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릉
- 왕릉명
- 목릉
- 능주명
- 제14대 선조·원비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
- 왕릉위치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 조성연대
- 1600년 의인왕후릉, 1608년 왕릉, 1630년 왕릉 천릉, 1632년 인목왕후릉
- 왕릉형태
- 동원이강릉
능의 조성
목릉은 선조와 의인왕후, 인목왕후 3기의 능으로 구성되었는데 외형적으로는 단릉 형식을 띠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하나의 정자각에 3기의 능침이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조성 순서는 의인왕후 능 → 선조능 → 인목왕후 능 순이다. 현재 목릉 능역은 원래 1600년(선조 33)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자 처음 장지로 삼고 장사를 지낸 곳으로 유릉이라 하였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한 후 능호를 목릉(처음에는 숙릉)이라고 정하고 지금의 건원릉 서편 언덕에 장사지내었다. 그러나 1630년 원주목사 심명세(沈命世)가 선조의 능이 물기가 차고 자리가 좋지 않다고 상소한 후 그 해 현 위치로 천릉되었다. 그 후 1632년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세상을 떠나 계비의 능을 왕릉 동편 언덕에 조성하여 오늘날의 세 능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의인왕후·선조·인목왕후 능은 조성 당시에 유릉(裕陵), 목릉, 혜릉(惠陵)으로 각각 다르게 불렀으나, 혜릉이 조성된 후 1632년 모두 ‘목릉’으로 통일되었다. 목릉 능역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정자각이 가장 왼쪽의 선조릉 앞에 지어져 한쪽으로 쏠려 있다는 점이다. 『인조실록』에 의하면 본래 인목왕후 능을 조성하면서 삼릉의 중간 장소에 정자각을 설치하려 했으나, 동일한 산 안에 정자각을 따로 건립할 수 없으며, 대왕릉 앞에 세워진 정자각은 그대로 두는 것이 상례이므로 옛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이 합당하다하여 선조 능 앞에 있는 정자각을 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능침 조성이 완료되어 3년 상을 치르기 전까지는 가정자각에 신위를 안치했으므로, 이 기간 동안 인목왕후 능에도 가정자각을 설치했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의인왕후가 승하한 때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국가운영에 여력이 없었던 때로, 이러한 상황은 의인왕후 국장과 산릉 준비과정에 많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이전의 상장례를 참고할 만한 의궤가 모두 소실된 사실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의인왕후 상장례를 계기로 선조 연간부터 다시 의궤를 편찬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편찬된 의궤가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懿仁王后]殯殿魂殿都監儀軌)』와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懿仁王后]山陵都監儀軌)』이다. 의인왕후릉의 석물들은 등신대에 가깝게 줄었으며, 장명등의 중대에 화문(花紋), 하대석에 불로초(영지) 문양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의인왕후 능 다음으로 조성된 능은 1608년 만들어진 선조의 능이며 지금 정자각 바로 뒤편에 위치해 있다. 조성 당시에는 숙릉(肅陵)이라고 했으나, 1608년 5월 19일 목릉으로 고쳤다. 선조의 능은 1608년 조성된 이후부터 많은 문제를 노출하였다. 인산을 완료한 지 한 달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비가 오면 능침의 이곳저곳이 무너져 내렸고 정자각에 비가 새는 일이 빈번했으며, 사초와 석물들이 제대로 가다듬어지지 않아 병풍석과 지대석 사이가 갈라져 봉분이 붕괴될 조짐까지 보였다. 결국 조정에서는 일 년 후인 1609년 어그러진 병풍석과 지대석, 그리고 누수 현상이 발생하는 정자각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에 들어갔고 그 내용은 『목릉수개의궤(穆陵修改儀軌)』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리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구조상의 문제점이 계속 노출되어 결국 천릉하게 되었다. 선조 능의 천릉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처음으로 진행된 작업이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한계가 있었다. 우선 천릉 과정과 의례, 동원 인력 등을 참고할 만한 자료가 상당수 손실되었기 때문에 온전한 천릉 과정을 구현하기에 어려운 점이 많았고, 산릉과 천릉 두 도감만 설치하였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간소하게 치러질 수밖에 없었다. 선조 능의 천릉과 관련해서는 『천릉등록』을 비롯해 『목릉천장시등록』, 『[선조목릉]천릉도감의궤』, 『[선조목릉]천장시산릉도감의궤』 등 여러 건의 등록과 의궤가 제작되었다. 