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묘
- 왕릉명
- 광해군묘
- 능주명
- 제15대 광해군·문성군부인 유씨
- 왕릉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 조성연대
- 1623년 문성군부인 유씨묘, 1641년 광해군묘
- 왕릉형태
- 쌍분
능의 조성
광해군묘는 부인 유씨가 1623년(인조 1) 윤10월 7일 강화도에서 먼저 사망하여, 윤10월 29일 양주 적석동에 왕자군 부인의 예로 예장하였다. 이로부터 18년 후인 1641년(인조 19) 7월 1일 광해군이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제주도에서 죽자, 관을 양주의 장지로 운구해와 10월 4일에 3일장으로 장사지낸 후 조성되었다. 이후 광해군묘는 지속적으로 관리 되었는데, 숙종연간과 영조연간에 관리를 보내 묘에 제사지내고 개수하였고, 1904년(고종 41) 연산군묘와 함께 무너진 곳을 개수하였다.
능주 소개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은 조선 제15대 왕이다. 조선 제14대 왕 선조(宣祖)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공빈 김씨(恭嬪金氏)이다. 비(妃)는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하는 등 적극적인 분조활동을 전개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는 전라·경상도로 내려가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량과 병기 조달은 물론 백성들의 안위를 돌보았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가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광해군이 대북파의 지지를 받아 1608년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갈등을 빚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1613년 대북파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서인(庶人)으로 삼았고, 영창대군은 강화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 살해당하였다. 1618년에는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러한 정치 행위는 서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서인 주도의 반정(反正)에 의해 폐위당하였다. 광해군은 폐위되기 전까지 1608년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1611년 양전(量田)을 실시하였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성부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창덕궁을 중건하는 등 궁궐 조성에 힘썼다. 중국의 명과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솜씨를 보였으며 일본과는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여 임진왜란 이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하였다. 인조반정으로 1623년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옮겨졌다. 광해군의 가족은 강화도로 유폐되었다. 광해군은 이후 제주도로 다시 이배되었다가 1641년에 사망하였다. 묘호는 광해군지묘(光海君之墓)로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다. 문성군부인 유씨(文城郡夫人柳氏, 1576~1623)는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의 비이다. 부친은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유자신(柳自新)이다. 1587년(선조 20) 선조의 둘째 아들인 광해군과 혼인하여 정1품 군부인에 봉해졌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세자빈에 봉해졌다가 1608년 광해군이 조선 제15대 왕으로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됨에 따라 폐비가 되었으며 광해군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역시 유배 생활을 하던 아들 폐세자와 폐세자빈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친정 오빠들도 참형을 당하였다. 1623년 10월 연이은 참사에 괴로워하다가 병을 얻어 48세에 사망하여, 양주(楊州) 적성동(赤城洞)에 매장되었다.
왕릉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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