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오 초상
- 제작시기
- 19세기 전반
- 제작자
- 이재관(李在寬)
- 규격
- 화면 63.9×40.3cm
- 지정종목
- 보물
- 지정일
- 2006-12-29
-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 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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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강이오(姜彝五, 1788~1857)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성순(聖淳), 호는 약산(若山), 유당(留堂)으로 문인화가였던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손자이다. 강이오의 초상화는 강세황의 초상화와 함께 전하는데, 두 초상화는 정면관의 관복본 반신상이라는 유사한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강이오는 과거에 급제한 것으로 언급되기도 하지만 정확한 급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사료에 등장하는 그의 첫 번째 관직은 1819년의 가설 주부(主簿)이며 이후에 이원현감(利原縣監), 공충중군(公忠中軍), 통진부사(通津府使) 등을 지냈다. 그 외에 영건도감(營建都監)이나 왕릉의 보수 등 궁중의 여러 사업에서 별간역(別看役)을 담당한 기록이 남아 있다. 〈강이오 초상〉의 화면 상단에는 예서로 적은 ‘약산진영(若山眞影)’이라는 표제와 ‘소당이 그리다(小塘寫)’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소당은 화가였던 이재관(李在寬, 1783~1849)의 호이다. 이재관은 19세기 초에 활약한 여항 문인이자 화가로서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의 화풍이 반영된 고사인물화를 잘 그렸다. 초상화에서는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1837년 도적에 의해 훼손된 태조 어진을 모사할 때 방외 화사로 발탁된 일이 있었다. 어진 모사 후에 2차례에 걸쳐 상을 받은 점으로 미루어 초상화에서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강이오는 별간역으로 도감에 참여하여 두 사람 사이에 교류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표제의 오른쪽에 적힌 찬문은 추사체로 이름 높은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글씨이다. 具足慧相 現宰官身 지혜를 갖춘 원만한 얼굴, 지금 관직에 있는 몸. 是惟丹靑之咄咄逼眞 그림이 이처럼 본 모습과 흡사하니 놀랍구나. 誰更知天地弧線羅心胸 천지의 큰 모습 가슴에 새긴 것을 누가 알겠는가! 隨遇而神 볼 수록 더욱 신명해라. 시문의 마지막에는 ‘노염(老髥)’이라는 서명과 ‘염(髥),’ ‘추사(秋史)’의 인장이 찍혀 있다. 김정희는 이 초상화가 매우 실제와 흡사하다고 감탄하며 강이오가 가슴에 큰 뜻을 품은 인물이라며 칭찬하였다. 김정희의 『완당전집(阮堂全集)』에는 강이오의 매화 그림을 보고 적은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아울러 강이오에 대하여 청대의 화가인 나빙(羅聘, 1733~1799)의 일파라는 평가를 남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두 사람이 서화로 교류하였던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화면 중앙에는 검은 사모와 분홍 시복을 착용한 강이오의 모습이 반신상으로 그려져 있다. 정면을 향한 안면을 표현하기 어려운 필선에 의한 묘사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안면의 가장자리, 안구의 주위, 코와 입의 주변 등에 메마른 붓질을 반복하여 부드러운 명암을 만드는 방식으로 이목구비와 골격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이재관의 화법은 기본적으로 정조대(正祖, 재위 1776~1800) 초상화 제작을 주도하였던 이명기(李命基, 1756~1813 이전)의 화법을 근간으로 한다. 분홍 시복은 굵기와 농담에 변화가 있는 필선으로 힘차게 묘사하였다. 연한 분홍색 안료를 바른 위에 옷주름을 따라 진한 분홍색을 덧칠하여 명암 효과를 냈다. 허리에는 2품 관료에 해당하는 삽금대(鈒金帶)를 착용하였다. 정면으로 보이는 관대의 삼태(三台)는 입체적으로 문양을 만들고 그 위에 금박을 붙여 화려하게 표현하였다. 이렇게 제작된 〈강이오 초상〉은 19세기 초반 초상화 양식을 증명하는 뛰어난 초상화의 하나로서 평가할 수 있다. 이재관의 필치로 전하는 초상화가 극히 드문 상황에서 이는 이재관이라는 화가 개인의 기량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서도 높은 의미를 지닌다. 글: 이경화
- 담당부서 :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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