선조 능은 의인왕후 능과 유사한 규모로 조성되었다. 16세기 왕릉에 비해 비교적 좁게 조성된 능침 위에 상·중·하계의 구분이 있고 곡장 영역에는 계단식 화계가 있고 그 앞에 석양과 석수가 번갈아가며 배치되어 있는 전형적인 상설제도를 따랐다. 1632년 가장 늦게 조성된 인목왕후 능은 의인왕후 능 동측에 자리하고 있다. 인목왕후 능의 능침 역시 상·중·하계로 구분되었고 봉분은 병풍석 없이 주위에 난간석만 둘렀다. 각 1쌍씩의 문석인은 선조와 의인왕후 능의 무석인 얼굴과 비교해 보면, 투구와 복식을 제외하고 각기 다양한 표정과 모습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가운데 유일한 다포형식의 건물로 살미의 형태나 구조가 장식화되기 이전의 초기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가치가 크다. 목릉의 조영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산릉제도의 전거가 멸실된 와중에 조선초기 『국조오례의』에 입각하여 조성함으로써 16세기 이전 조영 방식으로 회귀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석물 양식에 있어서도 조선전반기에서 후반기로 이행한 과도기적인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능주 소개
선조(宣祖, 1552~1608)는 조선 제14대 국왕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초명은 균(鈞), 뒤에 연(昖)으로 개명하였다. 1552년 11월 11일 한성 인달방에서 출생하였다. 중종의 손자이며, 덕흥대원군 초(岹)의 셋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증 영의정 정세호(鄭世虎)의 딸인 하동부대부인 정씨이다. 비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이며, 계비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이다. 어렸을 때부터 명종의 총애를 받고 자랐으며 하성군에 봉해졌고,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훙서하자 그해 즉위하였다. 즉위한 후에는 훈구세력을 물리치고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여 명유 이황(李滉)과 이이(李珥) 등을 극진한 예우로 대하며 침체된 정국에 활기를 불러일으키고자 하였다. 조식(曺植)과 성혼(成渾) 등 유능한 인재들을 관력에 구애받지 않고 초빙하기도 했다. 『유선록(儒先錄)』,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소학』 등 치도에 관계되는 서적과, 국가의 윤리 기강을 정립하기 위해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짓도록 하고 모두 간행하여 널리 읽도록 하였다. 왕위에 오르자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고자 하는 작업을 단행하였다.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를 추숭하는 등 억울하게 화를 입은 사림들을 신원하고 그들에게 해를 입힌 남곤(南袞) 등의 관작을 추탈하여 민심을 수습하였다. 또한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유관(柳灌) 등을 죽이고 녹훈을 받은 이기(李芑)와 윤원형(尹元衡) 등을 삭훈하였다. 사서의 오류를 바로잡고자 1588년에는 명나라 법전인 『대명회전(大明會典)』 등에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예라는 그릇된 사실이 200년간이나 전해 내려온 것을 윤근수(尹根壽) 등을 사신으로 보내 시정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선조 연간 정국을 주도하던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되었으며, 이로 인해 정론이 분열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로써 정계는 당쟁에 휘말렸으며 국력은 더욱 쇠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선조 연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대표되는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국가의 운명이 매우 위태로운 시기였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597년 재차 왜군이 침입하자[정유재란(丁西再亂)],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는 한편, 관군의 정비를 촉구하였다. 왜란이 끝난 뒤 1604년에 공신을 녹훈하여 전쟁의 마무리를 짓고 전후 복구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흉년이 거듭되고 동인·서인의 당쟁은 더욱 격심해져서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되었다. 선조는 두 대비 모시기를 친어머니 섬기듯 효도가 지극하였다. 성품이 본디 검소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성색이나 오락을 좋아하지 않았고, 음식과 의복도 절제하여 비빈이나 궁인들이 감히 사치하지 못하였다. 