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릉
- 왕릉명
- 경릉
- 능주명
- 제24대 헌종·원비 효형성황후·계비 효정성황후
- 왕릉위치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 조성연대
- 1843년 효현왕후릉, 1849년 헌종릉, 1904년 효정왕후릉
- 왕릉형태
- 삼연릉
능의 조성
경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헌종, 원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릉으로 구성된 삼연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각 능의 앞에는 각기 별도의 석상을 두었고 장명등은 한 기를 공유하고 있으며 난간석은 고색석주를 놓아 하나로 연결하였다. 1843년 효현왕후릉을 조성할 때 목릉의 옛 터를 산릉지로 결정하고 능을 조성하였는데 석상과 문무석인, 석수, 장명등, 망주석 등 능침 상설 대부분이 이 때 제작되었다. 1849년 헌종이 승하하자 경릉으로 장지를 확정하고 능을 조성하였는데 석물로는 석상을 새롭게 제작하였다. 1904년 효정왕후릉을 경릉의 좌변으로 선정하였다. 즉 정면에서 보면 가장 왼쪽 봉분이 헌종의 능이고, 가운데가 효현왕후, 오른쪽이 효정왕후의 능이다. 세 능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을 터서 연결했으며, 각 능 앞에는 석상만 따로 마련했을 뿐 모든 제도는 단릉과 같이 조성했다. 능 앞에 3단을 2단으로 줄여 장명등과 문무석인이 한 단에 마련되어 있으며, 문무석인은 18세기 이후의 양식인 눈꺼풀, 눈동자, 입술선 등이 입체적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능주 소개
헌종은 조선 제24대 국왕이다. 본관은 전주, 이름은 '환(烉)', 본관은 전주, 자는 문응(文應), 호는 원헌(元軒)이다. 순조의 손자이자 문조(익종: 효명세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 신정왕후이다. 비는 영흥부원군 김조근의 딸 효현왕후이다. 계비는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딸 명헌왕후이다. 1830년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1834년 순조가 죽자 이 해 8세의 어린 나이로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하였다.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37년 3월 새로 등장한 외척 풍양조씨 세력이 우세해, 순조때부터 정권을 전횡해온 안동김씨 세력을 물리치고 한동안 세도를 잡았다. 그러나 풍양조씨 내부의 알력과 1846년 조만영의 죽음을 계기로 정권은 다시 안동김씨 수중으로 넘어갔다.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어 1841년 비로소 친정의 길이 열렸으나 세도정치의 여파인 과거제도 및 국가 재정의 기본이 되는 삼정의 문란 등으로 국정이 혼란해졌다. 재위 15년 중 9년에 걸쳐 수재가 발생하여 민생고가 가시지 않았다. 1836년에는 남응중, 1844년에는 이원덕, 민진용 등의 모반사건이 일어나고, 1848년부터는 많은 이양선이 출몰해 행패가 심해 민심이 어수선하였다. 한편 순조 때의 천주교 탄압정책을 이어받아 1839년에 주교 앵베르(Imbert, L.J.M), 신부 모방(Maubant P.P.)과 샤스탕(Chastan, J.H)을 비롯하여 많은 신자를 죽였다(기해박해). 이어 천주교인을 적발하기 위하여 오가작통법을 실시하고, 1846년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을 처형하였다. 재위 기간에 『열성지장』, 『동국사략』, 『문원보불』, 『동국문헌비고』, 『삼조보감』 등을 찬수하게 하였고 인장과 전각, 고서화를 각별히 애호했으며 화가 소치 허련과 교유한 일화는 유명하다. 1849년 창덕궁 중희당에서 23세로 후사 없이 승하하였다. 시호는 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 묘호는 헌종이다. 능호는 경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효현왕후는 조선 제24대 왕 헌종의 비이다. 본관은 안동이며, 영돈녕부사 영흥부원군 김조근의 딸이다. 1837년 왕비에 책봉되고, 4년 뒤에 가례를 올렸다. 왕후가 된지 2년 후 병으로 승하하였다. 효정왕후는 조선 제24대 헌종의 계비이다. 판돈녕부사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딸이다. 1844년 왕비가 되었고, 1849년 철종이 즉위하자 대비가 되었으며, 1857년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가 승하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딸이 있었지만 일찍 세상을 떠났다. 능은 경기도 양주에 있는 경릉이다.
왕릉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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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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