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 왕릉명
- 강릉
- 능주명
- 제13대 명종·인순왕후
- 왕릉위치
- 서울특별시 노원구 화랑로 727
- 조성연대
- 1567년 왕릉, 1575년 왕후릉
- 왕릉형태
- 쌍릉
능의 조성
명종은 문정왕후의 상사를 치르고 2년 뒤 1567년에 승하했다. 장지가 왜 지금의 자리로 정해졌는지에 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명종이 생전에 문정왕후의 장지를 정하면서 지금의 자리인 양주 대방동을 장지로 최종 결정했던 사실과 모친의 능이 근방에 자리 잡고 있는 사실 등이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종 능이 조성된 지 8년 째 되던 해 인순왕후가 승하하자 1575년 1월 16일 여러 재상들과 함께 논의한 결과 명종 능 옆에 모시기로 최종 결정되었다. 장지 선정 후 산릉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4월 28일 왕후를 부장하였으며 5월 안릉제를 지냄으로써 모든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이로써 강릉은 왕과 왕후릉이 같은 언덕에 좌우로 배열된 쌍릉으로 조성되었다. 임진왜란 동안 한양 근처에 있던 왕릉이 왜적들에 의해 파괴된 것처럼 강릉 역시 도굴의 대상이 되었다. 1593년(선조 26) 1월 22일 김천일이 선조에게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12월 16일 왜적이 기병과 보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또 성중의 주민 50명을 뽑아 강릉과 태릉에 가서 능을 팠지만 능 위에 회가 단단하게 막혀서 깨뜨리지 못하고 날이 저물어 파하고 되돌아 왔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강릉은 광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사초가 불타고 정자각이 소실되었다. 곧이어 파괴된 부분에 대한 복구가 이루어졌으나 세월이 흘러 병풍석에 틈이 생겨 봉분이 붕괴될 조짐을 보였고 각 석물에 균열이 가자 대대적인 보수를 실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릉의 정자각은 1567년 명종의 산릉 조성시 창건되었다가 1571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후 재건되었는데 1593년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어 다시 중건되었다.
능주 소개
명종은 조선 제13대 국왕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환(峘), 자는 대양(對陽)이다. 탄생일은 5월 22일이다. 중종의 둘째 아들로 인종의 아우이고, 어머니는 영돈녕 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이다. 비는 인순왕후로 청릉부원군 심강(沈鋼)의 딸이다. 중종은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 사이에서 인종을 낳았고, 두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 윤씨 사이에서 명종을 낳았다. 중종이 승하한 후 인종이 즉위했으나 재위 8개월 만에 중병을 얻자 당시 12세였던 경원대군(후의 명종)에게 양위할 것을 유시로 남겼다. 이후 1545년 7월 6일 등극하였다.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르자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여 정무를 보았다. 그 결과 외척들의 전횡이 심해져 왕후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이 득세하여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문정왕후가 명종을 낳자, 장경왕후의 동생인 윤임(尹任)이 김안로(金安老) 등과 함께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문정왕후와 알력이 생겼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실각하고 윤원형 등이 등용되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암투가 더욱 치열해졌다. 이때 윤임 일파를 대윤, 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고 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한 때 윤임이 득세하여 이언적(李彦迪) 등 사림의 명사를 많이 등용해 기세를 떨쳤다. 그러나 곧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사태는 크게 변하였다. 윤원형은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중종의 여덟째 아들)에게 왕위를 옮기려 한다고 무고하는 한편, 윤임이 인종이 죽을 당시에 계성군(성종의 셋째 아들)을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다. 이를 구실로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이들의 숙청을 강력히 권유하여, 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하게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당류인 사림을 유배시켰다. 이어서 1547년에는 양재역벽서사건을 계기로 그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이로써 외척 전횡의 시대가 전개되자, 명종은 윤원형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이량(李梁)을 등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더욱 문란해지고 파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양주의 백정 출신 임꺽정이 1559년부터 1562년 사이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횡행하였다. 밖으로는 삼포왜란 이래 세견선의 감소로 곤란을 받아온 왜인들이 1555년 배 6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를 침입했다. 이들은 결국 이준경(李浚慶), 김경석(金慶錫), 남치훈(南致勳) 등에 의해 영암에서 격퇴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비변사가 설치되었다. 모친 문정왕후의 전권과 간섭 속에서도 사가독서제를 통해 인재를 고르게 등용해 선정을 베풀려 했고 사액서원을 제도화하여 사림의 학술활동을 후원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또한 문정왕후 뒤를 이어 불교를 장려하였고 경전을 활발히 편찬하도록 하여 16세기 불교문화 진작에 일조하였다. 1567년 6월 28일 34세의 젊은 나이로 경복궁 양심당에서 승하하였다. 인순왕후와의 사이에서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1563년 13세의 어린나이에 죽어서, 왕위는 덕흥부원군(중종의 아홉째 아들)의 셋째 아들이 계승했으니, 이가 곧 선조(宣祖)이다. 시호는 ‘공헌 헌의 소문 광숙 경효대왕(恭憲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이고 능호는 ‘강릉(康陵)’으로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 인순왕후는 조선 제13대 왕 명종의 비이다. 본관은 청송, 영의정 심연원(沈連源)의 손녀이자 청릉부원군 심강의 맏딸이다. 모친은 전주 이씨이다. 12세 때 경원대군(명종)과 가례를 올리고 인종이 죽은 후 1545년 14세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551년에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13세로 일찍 죽었다. 후궁들에게서도 후사가 없자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아들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후의 선조)을 양자로 입적하여 보위에 오르게 하였다. 선조 즉위 후 잠시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곧 청정을 철회하였다. 시어머니 문정왕후의 섭정과 윤원형 등의 외척세력이 득세함에 따라 명종과 더불어 왕비로서 제대로 뜻을 펼칠 기회를 잡지 못하였다. 1569년(선조 2) 의성(懿聖)의 존호가 진상되었다. 세상을 뜨기 일년 전부터 중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1575년 1월 2일 44세의 나이로 창경궁에서 승하하여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강릉에 명종 옆에 묻혔다. 시호는 ‘선열 의성 인순왕후(宣烈懿聖仁順王后)’, 혼전(魂殿)의 이름은 ‘경모(敬慕)’이다.
왕릉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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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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