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릉
- 왕릉명
- 휘릉
- 능주명
- 제16대 인조 계비 장렬왕후
- 왕릉위치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 조성연대
- 1688년
- 왕릉형태
- 단릉
능의 조성
휘릉은 봉분이 한 기인 단릉으로 조성되었다. 장렬왕후가 승하하자 산릉도감 관원들이 차출되었고 휘릉의 실질적인 공사는 12월 16일에 끝나게 된다. 석물 체제는 건원릉을 기준으로 삼아 진행하기로 했다. 또한 정자각의 칸 수는 기존 사례가 일정치 않아 의견을 조정한 끝에 6칸으로 건립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으나 실제로는 정면 5칸으로 건립되었다. 휘릉은 건원릉의 상설제도를 따랐기 때문에 석물 규모가 소박하고 능침은 상계, 중계, 하계의 구분이 뚜렷하다. 상설제도는 조선초기의 것을 따랐으나 17세기 후반에 조영된 만큼 제작 양식은 당대의 흐름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능상의 규모가 비좁아 곡장과 봉분, 각종 석물들의 간격이 좁고 곡장 앞에 배설된 석양, 석호는 볼록한 지형에 놓인 것이 특징이다. 봉분은 위로 약간 비스듬하게 조성되었으며, 왕후 능의 예에 따라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다. 석양과 석호는 뿔, 얼굴, 다리, 꼬리 등 부분적으로 현실감을 살려 조각하고자 한 흔적이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과장이 심하고 석양의 경우 짧은 다리와 불룩한 배로 인해 둔중한 느낌을 준다. 반면, 망주석과 장명등은 어느 정도 현실감 있는 비례를 갖추었고 세부 문양 역시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망주석의 상대석과 하대석의 안상(眼象)에는 연꽃과 모란문양으로 정착되었고, ‘세호’라고 불리는 귀[耳] 역시 상상의 모습이긴 하나 구체적인 동물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장명등은 조선 초기 건원릉 이후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던 8각 장명등이 휘릉을 마지막으로 이후 변화된 양상을 보였다.
능주 소개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1688)는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계비이다. 본관은 양주이다. 아버지는 한원부원군 조창원(趙昌遠)이며, 어머니는 전주 최씨로 대사간 최철견(崔鐵堅)의 딸인 완산부부인이다. 인조와 같은 날인 11월 7일에 태어났다. 인조의 원비 인렬왕후가 산후병으로 세상을 뜨자 1638년(인조 16) 15세의 어린 나이에 왕비로 책봉되어 효종의 잠저인 의동본궁에서 가례를 올렸다. 이때 인조는 44세였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대비가 되었다. 1651년(효종 2) ‘자의(慈懿)’라는 존호를 받아 자의대비로 불렸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대왕대비에 올랐으며 그로부터 5년 후 손자인 현종마저 세상을 떠났다. 장렬왕후는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하였고 50년간 인조, 효종, 현종, 숙종에 이르기까지 무려 4명의 국왕을 모시고 3명의 국왕을 떠나보낸 경험을 하였다. 또한 스스로 나서서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적은 없으나 효종과 효종비 인선왕후의 국상 때 대비가 입어야 할 복상 문제가 불거지면서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1·2차 ‘예송논쟁’의 중심에 서야 했다. 숙종이 친히 쓴 「대왕대비행록기」에 의하면 왕후는 나라에 기근이 들면 평소 비축해두었던 자산을 털어 구휼에 힘쓰라고 보탰다고 하며, 어려운 백성을 생각하여 사치스런 생활을 배제하고 행실을 만사 조심하여 왕실 어른으로서 모범을 보였다고 한다. 1688년 8월 26일 65세를 일기로 창경궁 내반원에서 세상을 떴다. 장렬왕후의 장례 과정을 기록한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1688)는 어람용으로 외규장각 의궤에 유일하게 전해오고 있으며, 이 책에 수록된 반차도는 섬세한 색채와 자연스런 필치가 돋보여 조선시대 반차도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힌다. 1688년 9월 초3일 ‘자의 공신 휘헌 강인 정숙 온혜 장렬 왕후(慈懿恭愼徽獻康仁貞肅溫惠莊烈王后)’로 시호를 정하였다. 전호는 ‘효사전(孝思殿)’이고 능호는 ‘휘릉(徽陵)’이다.
왕릉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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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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