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
- 왕릉명
- 광릉
- 능주명
- 제7대 세조·정희왕후
- 왕릉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 산100-1
- 조성연대
- 1468년 왕릉, 1483년 왕후릉
- 왕릉형태
- 동원이강릉
능의 조성
세조가 승하하자 1468년 11월 28일에 양주 치소 아래의 동쪽 풍양현 직동언덕에 장사지내고, ‘광릉’이라 하였다. 시호는, ‘승천 체열문영무 지덕 융공 성신 명예 흠숙 인효(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라 하고, 묘호를 ‘세조’라 했다. 광릉에 부역하는 군사가 9천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왕후릉을 조성할 때 윤호 등이 산릉의 길지를 광릉의 동쪽이라고 하여 이에 따라 광릉의 동혈에 장사지냈다. 광릉의 조영에 관해서는 『광릉지』 권1에 산릉, 옥첩(玉牒), 상설(像設)을 기록하였는데 상설에는 봉분과 석물에 대한 수량과 위치, 석수의 머리 방향까지 기술하였고 왕후릉은 왕릉의 상설과 같다고만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표석에 대해서도 위치와 음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권3에는 석물과 건물에 대한 보수기록이 실려 있다. 광릉은 동원이강릉으로 왕과 왕후릉의 능위인 서부지상(西阜之上)에 맞게 조성되어 왕릉이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광릉은 두 개의 능선에 위치한 능 앞에 하나의 정자각을 설치하는 동원이강형(同原異岡形) 능제의 시초를 보여준다. 왕릉에 사대석 설치를 금하는 등 능의 조영에 대하여 유교를 남겼던 세조의 광릉은 이후 왕릉 제도의 전범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광릉 이후, 왕릉 조성시에 논의가 되는 것들에 대해서 광릉의 제도를 따르도록 한 경우가 많다.
능주 소개
세조는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둘째 아들로, 1417년 9월 29일에 태어났다. 휘는 ‘유(瑈)’, 자는 ‘수지(粹之)’, 시호는 ‘혜장(惠莊)’이다. 진평대군, 진양대군으로 봉해졌다가 1428년에는 수양대군으로 봉해졌다. 이후 ‘분충 장의 광국 보조 정책 정란 공신(奮忠仗義匡國輔祚定策靖亂功臣)’에 봉해졌다. 1455년 6월 11일에 단종이 선위하게 하고, 왕위에 올랐다. 세조는 집현전을 혁파하고, 식년시 이외에도 매년 별시를 시행하여 인재를 발굴하는 등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리고 군현의 정비와 둔전제, 직전법을 실시하여 국가의 재정을 확충하였다. 『사시찬요(四時纂要)』, 『잠서주해(蠶書註解)』, 『양우법초(養牛法抄)』 등의 농서를 간행하여 농업을 장려하였다. 이밖에도 제도를 정비하고,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특히, 성종 연간에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세조가 육전상정소를 설치하여 편찬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불교를 숭상하여 『법화경(法華經)』, 『금강경(金剛經)』 등 불경들도 간행하였다. 1468년에 수강궁의 정침에서 향년 52세로 승하하였다.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는 파평의 세가인 증 좌의정 윤번(尹璠)의 딸로 1418년 11월 11일에 태어났다. 세조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의경세자(추존 덕종)이며, 차남이 예종, 딸은 의숙공주이다. 1428년(세종 10) 빈으로 궁에 들어와서 ‘낙랑부 대부인’으로 봉해졌으며, 1455년(세조 즉위년)에 세조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1457년(세조 3)에 ‘자성 왕비’라고 하였으며, 예종이 높여서 왕대비로 삼고, ‘흠인 경덕 선렬 명순 원숙 휘신 혜의(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愼惠懿)’의 호를 더 올렸다. 1482년(성종 13) 봄에 경복궁으로 이어하였다. 1483년(성종 14)에 병세가 악화되어 3월 30일에 승하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나는 나라에 공이 없으니, 내가 죽으면 후장하지 말라.” 하고 옷을 미리 준비해서 두었는데, 모두 면포를 쓰고 비단같이 화려한 물건은 쓰지 않았다. 5월 25일에 시호를 올려 ‘정희 왕후(貞熹王后)’라 하고, 6월 12일에 광릉의 동쪽 축좌미향의 좌판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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