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릉
- 왕릉명
- 영릉
- 능주명
- 제4대 세종·소헌왕후
- 왕릉위치
-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50
- 조성연대
- 1446년 왕후릉, 1450년 왕릉, 1469년 천릉
- 왕릉형태
- 합장릉
능의 조성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1469년(예종 1)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능주 소개
세종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4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휘는 ‘도(裪)’, 자는 ‘원정(元正)’이다. 1408년(태종 8) 2월 11일 충녕군에 봉해지고, 5년 뒤인 1412년(태종 12) 5월 3일 충녕대군에 진봉되었다. 1418년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됨에 따라 그 해 6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 10일 태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의 4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소헌왕후와 5명의 빈들에게서 18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두었다. 맏아들이 문종이며, 둘째가 세조이다. 세종 연간은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인재가 배양되었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다. 『고려사(高麗史)』, 『속육전(續六典)』, 『농사직설(農事直說)』,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등의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들이 이루어졌다. 또한 훈민정음의 창제,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貢法)의 제정 등 많은 사업을 통하여 조선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세종은 1450년 2월 17일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 사저의 동쪽 별궁에서 승하하였다. 시호[諡]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묘호(廟號)는 ‘세종(世宗)’, 능호는 ‘영릉(英陵)’이다. 소헌왕후(昭憲王后)는 청천부원군 심온(沈溫)의 딸로 1395년(태조 4)에 태어났다. 1408년(태종 8)에 당시 충녕군과 가례를 올리고, 경숙옹주에 봉해졌다. 1417년(태종 17)에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졌으며, 충녕대군이 1418년(태종 18) 세자에 책봉되자 이와 함께 경빈에 진봉되었다가 세종의 즉위와 함께 공비가 되었다. 그러나 중전에게 이러한 이름을 붙이는 예가 없다하여, 1432년(세종 14)에 왕비로 승봉되었다. 아버지 심온이 역적으로 몰려 한때 소헌왕후도 폐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으나, 세종을 내조한 공이 컸으므로 무사하였다. 슬하에 8남 2녀를 두었다.
왕릉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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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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