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릉
- 왕릉명
- 익릉
- 능주명
- 제19대 숙종 원비 인경왕후
- 왕릉위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475-92번지
- 조성연대
- 1681년
- 왕릉형태
- 단릉
능의 조성
익릉은 숙종의 명릉이 위치한 곳에서 멀지 않은 서오릉 권역에 단릉으로 조성되었다. 익릉은 서오릉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향어로는 익릉의 높은 지대를 활용한 듯 계단 형태로 조성되었다. 익릉은 17세기 후반 왕릉 조영의 영향을 계승했고 정자각과 석물 조영에 있어서도 전통을 고수한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정자각은 보통 정전 3칸, 배위청 2칸으로 구성된 5칸 정자각이 가장 많이 세워졌으나 익릉은 그 규모가 8칸으로 확장되었다. 익릉의 석물제도는 건원릉을 따랐고 봉분에는 병풍석은 설치하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고 봉분 주위로 곡장과 석양, 석호 8마리를 배열하였다. 또한 공간도 내계와 외계로만 구분하여 내계에는 문석인과 석마 2쌍을, 외계에는 무석인과 석마 2쌍을 배치하였다.
능주 소개
인경왕후(仁敬王后, 1661~1680)는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원비이다. 본관은 광산이며, 예학의 대가 김장생(金長生)의 4대손인 광성부원군 김만기(金萬基)의 딸이다. 1670년(현종 11) 10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어의동 별궁에 들어갔으며 다음해 3월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674년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고, 1676년 정식으로 왕비의 책명을 받았다. 1680년 10월에 천연두의 증세가 보였는데, 이 때 숙종도 천연두를 겪지 않아서 약방도제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건의에 의하여 왕은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발병 8일 만에 1680년 10월 26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였다. 소생으로 두 공주가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인경왕후가 승하한 시기는 치열한 당쟁이 벌어진 숙종 초반기로써, 왕후의 죽음은 지문(誌文)을 짓는 과정에서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서인 송시열(宋時烈)과 남인 권유(權愈)가 각기 왕후의 지문을 지어 올렸다. 1680년 11월 2일 빈청에서 시호를 ‘광렬 효장 명현 선목 혜성 인경 왕후(光烈孝莊明顯宣穆惠聖仁敬王后)’로 올렸으니, ‘인경(仁敬)’은 대개 시법(諡法)에 ‘인덕을 베풀고 정의를 행하였으며 자나 깨나 조심하고 가다듬는다’는 뜻이다. 능호는 익릉(翼陵), 전호는 영소(永昭)라 하였다. 1713년(숙종 39) ‘광렬(光烈)’로 존호를 올렸고, 1722년(경종 2) 휘호 ‘효장명현(孝莊明顯)’을, 1753년(영조 29) 존호 ‘선목(宣穆)’을, 1776년 존호 ‘혜성(惠聖)’을 각각 올렸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 서오릉 내에 단릉으로 조성되었다.
왕릉탐방
익릉(翼陵) 구조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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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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