하고 축성한 곳이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효종 3년(1652)에는 목사가 조정에 아뢰어 진을 설치하였으며 여수(旅帥)를 두었다. 그 후 숙종 원년(1675)에는 조방장(助防將)을 두었으며, 숙종 32년(1706)에는 송정규(宋廷奎) 목사가 조방장을 만호(萬戶)로 승격시켰으나 숙종 42년(1716)에 황구하(黃龜河)가 다시 조방장으로 환원시켰다. 차귀진성은 지형적 입지조건으로 볼 때 수산진성과 함께 평야 입지형의 특징을 갖춘 성으로 기존의 진성이 갖고 있는 해안 입지와는 다른 입지적 특성을 갖고 있다. 문헌기록에서 보이는 차귀진성은 둘레가 1,190자, 높이가 10자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문이 있었고 문 위에 망루가 있었다. 성 안에는 객사(客舍), 군기고(軍器庫) 등이 있었다. 현존 자료와 관련 도면으로 추정되는 진성의 규모는 동서가 190m, 남북이 110m, 전체 둘레가 620m 정도이다. 성의 평면은 크게 말각방형(末角方形)이다. 지금은 성곽 대부분이 훼손되어 그 윤곽을 알 수 없지만, 개인집 울타리에 하단석렬이 15m가량 남아 있다. 축조방식은 성곽이 원형대로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제주도 현무암을 거칠게 다듬어 허튼층쌓기로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숙종 28년(1702) 이형상(李衡祥) 목사의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차귀조점(遮歸操點)’에는 성안에 3동의 건물과 동서에 각 1문이 있다. 지금은 당시 건물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강창화) |
참고문헌 | 제주의 방어유적(제주도, 1996), 조선시대 제주도 관방시설의 연구-읍성, 진성과 봉수, 연대를 중심으로-(김명철,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0) |
구분 | 용어 |
사전명 |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성곽봉수편) - (성곽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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