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릉
- 왕릉명
- 제릉
- 능주명
- 제1대 태조 원비 신의고황후
- 왕릉위치
- 경기도 개풍군 상도면 풍천리(현재 개성 판문군 지동)
- 조성연대
- 1391년 조성, 1407년 능제로 개건
- 왕릉형태
- 단릉
능의 조성
제릉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정비(正妃)인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무덤이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기 1년 전인 1391년 신의왕후가 사망하자, 해풍군(海豊郡) 치속촌(治粟村)에 장사 지냈다가, 태조가 조선을 개국한 뒤 시호를 절비(節妃)라 칭하고 능호를 제릉이라 하여 지금의 개풍군 상도면 풍천리에 봉릉하였다. 좌향은 갑좌경향(甲坐庚向)으로, 거의 서향으로 하여 자리하고 있다. 이 때 제릉의 동쪽 마을에 재궁(齋宮)을 지어 초경사(肖慶寺)라 하였다. 왕비릉의 규모를 갖추지 못하고 있던 제릉을 왕비릉으로 정비한 것은 아들 태종이었다. 태종은 1404년(태종4)에 제릉에 신도비를 세웠으며, 1407년(태종 7)에는 제릉에 석실을 조성하고, 돌난간과 석인(石人)을 세웠다. 이 공사는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 1357~1423)이 주도하였는데, 박자청은 이듬해 건원릉을 조성할 때에도 크게 활약한 인물이다. 태종은 제릉의 재실인 연경사(衍慶寺)에 노비 100구와 토지 100결을 주어 제릉을 수호하게 하였는데, 연경사는 18세기까지 존속되었다. 1676년(숙종 2) 6월 26일 정자각에 화재가 났다는 기록이 있으며, 1744년(영조 20) 11월에는 신도비를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능주 소개
신의왕후(神懿王后, 1337∼1391)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정비이다. 본관은 안변(安邊)으로, 증문하시랑찬성사(贈門下侍郞贊成事) 한유(韓裕)의 증손이고, 증문하좌정승(贈門下左政丞) 한규인(韓珪仁)의 손녀이며, 증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 한경(韓卿)의 딸이다. 이성계(李成桂)에게 시집와서 함흥 운전리(雲田里)에 세거하였다. 1364년(공민왕 13) 이성계가 동북면병마사로서 삼선(三善)·삼개(三介)의 난을 토평한 공로로 봉익대부밀직부사(奉翊大夫密直副使)에 오르고, 단성양절익대공신호(端誠亮節翊戴功臣號)를 받자 원신택주(元信宅主)에 봉해졌다. 우왕 대에는 포천의 재벽동(滓壁洞) 전장(田莊)에 거주했고,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때 동북면으로 피난하기도 하였다. 1391년 정국의 동요로 상심하여 병을 얻어 9월 12일 55세로 죽자, 해풍군(海豊郡) 치속촌(治粟村)에 장사지냈다. 1398년(태조 7) 정종이 즉위하자 11월에 절비 한씨를 신의왕후라 추존하고, 1408년(태종 8)에 승인순성신의왕태후(承仁順聖神懿王太后)라고 시호를 높였다. 그 뒤 1683년 제왕후의 시책(諡冊) 중에 신의왕태후와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 태종비)만이 태(太)자가 있어 미편(未便)함이 논의되어 승인순성신의왕후·창덕소열원경왕후(彰德昭烈元敬王后)로 각각 개책(改冊)한 바 있다. 소생으로는 정종·태종을 비롯하여, 이방우(李芳雨)·이방의(李芳毅)·이방간(李芳幹)·이방연(李芳衍) 등의 6남과 경신(慶愼)·경선(慶善) 등 두 공주가 있었다.
왕릉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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