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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 태조릉숭선전비(駕洛國 太祖陵崇善殿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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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숭선전은 가락국(駕洛國)의 김수로왕(金首露王)과 왕비 허씨(許氏)의 신위(神位)를 봉안하고 제사를 받드는 곳이다. 1792년(정조 16)에 전교를 내려 축문(祝文)은 왕의 명의로 고하고 육품(六稟)은 예조에서 마련하도록 하였다. 해마다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지금도 숭선전에서 대제를 지낸다.숭선전비(崇善殿碑)에는 김수로왕이 금합(金盒)에서 태어난 일부터 시작하여 분산(盆山)의 남쪽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국호(國號)를 ‘대가락(大駕洛)’이라고 한 일, 왕비 허씨와의 성혼, 가락국이 국토를 확장하며 흥왕했던 일과 나라가 망하게 된 일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또 왕비 허씨에 관한 별도의 내용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비문은 허전(許傳)이 짓고, 조제화(趙濟華)가 글씨를 썼으며, 김현연(金顯溎)이 전액(篆額)하였다.현재 탁본은 성균관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시기는 1980년대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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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효경
가락국태조릉숭선전비(駕洛國太祖陵崇善殿碑)
후손(後孫)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행 이조판서 겸 지경연 춘추관 의금부사 동지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오위도총부도총관 경연일강관(行吏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義禁府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經筵日講官)인 공암(孔巖)의 허전(許傳)은 삼가 비문(碑文)을 짓고, 외가(外家)의 후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춘추관 성균관 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經筵春秋館成均館義禁府事)인 한양(漢陽)의 조제화(趙濟華)는 삼가 글씨를 쓰고, 후손으로 장사랑(將士郞) 숭선전 참봉(崇善殿參奉)인 김해(金海)의 김현연(金顯溎)은 삼가 전액(篆額)을 하다.
아! 이에 옛날을 상고해보건대, 가락국(駕洛國)의 시조(始祖)인 왕(王)의 성(姓)은 김씨(金氏)이고, 휘(諱)는 수로(首露)이다. 처음 탄생할 때에 금합(金盒)에서 태어나는 상서로운 일이 있었기 때문에 김성(金姓)이라고 하였다. 또는 소호(小昊) 김천씨(金天氏)의 후손이기 때문에 김씨(金氏)라고 한다. 또 말하기를, 맨 먼저 세상에 나와서 백성들의 조상이 되었기 때문에 ‘수로(首露)’로 왕호(王號)를 삼았다고 한다.
왕은 동한(東漢) 광무황제(光武皇帝) 건무(建武) 8년(서기 32년) 3월 3일에 태어났으며, 날이 갈수록 숙성(熟成)하여 겨우 10살이 되어서는 슬기롭고 용맹하여 그 지혜가 신(神)과 같았다. 9부(部)의 9간(干) 등이 추대(推戴)하여 왕으로 세우니 분산(盆山)의 남쪽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국호(國號)를 ‘대가락(大駕洛)’이라고 하였다. 건무 18년 임인년(서기 42년) 3월 보름에 왕이 대위(大位)에 올라 세상을 개벽(開闢)하고 만물(萬物)을 뜻을 통하여 천하(天下)의 일을 완수하니, 세속(世俗)은 이로 인해 순박해지고 다스림은 오히려 두텁게 교화(敎化)되었다.
왕후(王后)를 맞이함으로써 혼인(婚姻)의 예(禮)를 바로 잡고, 다섯 명의 아우를 봉(封)함으로써 근본과 곁가지의 구분을 밝혔으며, 9경(卿)을 세움으로써 관직(官職)의 제도를 정하고, 태자(太子)를 세움으로써 적자(嫡子)가 계통(系統)을 이어받는 중대함을 엄격하게 하였다. 인의(仁義)를 숭상하고 겸양(謙讓)을 일으키며, 부모 없는 아이와 자식 없는 노인을 보살피고 홀아비와 과부를 가엽게 여겼다.
백제(百濟)가 기씨(箕氏)를 멸망시키니 죄를 묻는 군대를 일으켰고, 왜적(倭賊)이 사라국(斯羅國)을 침벌(侵伐)하니 군대를 물리도록 하는 글을 내려 보냈다. 이에 신비한 교화가 흘러넘치고 위엄 있는 덕화(德化)가 먼 지역에까지 미치어 문득 변한(弁韓)의 옛 땅을 소유하였고 마한(馬韓) 54국(國)이 모두 가락국의 영역 안으로 들어왔으며, 산 남쪽의 여러 작은 나라들이 와서 조빙(朝聘)하고 왕을 높여 ‘태왕원군(太王元君)’으로 삼았으니, 성대하도다!
