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원릉
- 왕릉명
- 건원릉
- 능주명
- 제1대 태조
- 왕릉위치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2
- 조성연대
- 1408년
- 왕릉형태
- 단릉
능의 조성
태조가 사망하자 태종은 4개 도감과 13개 색(色)을 설치하여 국장을 분담하게 했는데, 이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한 것이다. 태조의 능을 조성할 장소가 결정된 것은 1408년(태종 8) 6월이었다. 영의정 하륜(河崙) 등이 원평, 봉성, 행주를 후보지로 거론했으나 채택되지 않았고, 양주의 검암으로 최종 결정했다. 장지가 결정되자 조묘도감에서 즉시산릉을 조성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인력은 각도의 군인에서 차출했는데, 충청도에서 3,500명, 풍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이 동원되었다. 산릉 조성이 끝나자 태종은 재궁, 즉 재실에 개경사(開慶寺)라는 이름을 내리고 노비 150구, 토지 300결을 붙여주었고, 능을 지키는 수호군 100명을 두었다. 건원릉의 재실인 개경사는 18세기까지 존속하였다. 태조의 국장은 1408년 9월 7일에 발인이 있었고 9월 9일 국장이 거행되었다. 1408년 11월에 지석(誌石)을 묻었고, 이듬해 능 주변에 소나무를 심고 신도비를 세웠다.
능주 소개
태조(1335~1408)는 조선을 개국한 국왕으로 이름은 성계(成桂)이며,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이다. 국왕으로 등극한 후 이름은 단(旦), 자는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화령부(영흥)에서 이자춘(李子春)과 부인 최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왕비는 신덕왕후 강씨이다. 태조는 1362년(공민왕 11) 정월에 홍건적이 장악한 개경을 탈환했고 고려를 침략한 원나라, 여진, 왜구를 물리치면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1388년(우왕 14)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통보하자 이에 반발하여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했고,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창왕을 옹립했다가 얼마 후 공양왕을 옹립했다. 1391년 삼군도총제사가 되어 전제개혁을 단행했고, 1392년 7월에 공양왕을 내쫓고 조선을 세웠다. 태조는 즉위 초에는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채용하다가 1393년 3월부터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왕사인 무학(無學)의 건의로 한양을 새 도읍지로 결정하고 1393년부터 1396년까지 사대문과 사소문 등을 건설하여 수도로서의 규모를 갖추었다. 태조는 즉위한 직후에 이방석(李芳碩)을 왕세자로 책봉했는데,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왕자들 사이에 쟁탈전이 일어났다. 1398년(태조 7)에 이방원이 신덕왕후의 소생이자 아우인 이방석과 이방번(李芳蕃)을 죽이는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태조는 이방원의 형인 이방과(李芳果,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고, 1400년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태상왕이 되었다. 이후 태조는 소요산과 함주(함흥) 등지에 머물다가 1402년(태종 2)에 서울로 돌아왔다. 만년에 태조는 덕안전을 지어 불도에 정진하다가 1408년 5월 24일에 창덕궁 별전에서 사망했다. 1408년 9월에 시호와 묘호(廟號)가 정해졌는데, 시호는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었고, 묘호는 ‘태조(太祖)’였다.
왕릉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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