항상 절용하고 농민들의 노고를 생각해 한 톨의 낱알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화에도 조예가 깊어 당대 명필 석봉 한호(韓濩)의 서풍에 영향을 받아 호방한 필치를 구사했고 대나무와 난을 잘 그렸다. 1608년 2월 1일 정릉동 행궁(지금의 덕수궁)의 정침에서 승하하였다. 시호는 ‘소경 정륜 입극 성덕 홍렬 지성 대의 격전 희운 현문 의무 성예 달효 대왕(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 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고, 묘호는 처음에 ‘선종(宣宗)’으로 올렸다가 1616년 8월 광해군에 의해 ‘선조(宣祖)’로 격상되었다. 능호는 처음에 ‘숙릉(肅陵)’으로 정했으나, 1608년 5월 ‘목릉(穆陵)’으로 고쳤다.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안장되었다. 의인왕후(懿仁王后, 1555~1600)는 선조의 정비이다. 본관은 나주이며 번성부원군 박응순(朴應順)의 딸이다. 1569년(선조 2)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를 행하였고, 1590년 ‘장성 왕후(章聖王后)’의 존호를 받았다. 1600년 6월 27일 정릉동 행궁에서 46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왕궁이 모두 불타버렸기 때문에 선조가 평안도 의주에서 돌아왔을 때 거처할 곳이 없어 임시로 정릉동 행궁에 머물러 있었는데, 때마침 의인왕후가 이곳에서 산후병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빈전은 계림군 이류(李瑠)의 집으로 결정되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왕후의 상장(喪葬)은 전란 직후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 치러지다 보니 5개월장의 관례를 깨고 7개월까지 연장된 끝에 12월 22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때 제작된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는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와 더불어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 초기 의궤가 모두 유실된 후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의궤이다. 승하한 뒤 1604년(선조 37) ‘휘열(徽烈)’의 존호가 더해졌고 1610년(광해군 2) ‘정헌(貞憲)’의 존호가 가상(加上)되어 시호가 ‘장성 휘열 정헌 의인 왕후(章聖徽烈貞憲懿仁王后)’로 최종 확정되었다. 혼전은 ‘효경(孝敬)’이다. 능호는 처음에 ‘유릉(裕陵)’으로 정했다가 선조의 능이 조성되면서 ‘목릉(穆陵)’으로 고쳤다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는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계비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이다. 1602년(선조 35) 7월 13일에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606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이때 광해군이 세자의 지위에 있었는데 당시 실권자인 유영경(柳永慶)은 적통론(嫡統論)에 입각하여 적출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세자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영경 일파는 몰락하였고 대북정권이 들어서자 이들은 왕통의 취약성을 은폐하기 위하여 선조의 첫째 왕자인 임해군(臨海君)을 제거하고 이어서 영창대군을 폐서인시킨 뒤 살해, 대군의 외조부 김제남을 사사시키고, 인목왕후를 폐비시킨 다음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광해군의 이러한 행위는 결국 정변의 구실을 주게 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인목왕후는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1632년 여름 병으로 누운 지 한 달이 지나 더욱 위독해져, 6월 28일 갑오(甲午)에 인경궁(仁慶宮)의 흠명전(欽明殿)에서 49세로 승하하였다. 대제학 장유(張維, 1587~1638)가 지은 지문(誌文)에 의하면 왕후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1613년 계축화변(癸丑禍變) 이후 3년 동안 밥을 먹지 아니했고, 복(服)을 벗고서는 미음죽만 먹었으며, 복위되고서도 어육(魚肉)을 먹지 않았으니 대개 소밥을 먹은 지 전후 통틀어 17년이었다고 전한다.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의 어른으로서, 가끔 국정에 관심을 표하여 한글로 하교를 내리기도 했다. 서예에도 능통해 선조 임금의 영향을 받아 남성적인 필치에 능했다.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친필로 쓴 『보문경(普門經)』의 일부가 전하고 있으며 필적 역시 전해오고 있다. 시호는 ‘소성 정의 명렬 광숙 장정 인목 왕후(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仁穆王后)’이고, 능호는 처음에 ‘혜릉(惠陵)’으로 정해졌으나 이후 ‘목릉(穆陵)’으로 개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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