환제(桓帝) 연희(延熙) 임인년(서기 162년)에 왕의 나이가 121살이었는데 스스로 부지런히 일하는데 지쳤다라고 생각하여 흔연히 황제(皇帝)가 신선(神仙)이 된 것을 그리워하여 태자 거등(居登)에게 왕위(王位)를 전하고, 별궁(別宮)을 지품천(知品川)의 방장산(方丈山) 안에 짓고 태후와 함께 옮겨 살면서 수련(修鍊)하였다. 왕은 스스로 자신의 호칭을 ‘진주황태왕(晉州皇太王)’이라 하고, 왕후의 호칭을 ‘진주황태후(晉州皇太后)’라고 하며, 산의 호칭은 ‘태왕산(太王山)’이라고 하고, 궁(宮)의 호칭을 ‘태왕궁(太王宮)’이라고 하였다.
38년이 지난 기묘년(서기 199년) 3월 23일에 훙서(薨逝)하니, 헌제(獻帝) 건안(建安) 4년이다. 향년(享年)은 168세였는데, 왕위에 있은 지 120년이었으며 황태왕위(皇太王位)에 있은 지 38년이었다. 구지봉(龜旨峯) 남쪽의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葬事)를 치렀다.
태자가 비로소 즉위(卽位)하니, 참으로 이 사람이 도왕(道王)이다. 도왕이 훙서하니, 아들 성왕(成王) 마품(麻品)을 세웠다. 성왕이 훙서하니, 아들 덕왕(德王) 거질미(居叱彌)를 세웠다. 덕왕이 훙서하니, 명왕(明王) 이시품(伊尸品)을 세웠다. 명왕이 훙서하니, 아들 신왕(神王) 좌지(坐知)를 세웠다. 신왕이 훙서하니, 아들 혜왕(惠王) 취희(吹希)를 세웠다. 혜왕이 훙서하니, 아들 장왕(莊王) 질지(銍知)를 세웠다. 장왕이 훙서하니, 숙왕(肅王) 겸지(鉗知)를 세웠다. 숙왕이 훙서하니, 아들 양왕(讓王) 구형(仇衡)을 세웠다.
신라(新羅)가 강성해져서 자주 침벌하여 백성들이 사망하였다. 양왕이 말하기를, “내가 사람을 기르기 위한 토지로써 사람을 해치고 싶지가 않다. 그리고 종사(宗社)가 나로부터 끊어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하고, 왕제(王弟) 구해(仇亥)에게 왕위를 양위(讓位)하였다. 그리고 태자와 비빈(妃嬪)을 거느리고 제기(祭器)와 문물(文物)을 가지고 방장산 안의 태왕궁으로 은둔(隱遁)하였다.
구해가 신라에 항복하니 신라가 구해를 ‘금관국주(金官國主)’로 봉하였으며, 뒤에 대각간(大角干)을 제수(除授)하고 그 지역을 금관군(金官郡)으로 삼았다. 모두 10대(代)에 걸쳐 열한 명의 왕이 재위하였으며, 나라가 유지된 햇수가 491년이다.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가락의 태조(太祖)는 백성의 시조로서 왕이 혼돈한 세상을 개벽하고 산과 바닷가에 근거할 터를 잡았다. 이에 허 황후(許皇后)와 함께 나라를 세워 후손에게 전해주니 신묘한 덕화와 위대한 공적(功績)이 영원히 빛났다. 이제 그 두 분의 능(陵)이 모두 옛 도읍에 있으니 잡초에 뒤덮이고 제사가 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하고, 주간(州干)이 수리하고 전답(田畓) 20경(頃)을 주어서 제사를 지내는 비용에 충당하라고 명하였다. 문무왕(文武王)이 이르기를, “짐은 수로왕(首露王)의 외가 후손이다.”하고, 관원을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고 다시 두 분의 능을 수리하게 하였다.
