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릉
- 왕릉명
- 선릉
- 능주명
- 제9대 성종·계비 정현왕후
- 왕릉위치
- 서울특별시 강남구 선릉로100길 1
- 조성연대
- 1495년 왕릉, 1530년 왕후릉
- 왕릉형태
- 동원이강릉
능의 조성
선릉은 왕과 왕후 능이 하나의 정자각 뒤로 각기 다른 언덕에 별도의 봉분을 배치한 동원이강릉으로 조성되었다. 동원이강릉은 주로 조선 전기에 많이 조성되었다. 1494년 12월 24일 성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이듬해 4월 6일에 선릉에서 장례가 거행되었다. 한 때 풍수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천장해야 한다는 상소가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종의 국장이 있은 후 36년 뒤인 1530년 정현왕후가 승하하자 보름 만에 장지를 정하였고 상사는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와 성종 비 공혜왕후의 부묘의 예에 따라 진행하였다. 당시에는 능 이름을 새로 정하지 않고 성종의 능과 구분하기 위해 ‘새 선릉(新宣陵)’으로 불렀고 이후로도 정현왕후의 능은 별도의 능호를 정하지 않고 성종 능과 더불어 선릉으로 통칭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릉은 왜적들에 의해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1593년 4월 13일 왜적이 선릉을 파헤쳐 재궁에 이르렀다는 경기도 관찰사 성영의 보고가 있었고 4월 24일 광중은 이미 비어서 무참히 도굴 당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에 곧바로 개장도감(改葬都監)을 설치하여 선릉을 수리하였다. 성종의 능이 조성되었을 당시에는 그 주변에 있던 견성사가 선릉의 원찰로 이용되었다. 연산군은 정현왕후의 뜻에 따라 1498년 견성사를 중창하고 이어 선릉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겨 사찰명을 봉은사로 바꾸고 다시 창건하기에 이르렀다. 명종대 이후 봉은사는 선릉과 정릉 두 왕릉을 보호하고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조포사로서 역할을 하였다. 숙종 재위 기간에 선릉의 석물과 정자각을 보수하였는데 현재 전해져 오는 선릉 정자각 중건상량문은 이 때의 낙성을 기념하여 작성한 것이다.
능주 소개
조선 제9대 국왕인 성종(成宗, 1457~1494)은 조부가 세조(世祖, 1455~1468)이며, 부친은 세조의 둘째 아들로 사후에 덕종(德宗)으로 추존되었다. 모친은 좌의정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이다. 1469년 예종의 뒤를 이어 13세에 경복궁에서 즉위하여 25년간 재위하였다. 휘는 ‘혈’이다. 시호는 ‘성종 강정 인문 헌무 흠성 공효 대왕(成宗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다. 이후 대한제국기 동안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인 ‘강정(康靖)’을 폐기하고 ‘성종 인문 헌무 흠성 공효 대왕(成宗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으로 고쳤다. 1461년 ‘자산군(者山君)’에 봉해졌다가 1468년 ‘자을산군(者乙山君)’으로 개봉되었다. 1474년 원비 공혜왕후(恭惠王后)가 아들이 없이 죽자 1476년 판봉상시사 윤기견(尹起畎)의 딸 숙의 윤씨(淑儀尹氏: 연산군의 생모)를 왕비로 삼았으나, 투기가 심하다는 이유로 1479년 폐위하였다. 고려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100여 년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교지·조례·관례 등을 집성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을 수차의 개정 끝에 1485년에 완성, 반포하였다. 1485년 풍속을 교화하기 위해 조정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가녀의 자손을 관리 등용에 제한하는 법을 공포했으며, 1487년에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의 후손을 녹용하는 한편, 인재를 널리 등용하는 등 법률과 국방, 학문양성 등에서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1494년 창덕궁 대조전에서 38세로 훙하였다. 이듬해 1495년 시호와 묘호를 의논하여 시호는 ‘인문 헌무 흠성 공효(仁文憲武欽聖恭孝)’라 하고 묘호는 ‘성(成)’이라 하며, 능호는 ‘선(宣)’, 전호는 ‘영사(永思)’라 정하였다. 조선왕조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기반과 체제를 완성시킨 군주였으며, 묘호가 후일 성종으로 정해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능호는 선릉(宣陵)으로 조선시대에는 광주부에 편입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행정구역상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과 함께 안장되어 있다. 정현왕후(貞顯王后, 1462~1530)는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계비이다. 성은 윤씨, 본관은 파평이며 중종의 모친이다. 부친은 신창현감을 지낸 윤호(尹壕)이다. 1462년 6월 25일에 탄생하여 1480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중종실록』에 의하면 정현왕후가 생전에 자신의 인생을 언문으로 기록한 것을 중종이 요약하여 예조에 내렸다고 한다. 이 글에 의하면 정현왕후의 이름을 부친 윤호가 신창현감으로 있을 때 그 고을 관아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창(昌)’자를 가지고 ‘창년(昌年)’이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1473년 대궐에 들어가 처음 숙의에 봉해졌고, 1479년 성종의 두 번째 부인 윤씨가 폐위되자 이듬해 11월 왕비로 책봉되었다. 1497년에 ‘자순(慈順)’, 1505년에 ‘화혜(和惠)’라 존호되었다. 불교에 독실하여 성종 승하 후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찰이었던 견성사를 선릉의 원찰로 삼았다. 1530년 8월 22일 경복궁 동궁에서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8월 27일 중종이 대신들과 의논하여 혼전의 이름을 ‘효경(孝敬)’, 시호를 ‘정현(貞顯)’이라 정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 휘호를 ‘소의 흠숙(昭懿欽淑)’이라 올렸고, 마침내 10월 29일 선릉 왼쪽의 축좌(丑坐) 미향(未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당시에는 별도로 능의 이름을 짓지 않고 ‘새 선릉[新宣陵]’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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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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