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릉
- 왕릉명
- 인릉
- 능주명
- 제23대 순조·순원숙황후
- 왕릉위치
-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길 34
- 조성연대
- 1835년 왕릉, 1856년 천릉, 1857년 왕후릉
- 왕릉형태
- 합장릉
능의 조성
인릉은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으로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처음에는 파주 인조 장릉 경내에 조성되었으나 1857년 현재의 자리에 합장으로 천릉되었다. 1834년 순조가 승하하자 능호를 인릉으로 정하고 구 장릉이 있는 곳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 후 1855년 인릉의 풍수가 좋지 못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이듬해 헌릉이 있는 곳으로 천릉하였다. 이때 근처에 있던 구 영릉, 구 희릉의 석물을 재사용하였다. 구 영릉의 혼유석을 갈아서 사용하였고 장명등의 체석은 구 영릉의 것을, 개석은 구 희릉의 것을 사용하였다. 또 호석 2쌍은 모두 구 영릉의 것을 사용하였으며 양석은 구 영릉의 것 1개와 구 희릉의 것 1쌍을 재사용하고 새로 1개를 준비하였다. 망주석의 경우 기둥을 받치는 지대석 2좌는 구 희릉의 것을 사용하고 석주는 구 인릉의 것을 재활용하였다. 석인은 문무석인 각 1쌍은 구 영릉에서 노출된 것을 조탁하여 사용하였고 마석은 구 희릉의 것 1개를 사용하였다. 1857년 순원왕후가 승하하자 능호를 문릉으로 정하였다. 이후 인릉과 합부하기로 결정하였다. 현재 인릉에는 1857년에 세워진 합봉비 표석과 1900년 고종에 의해 세워진 추숭비가 세워져 있는데 합봉비는 1835년 건립된 구 인릉 표석을 재활용한 것이다.
능주 소개
순조(純祖, 1790~1834)는 조선 제23대 왕이다. 본관은 전주, 이름은 공(玜), 자는 공보(公寶), 호는 순재(純齋)이다. 정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이다. 1800년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이 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7월 11세의 어린 나이로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했다. 대왕대비 정순왕후(영조 계비 경주 김씨)가 수렴청정하였다. 1802년 10월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1801년 대왕대비는 궁방과 관아에 예속되어 있던 공노비를 혁파하고 서얼 유통(庶孼流通)을 시행하였다. 한편 정조 때부터 집권해온 시파(時派)에게 보복하기 위해, 사교 금압을 명분으로 2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한 신유박해와 을해박해를 일으키면서 시파를 모두 숙청하였다. 순조의 친정 뒤에는, 정조의 유탁을 받고 정치에 관여하게 된 국구 김조순의 일문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이 확립되었다. 이로써 인사제도의 기본인 과거제도가 문란해지는 등 정치기강이 무너졌다.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각종 비기와 참설이 유행하는 등 사회혼란이 일어났다. 이를 틈타 1811년 평안도 용강 사람인 홍경래(洪景來)와 그 무리가 반란을 일으켜 평안도 일대를 점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또 이 해 한성에 도적과 거지떼가 들끓었고, 1813년 제주도, 용인 등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급기야 1821년에는 서부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10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순조 재위 34년 중 19년에 걸쳐 수재가 일어나는 등 크고 작은 천재지변이 잇달아 발생했다. 한편 순조는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사부수권(四部手圈)』·『대학유의(大學類義)』·『정조어정홍재전서(正祖御定弘齋全書)』·『서운관지(書雲觀志)』·『동문휘고(同文彙考)』 등을 간행하게 했다. 그리고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는 등의 치적이 있었다. 풍은부원군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 풍양 조씨 일문을 중용했다. 1827년에는 세자에게 대리청정하게 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를 견제하려 했으나, 1830년 세자가 일찍 죽음으로써 실패했다. 1834년 11월 45세로 승하했다. 시호는 ‘연덕 현도 경인 순희 문안 무정 헌경 성효 대왕(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英憲敬成孝大王)’이다. 묘호는 ‘순조(純祖)’이고 능호는 ‘인릉(仁陵)’이다.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는 조선 제23대 왕인 순조의 비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의 딸이다. 1800년 초간택·재간택을 거쳐 정조의 뜻이 결정되었으나 정조가 갑자기 죽어 삼간택이 연기되었다가 1802년 10월 왕비로 책봉되었다. 삼간택 문제를 놓고 시파(時派)·벽파(僻派)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으며, 당시 대왕대비로 수렴청정한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오빠 김관주(金觀柱)와 권유(權裕)등의 방해 움직임이 있었다. 1809년 문조를 낳았다. 문조는 1812년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1830년 22세로 죽었다. 아들 헌종이 즉위하고 1834년 익종에 추존되었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원왕후는 원상에 권돈인(權敦仁)을 지명했다. 그리고 영조의 혈맥을 잇기 위해 전계대원군 이광의 셋째 아들을 지목해 철종으로 왕통을 잇게 하고 수렴청정하였다. 1851년 자신의 외가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철종의 왕비로 책봉해, 그 뒤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절정기를 이룩하였다. 1858년 창덕궁에서 승하하였다. 자헌(慈獻)·현륜(顯倫)·홍화(洪化)·신운(神運) 등의 존호가 뒤에 추상되었다. 『순원왕후어필봉서(純元王后御筆封書)』가 전한다. 명온(明溫)·복온(福溫)·덕온(德溫)의 세 공주가 있다. 시호는 ‘명경 문인 광성 융희 정렬 선휘 영덕 자헌 현륜 홍화 신운 순원 왕후(明敬文仁光聖隆禧正烈宣徽英德慈獻顯倫洪化神運粹穆睿成弘定純元王后)’이다. 능호는 ‘인릉(仁陵)’으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산13-1에 합장릉으로 조성되었다.
왕릉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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