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
- 왕릉명
- 정릉
- 능주명
- 제1대 태조 계비 신덕고황후
- 왕릉위치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로 12길 103
- 조성연대
- 1397년 최초 조성, 1406년 경역 축소, 1409년 천릉, 1669년 봉릉
- 왕릉형태
- 단릉
능의 조성
1397년에 처음으로 조성된 정릉의 위치는 현재 정동 영국대사관이 있는 자리였다. 태조는 정릉을 조성한 다음 그 동쪽에 170여 칸이나 되는 흥천사를 원찰로 세웠는데, 내관인 김사행(金師行)은 태조에게 잘 보이기 위해 건물을 매우 화려하게 지었다. 태조는 정릉을 수호하기 위해 공신이 왕릉을 수호하는 제도를 만들고 개국공신 이서(李舒)에게 정릉을 수호하게 하였다. 그러나 정릉은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의 다섯 번째 소생인 태종이 즉위하면서 매우 천대를 받았다. 태종은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허락하여 세도가들이 정릉 숲의 나무를 베어 저택을 짓고,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그 밖의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데 사용하였다. 또 정릉의 봉분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석인은 땅을 파서 묻도록 하였다. 결국 정릉은 본래의 자리에서 지금의 성북구로 옮겨졌다. 오랫동안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탓에 정릉은 조선 초대 국모의 능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상설의 규모가 작고 소박하다. 현재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치는 두 개의 고석만 옛 능에서 옮겨온 것이고, 나머지는 현종 10년(1669) 송시열의 상소에 의해 정릉이 회복되면서 복원된 것이다. 따라서 15세기와 17세기 석물 양식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능주 소개
신덕왕후(神德王后, ?~1396) 강씨는 판삼사사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강윤성, 강윤충, 강윤희 형제는 고려 말의 권력자로 세도를 떨쳤고, 강윤희의 아들 강우(康禑)는 태조의 백부인 이자흥(李子興)의 사위가 되어 두 집안이 혼인으로 연결되었다. 신덕왕후의 친정은 태조가 권력을 장악하고 조선을 개국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태조는 신의왕후 한씨와 결혼한 상태에서 신덕왕후 강씨를 둘째부인으로 맞았는데, 한씨가 고향에 있는 향처라면 강씨는 서울에 있는 경처에 해당했다. 신덕왕후는 태조와 결혼한 이후 포천의 철현에서 따로 살림을 차렸는데, 위화도회군이 일어나자 강씨와 함께 동북면으로 피란했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직후인 1392년(태조 1) 8월에 강씨를 현비(顯妃)에 책봉했고, 1393년 현비의 본향인 곡주를 곡산부로 승격시켰다. 1396년 8월에 현비의 병이 악화되자 거처를 판내시부사 이득분(李得芬)의 집으로 옮기게 했는데, 8월 13일에 이득분의 집에서 사망했다. 현비가 사망하자 태조는 통곡을 하고 조회를 10일간이나 정지시켰다. 1396년(태조 5) 9월에 현비의 존호를 ‘신덕왕후’로 하고 능호를 정릉(貞陵)이라 정했으며, 1397년 1월에 한성부 취현방의 북쪽 언덕에 국장을 지냈다. 1410년(태종 10)에 태종은 태조를 종묘에 부묘하면서 신의왕후는 함께 모셨지만 신덕왕후는 부묘하지 않았다. 신덕왕후는 숙종대에 가서야 복권되었는데, 1669년(현종 10) 10월에 숙종은 송시열의 건의를 따라 신덕왕후에게 ‘순원 현경 신덕 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란 시호를 올리고 종묘에 부묘했다. 태조와 신덕왕후 사이에는 이방번(李芳蕃), 이방석(李芳碩), 경순공주(慶順公主)가 있다.
왕릉탐방
정릉(貞陵) 구조보기
왕릉살펴보기는 PC화면에서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 미술문화유산연구실
- 담당자 : 박지영
- 문의 : 042-860-9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