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릉
- 왕릉명
- 온릉
- 능주명
- 제11대 중종 원비 단경왕후
- 왕릉위치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호국로 255-41
- 조성연대
- 1557년 사묘로 조성, 1739년 봉릉
- 왕릉형태
- 단릉
능의 조성
온릉은 단릉으로 조성되었다. 온릉은 1739년 사묘에서 능으로 봉해지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중종의 정비 단경왕후는 폐위된 후 생전에 복위되지 못한 채 민가에서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그녀의 묘소는 본래 왕후 능의 격식을 따르지 않은 양반가의 소박한 무덤 형식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폐비 신씨 묘의 봉릉이 결정된 후, 무덤을 이장하지 않고 석물은 모두 주변에 묻고 그 자리에 장릉과 사릉의 봉릉 예에 따라 능의 모습을 갖추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온릉이 현재 모습으로 새롭게 조성된 시기는 1739년이기 때문에 다른 중종비의 능과 달리 조선 후기 형식을 반영하고 있다. 능역은 상·중·하 3단에서 내계와 외계만 남겨진 형식으로 변모되었고, 무석인 없이 문석인 한 쌍만 각각 석마를 대동하고 서 있다. 온릉의 석물은 규모가 작고 문석인의 얼굴과 의습은 과장되고 근엄한 앞 시기의 조각 수법에서 벗어나 은행알처럼 선명하고 가는 눈, 살짝 미소 지은 입, 공복의 안감이 바람에 펄럭이듯 살짝 반전된 모습 등 인체에 가까운 현실적인 경향이 대두된 17·18세기 왕릉조각 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능 아래에는 재실이 있었으나 1970년 도로확장 때 없어졌다.
능주 소개
단경왕후(端敬王后, 1487~1557) 신씨(愼氏)는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원비이다. 본관은 거창이며 익창부원군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다. 1499년 13세에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과 혼인하여 ‘부부인’에 봉해졌다. 1506년 진성대군이 중종으로 추대되자 왕후에 올랐으나, 고모가 연산군의 비이고, 아버지가 연산군의 매부로 연산군 축출을 위한 반정모의에 반대한 일로 성희안(成希顔) 등에게 살해되면서 공신들의 압력으로 폐위되었다. 1515년(중종 10) 장경왕후 윤씨의 죽음을 계기로 김정(金淨), 박상(朴祥) 등이 신씨의 복위를 주장했으나, 이행(李荇), 권민수(權敏手)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545년에는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인종에 의해 자수궁(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를 빈으로 낮추어 거처하게 한 곳)의 예와 같이 대우를 받기도 했으나, 결국 생전에 복위되지 못하고 사가에서 홀로 살다가 1557년 12월 7일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친가의 선산에 안장되었다. 1739년(영조 15)에 유생 김태남(金台南)의 상소가 계기가 되어 그해 3월 28일 복위되었다. 이 날 예조에서 시호를 ‘단경(端敬)’, 휘호를 ‘공소 순열(恭昭順烈)’, 능호를 ‘온릉(溫陵)’이라 하여 올렸는데 4월 초1일 최종 확정되었다. 봉릉도감을 설치하고 1698년 장릉(莊陵)을 추복했을 때의 예에 따라 3월 30일에 태묘에 고하였다. 능은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에 있다.
왕릉탐방
온릉(溫陵) 구조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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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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