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황 초상
- 제작시기
- 1783년(정조 7)
- 제작자
- 이명기(李命基)
- 규격
- 화면 145.5x94.0cm
- 지정종목
- 보물
- 지정일
- 1975-05-16
-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 관련사이트
- 강세황 초상-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바로가기
해제
18세기 예원의 총수라 불리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71세 초상화이다. 강세황은 명문세가 출신의 문인화가이자 영·정조대에 걸쳐 조정에서 활약하였던 고위 관료였다. 강세황은 조선에 문인화가 정착하는 데 기여한 화가였으며 동시에 초상화에서도 두각을 보였다. 1782년 70세를 맞은 강세황은 관모에 야복을 입은 모습으로 자신의 일생을 묘사한 독창적인 자화상을 제작하였다. 본 초상화는 1783년 71세를 맞아 화원인 이명기(李命基, 1756~1813 이전)가 제작한 관복본 초상화이다. 강세황의 아들인 강관(姜亻寬, 1743~1824)이 기록한 「계추기사(癸秋記事)」라는 글에는 이 초상화의 제작 경위가 상세하게 담겨 있다. 71세를 맞은 강세황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의 특별한 배려 하에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하였다. 강세황이 아직 초상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정조는 당시 고관들의 초상화를 전담한 화가인 이명기에게 초상화를 제작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명기는 약 10여 일 동안 강세황의 집에 머물며 대본의 관복본, 소본의 시복본(時服本), 그리고 장남인 강인(姜亻寅, 1729~1791)의 관복본 반신상을 포함하여 총 3점의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공정을 마친 이명기는 10량의 사례를 받았다. 이명기는 1791년과 1796년 어진 제작에 주관화사로 참여하였으며 유언호(兪彦鎬, 1730~1796), 채제공(蔡濟恭, 1720~1799) 등 중요 관료들의 초상화를 제작하는 등 정조대 초상화 제작을 주도한 화가였다. 이명기의 초상화는 필선을 생략하고 강한 음영으로 입체감이 두드러진 묘사를 보인다. 그의 화법은 서양화법을 적극 수용하여 조선의 초상화에 적용한 것이다. 강세황의 초상화는 현존하는 이명기의 초상화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초상화로서 그가 이미 입체적인 화법을 능숙하게 구사하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높은 사모과 화려한 운보문(雲寶紋)이 그려진 관복을 차려 입은 강세황은 오른쪽을 바라보는 자세로 교의에 앉아 있다. 교의에는 표피(豹皮)를 덮고 바닥에는 화문석을 깔아 주인공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사모, 관복의 주름, 교의의 둥근 팔걸이 등에서 강한 음영법을 관찰할 수 있다. 안면의 표현 방식을 보면, 배채(背彩) 후에 전면에서 선염(渲染)으로 입체감을 표현하였던 이전 시대의 초상화법과 달리 화면 전면에서 미세한 필법으로 음영과 주름을 표현하였으며 이런 방식으로 인물을 현실감 있게 표현하였다. 가슴에는 당상관의 쌍학흉배(雙鶴胸背)를, 허리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삽금대(鈒金帶)를 착용하였다. 이는 정2품 관료의 표식으로서 1784년 당시 도총관(都摠管)이었던 강세황의 관직에 부합한다. 〈강세황 초상〉에서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표현은 무릎 위에 얹은 오른손이다. 일반적인 관복본 초상화에서는 주인공이 두 손을 공손히 마주 잡는 자세를 취하는 데 비하여 강세황은 오른손을 드러내는 개성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이는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불렸던 강세황의 문인화가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71세 초상화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는 ‘표암 강공 71세진(豹菴姜公七十一歲眞)’이라는 표제를 적었다. 이어서 ‘어제 제문(御製 祭文),’ 즉 정조가 강세황을 추모하기 위하여 내린 시문이 적혀 있다. 이 글을 쓴 인물은 정조대의 명필인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이다. 疎襟雅韻 粗跡雲煙 소탈한 운치와 고상한 풍류. 揮毫萬紙 內屛宮牋 만장의 종이에 붓을 휘둘러 궁중의 병풍과 글씨를 남겼네. 卿官不冷 三絶則虔 그대의 벼슬은 낮지 않았으며 삼절의 예술은 정건(鄭虔)과 같았다. 北槎華國 西樓踵先 중국에 사행 가 나라를 빛냈고 기로소에 들어 선대의 행적을 이었다. 才難之思 薄爵是宣 다시 이런 재주를 얻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에 초라한 술잔을 베푸노라. 정조는 강세황의 성품, 재능, 관직과 활약 등을 차례로 언급하여 시서화에 뛰어났던 신하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이처럼 이명기의 사실적인 화법에 신하를 기리는 정조의 어제가 더해진 〈강세황 초상〉은 18세기 후반 관료 초상화가 지닌 함의를 대변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글: 이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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