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릉
- 왕릉명
- 희릉
- 능주명
- 제11대 중종 1계비 장경왕후
- 왕릉위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 조성연대
- 1515년 조성, 1537년 천릉
- 왕릉형태
- 단릉
능의 조성
희릉은 단릉으로 조성되었다. 희릉은 처음에는 1515년 대모산 줄기에 있는 태종 헌릉(獻陵)의 서쪽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1515년 3월 7일 장경왕후의 능호가 희릉으로 결정되고 산릉의 공사가 이루어지는 도중 광중에서 돌이 나와 혈 자리를 조금씩 바꾸게 되었고 이는 22년이 지난 후 정치권을 장악하려 한 김안로의 주장에 의해 희릉을 천장하게 된 빌미가 되었다. 희릉의 천장이 결정된 후 관상감제조 유보 등이 희릉에서 2~3리 떨어진 옹암의 언덕과 희릉의 남산 화소 밖에 있는 취적동을 추천하여 산릉도를 그려 바쳤으나, 중종은 해당 지역에 능을 조성하려면 민폐가 많다는 이유로 고양지역으로 결정하였다. 희릉은 천장되면서 석물을 다시 마련하여 곡장과 난간석, 석호 및 석양 각 2쌍, 혼유석 1좌, 장명등 1좌, 문무석인 각 1쌍, 석마 2쌍이 놓여졌다. 1544년 중종이 승하한 뒤 희릉을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만들어 오른쪽에 중종 능을 함께 조성하자 이름도 정릉(靖陵)으로 고쳤으나, 1562년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가 중종의 능을 지금의 자리로 이장시킨 뒤 다시 희릉으로 부르게 되었다. 희릉의 능역에서 중종의 능이 천릉되자, 1562년 두 능 가운데 세웠던 정자각을 희릉과 정면으로 향하도록 고쳐 세웠다. 이후 1753년 영조의 명으로 표석건립도감을 설치하여 희릉에 표석을 세웠고, 1771년 혼유석이 기울어진 사실이 확인되어 보수하였다.
능주 소개
장경왕후(章敬王后, 1491~1515)는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계비이다. 본관은 파평이며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이다. 1491년(성종 22) 7월에 호현방 사제에서 태어나 월산대군의 부인에 의해 양육되었다. 중종의 원비[후에 단경왕후로 추승]가 반정이 있은 지 7일 만에 폐서인이 되어 하성위 정현조(鄭顯祖)의 집에 우거하게 되자, 원비를 폐한 다음 날 예조와 참판은 처녀를 간택하여 내직을 갖추고 중궁 책봉도 미리 거행할 것을 아뢰니, 중종이 그대로 따랐다. 1509년 좌의정 박원종 등의 건의에 의해 윤여필의 딸을 숙의(내명부 종2품직)로 삼고 당일 조정 대신들의 진하가 이루어졌다. 또한 같은 해 8월 4일에 단경왕후 신씨의 손위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중궁에 오른 지 4년만인 1514년(중종 6) 5월 18일 효혜옹주를 낳았고 이듬 해 1515년 2월 25일 초경에 원자[인종]를 낳았다. 그러나 원자를 출산한지 며칠이 지나 산후병이 악화되어 원자를 교성군 노공필(盧公弼)의 집에 보내고 3월 2일에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운명하였다. 『대왕대비실록(大王大妃實錄)』에 의하면 장경왕후는 성품이 겸손하고 돈독하여 아랫사람들을 잘 훈육했다고 한다. 휘호는 ‘숙신 명혜(淑愼明惠)’이며, 1547년에 ‘선소 의숙(宣昭懿淑)’이라 추상되었다. 시호는 ‘선소 의숙 장경 왕후(宣昭懿淑章敬王后)’라 하였고 승하한지 60일 만에 발인하여 경기도 광주 대모산 헌릉의 좌측에 장사지내고 능호를 ‘희릉(禧陵)’이라 하였다. 1537년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자리로 천장되었다.
왕릉탐방
희릉(禧陵) 구조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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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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