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릉
- 왕릉명
- 장릉
- 능주명
- 추존왕 원종·인헌왕후
- 왕릉위치
- 경기도 김포시 장릉로 79
- 조성연대
- 1620년 흥경원(興慶園), 1626년 육경원(毓慶園), 1627년 흥경원 천장, 1632년 봉릉
- 왕릉형태
- 쌍릉
능의 조성
장릉은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으로 쌍릉 형식으로 조성된 능이다. 1619년 원종이 먼저 승하한 후 양주 곡촌리에 안장되었고 1626년에 승하한 인헌왕후는 지금 김포 장릉이 있는 부근에 안장되었는데, 아들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후 사친에 대한 묘호를 정하라 명하였고 1626년 8월 왕자·대군묘에 내려지는 원호를 붙여 각각 흥경원(興慶園)과 육경원(毓慶園)이라고 하였다. 그 후 흥경원이 육경원이 있는 자리로 천장된 후에는 ‘흥경원’으로 합쳐 불렀다. 1632년 3월 11일 시호를 올려 추숭하고 흥경원을 ‘장릉(章陵)’이라고 고쳤다. 원에서 능으로 승격되자 원제를 능제로 바꾸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으며 도감을 설치하여 석물만 새로 제작하여 배설하였다. 이렇듯 장릉은 능제 형식으로 바뀌면서 문무석인 각 1쌍, 석마·석양·석호 각 2쌍, 장명등 1좌, 석상 1쌍, 망주석 1쌍의 석물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장릉은 방화와 원인 모를 실화로 인해 능상이 타버린 변고가 종종 일어났다. 특히 1755년 왕후릉 능상에 불이 나 영조가 3일 동안 정전을 피하기도 했다. 장릉은 재실과, 연지, 능침, 정자각, 비각이 잘 보존되어 있지만 어정과 수라간은 터만 남아 있다.
능주 소개
원종(元宗, 1580~1619)은 조선 중기의 추존왕으로, 이름은 ‘부(琈)’, 본관은 전주이다. 선조의 다섯 째 아들로 1580년 6월 22일 경복궁 별전에서 탄생하였다. 어머니는 인빈 김씨이다. 1587년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졌고 1604년 임진왜란 중 왕을 호종하였던 공으로 호성공신 2등에 봉해졌다.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인조, 능원대군(綾原大君), 능창대군(綾昌大君) 3형제를 낳았다. 천성이 우애가 있어 특별히 선조의 총애를 받아 선물을 내려준 것이 왕자에 비할 수 없이 많았는데, 광해군이 능창대군을 무고죄로 죽인 후 마음고생이 심해 병을 얻었다고 한다. 1619년 12월 29일 호현방에서 41세 나이로 승하하였다. 1620년 2월 경기도 양주 곡촌리에 묻혔다가 1627년 김포군 후강 자좌오향(子坐午向) 언덕의 인헌왕후 묘 옆으로 천장되었다. 개장을 준비 중이던 1626년 묘호를 ‘흥경원(興慶園)’이라 지었으나 추숭된 후에는 격식에 맞게 ‘장릉(章陵)’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인조 즉위 후 대원군에 추존되었고 1627년(인조 5) 왕으로 추숭되었다. 존호를 ‘원종 경덕 인헌 정목 장효 대왕(元宗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이라 하였고 능호를 ‘장릉’ 이라 하였다. 주청사 홍보(洪寶) 등을 보내어 책명을 추청하니, 1633년 명나라에서 ‘공량(恭良)’이란 시호를 내렸다. 인헌왕후(仁獻王后, 1578~1626)는 추존왕 원종의 비이다. 1578년 4월 17일에 탄생하여 1590년 정원군과 가례를 올렸다. 처음에는 연주군부인에 봉해졌으나 인조 즉위 후 부부인에 봉해졌다. 궁호는 ‘계운(啓運)’이다. 1626년 1월 14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49세로 승하하였다. 같은 해 5월 김포현 탄현면 갈현리 지역 성산에 안장되었으며 묘호를 ‘육경원(毓慶園)’이라 하였다. 이듬해 1627년 8월 27일 원종 능묘가 오른쪽 자리로 이장된 후 1632년 이조판서 이귀(李貴)의 주청으로 부군인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인헌왕후로 추봉되었다. 존호는 ‘경의 정정 인헌 왕후(敬毅貞靖仁獻王后)’이다.
왕릉탐방
장릉(章陵) 구조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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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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