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용어명 대구(帶鉤)
설명 대구(帶鉤)란 의복을 결속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허리띠에 부착된 갈고리 모양 부품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춘추(春秋) 시대 이래 크게 유행하며 다양한 동물을 장식하게 된다. 그와 같은 전통은 전국을 거쳐 한 대(漢代)까지 여전히 성행되었으며 중원 문화(中原文化)의 확산 과정에서 한반도와 만주 일원으로도 전해졌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전국(國戰) 시대의 양상이다. 비파형(琵琶形), 곡봉형(曲棒形)으로 불리는 대구가 중국의 중원 문화를 상징하며 일정한 분포권을 형성하는 것에 대비되는 것이 바로 교구(?具)이다. 소위 ‘북방식 청동기 문화’의 의복 구성품 가운데 둥근 고리에 머리 모양의 걸쇠를 갖추어 일체로 주조된 조형교구(鳥形?具, 중국학계의 鳥形帶?)가 그것이다. 옌산(燕山)일대, 네이멍구(內蒙古) 중남부와 오르도스(Ordos) 고원, 닝샤(寧夏) 지역에 주로 분포한다. 중국학계는 북방 청동기 문화의 지역색에 주목하여 ‘옥황묘 문화{위황먀오 문화(玉皇廟文化)}’, ‘모경구 문화{마오칭거우 문화(毛慶溝文化)}’, ‘도홍파랍 문화{타오훙바라 문화(桃紅巴拉文化)}’, ‘양랑 문화(楊郞文化)’로 구분하고 있다. 주로 창청 지대(長城地帶)에 해당한다. 한반도 중북부와 만주 지역에서는 전국 시대 연(燕)과의 교류를 통해 비파형 혹은 곡봉형으로 불리는 대구가 전해졌고, 한반도 중남부 지역으로는 호형(虎形) 및 마형(馬形) 등 동물형 대구가 전해졌는데 아직 계보나 변천양상이 뚜렷하지 않다. 원삼국 시대가 되면 낙랑을 매개로 하여 한의 곡봉형 대구 완제품이 일부 전해진다. 근래국내 고분에서 출토 사례가 급증하고 있는 동물형 대구에 대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동물형 대구는 이전의 청동기 시대 문화에서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요소이다. 동물형 대구는 마한과 진·변한에서 한동안 유행한 장식품이었고 평양 등 서북한 지역과 중국의 산시(山西) 성, 허베이(河北) 성에도 유례가 있음이 지적되면서 동물문이라는 모티브만을 강조하여 막연히 북방적 요소라 평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물론 동물문은 스키타이, 흉노, 선비 등 유목 민족이 선호한 디자인 소재였지만 매우 광범한 분포 양상을 보이며 흉노 내지는 선흉노 문화로 언급되는 오르도스 지역의 대금구는 조형교구라는 점, 그리고 전국 시대 이래 진한 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중원에서는 비파형, 곡봉형으로 불리는 대구가 유행하였음을 고려한다면 영천 어은동, 경주 사라리·조양동·덕천리에서 출토된 동물형 대구를 북방 문화의 직접 유입의 증거로 간주하기에는 주저되는 점이 많다. 오히려 산융(山戎)의 문화로 추정하는 옥황묘{휘황먀오(玉皇廟)} 문화권과 그에 후속하는 진한(秦漢)의 동북 지구 문화에서 유래, 발전한 것이 한반도로 이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대구 문화는 진·변한 지역에서는 약 3세기가량 지속되었다. 호형대구와 마형대구가 함께 출토되기도 하고 별개로 출토되기도 하는데, 3세기에는 마형대구가 주로 제작된 것 같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표면 문양이 생략되는 등 형태 변화도 보인다. 이처럼 동물형 대구가 여러 세기 동안 일정한 형식 변화를 보이며 존속한 것은 이 대구의 분포 경로상에 위치한 어느 지역에서 대구가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경로는 초기 철기 시대 이래 마한과 진·변한 사이의 교역로가운데 하나였고 이후 시기에도 중요한 기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수량으로 보면 마한 지역의 대구가 진·변한 지역에 비하여 훨씬 많다. 그런데 분포가 마한 전역에 걸치지 않고 아산만과 연결되는 황구지천·안성천·곡교천 변, 남한강과 금강 변, 금강에서 연결되는 미호천 변에 분포하며, 2~3세기가 중심 연대이다. 진수(陳壽)가 찬술한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에는 그 시절 마한 사회에서 한풍(漢風)의 인수(印綬)·의책(衣?)이 유행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마형대구가 그와 일정 부분 관련될 수 있을 것 같다. 동물형 대구 문화의 하한은 아직 분명하지 않다. 영남 지역의 자료에 한정할 경우 신라가 서진에 견사(遣使)하는 기원후 280년대 이후에는 새로운 대금구가 유행하였을 것으로 보인 다. 즉, 신라권인 경산과 영주 출토로 전하는 진식 대금구(晉式帶金具)가 알려져 있고 당시 진식 대금구는 삼연,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로까지 파급되어 동북아시아 전역에서 크게 유행한 물품이었기 때문이다. 동물형 대구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인 영천 어은동과 천안 청당동 유적 출토품에 대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918년 산사태로 토사가 붕괴되면서 중국 한나라 일광경(日光鏡), 방제경(倣製鏡), 대구, 장식 단추, 사슴 머리 장식, 작은 말 조각품 등의 많은 청동기가 일괄로 발견되었다. 철기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청동기에 부착된 철의 녹으로 보면 상당수가 있었던 것 같다. 이 중 교구, 사슴머리, 작은 말 조각품, 장식 단추 문양 등은 북방 청동기와 친밀성을 보인다. 이 유적의 연대는 공반된 중국 거울로 보아 기원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호랑이나 말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교구 가운데 가장 정교하고 완성도가 높은 것이 바로 어은동 출토품이다. 호랑이의 경우, 잔뜩 웅크리고 입을 벌린 채 전방을 주시하고 있으며 꼬리는 부분적으로 파손되었지만 등 쪽에 휘감아 붙였다. 눈과 얼굴, 목과 허리에 문양 띠를 배치하였고 가슴에서 뻗어 나온 걸쇠는 길쭉하며 중간에 문양 띠와 볍씨 모양을 돌출되게 장식했다. 말은 꼿꼿하게 서 있는 자세인데 머리에는 고삐를 걸기 위한 면계(面繫)를 표현했고 목과 허리에 문양 띠를 장식했다. 걸쇠는 호랑이 모양 띠고리와 비슷하고, 그곳에 장식된 볍씨 모양 돌출부가 장니(障泥) 쪽에도 2개 표현되어 있다. 어은동의 띠고리를 이어받아 기원후 2~3세기경 목곽묘에서는 형식화가 진행된 마형대구가 출토된다. 마한권에 속하는 청당동 유적 출토품이 대표적이다. 청당동 유적은 야트막한 구릉에 분포되어 있으며 목곽묘의 둘레에 배수 시설로 보이는 도랑이 함께 만들어져 있다. 이 무덤에서는 타날문원저단경호(打捺文圓底短頸壺)와 심발형토기(深鉢形土器)가 세트를 이루고 있고, 장신구로는 금박 중층옥, 마형대구, 곡봉형대구도 출토되었다. 청당동에서 출토된 마 형대구에는 대부분 평행선무늬와 격자무늬가 베풀어져 있으며, 말은 어은동에 비하여 사실감이 약해졌고 걸쇠도 짧아졌다. 목 위쪽에는 갈기가 높게 표현되었고 장니에는 사격자무늬를 베풀었다. 청당동 5호묘에서는 10점의 마형대구가 열을 이루면서 출토되었다.(이한상)
참고문헌 허리띠 분배에 반영된 고대 동북아시아의 교류양상(이한상, 동북아역사논총 33, 동북아역사재단 2011), 한반도 마형대구의 편년과 지역상(김성욱,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 원삼국기 동물형대구의 전개와 의미(박장호, 영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 중서부지역출토 마형대구의 검토(현남주·권윤영, 선사와 고대 35, 한국고대학회, 2011)
구분 용어
사전명 한국고고학 전문사전(고분유물편)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가) 개방한 대구(帶鉤)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 4유형 "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수 있습니다.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