고려(高麗) 문종(文宗)이 수로왕이 즉위한 임인년(문종 12, 1062년) 옛 갑자(甲子)를 만나 지금주사(知金州事) 김양일(金良鎰)에게 능원(陵園)을 수리하고 제사를 갖추라고 특별히 명한 일이 모두 김양일이 지은 비문에 실려 있는데, 비문은 아직까지 남아 있으나 비석은 마모(磨耗)되었으니 애석하다.
왕조(王朝)가 바뀌고 난 뒤에 전례(典禮)를 거행할 겨를이 없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신성한 임금을 감히 제사지내지 않을 수 없다.’라 하고서 매년 동짓날에 제사를 지내고 중단하지 않았다. 후손인 의성현령(義城縣令) 김계금(金係錦)과 문민공(文愍公) 김일손(金馹孫)이 이 땅에 거주하면서 서로 더불어 옛 조상을 추모하고 근본을 보답하는 도리(道理)에 정성을 다하였다.
만력(萬曆) 8년 경진년(선조 13, 1580년)에 우리 10대조(代祖) 김엽(金曄)이 두 능를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제사지내는 의식을 갖추었다. 그로부터 13년 뒤인 임진년(선조 25, 1592년)에 왜구(倭寇)가 왕릉(王陵)을 파헤치자 신병(神兵)이 일어나서 무찔렀으며, 직장(直長) 허경윤(許景胤)이 고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봉분(封墳)을 쌓았다. 그로부터 53년 뒤인 을유년(인조 23, 1645년)에 영상(領相) 허적(許積)이 도백(道伯)으로 있을 때에 능침(陵寢)을 더 크게 늘려 수리하고 비석을 세웠는데, 비문은 우의정(右議政) 허목(許穆)이 지었다.
우리 영종 대왕(英宗大王) 을축년(영조 21, 1745년)에 이르러 명하시기를, “수로왕의 능과 허 왕후의 능에 제사를 일체 거행하라.”하였다. 정종 대왕(正宗大王) 임자년(정조 16, 1792년)에 각신(閣臣) 이만수(李晩秀)를 보내어 두 능에 함께 제사지내는 의식을 봉심(奉審)하게 하고, 치제문(致祭文)을 직접 지었다. 제문(祭文)에 이르기를, “성왕(聖王)께서 세상을 개벽하시니 하늘만이 그의 짝이 되었다. 우리의 첫 제사를 흠향(歆饗)하시어 우리에게 안락하고 화목한 복(福)을 주셨다.”운운(云云)하고, 이로 인하여 항상 제사할 때의 축문(祝文)으로 삼도록 하고, 토지를 하사(下賜)하고 희생(犧牲)을 주어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지금 우리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성상(統天隆運肇極敦倫聖上) 15년 무인년(고종 15, 1878년)에 내가 상소(上疏)하여 요청한 일로 인하여 묘당(廟堂)에서 품정(稟定)하라고 명하였는데,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이 “동경(東京 경주)의 숭덕전(崇德殿) 전례(前例)에 따라서 거행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성상께서 윤허(允許)하셨다. 이에 침묘(寢廟)를 개축(改築)하고, 전호(殿號)를 ‘숭선전(崇善殿)’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옛 전례(典例)와 같이 함께 제사하고, 침낭(寢郎)을 두어 후손 중에서 김씨(金氏)와 허씨(許氏) 두 성씨(姓氏)를 번갈아 제수하여 받들어 지키게 하였으니, 성조(聖朝)께서 융성하게 보답한 의리(義理)를 실천한 덕(德)이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두텁다고 하겠다.
태후(太后)의 성은 허씨(許氏)이고 이름은 황옥(皇玉)인데, 대체로 아유타국(阿隃陀國) 임금의 딸이라고도 하고 남천축국(南天竺國) 임금의 딸이라고도 하며 서역허국(西域許國) 임금의 딸이라고도 한다. 또한 허황국(許黃國)은 우리나라 밖에 있는 다른 나라라고 하여 보첩(譜牒)과『금관고사(金官古事)』,『동사강목(東史綱目)』 등의 책에 섞여 나오는 것이 동일하지가 않다.
가락왕(駕洛王) 7년 무신년(서기 48년)에 태후가 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니 왕이 휘장(揮帳) 친 전각(殿閣)을 설치하고 맞이하였다. 태후가 스스로 말하기를, “첩(妾)은 아유타국 임금의 공주이며 나이는 16살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꿈에 상제(上帝)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락원군(駕洛元君)이 아직 배필(配匹)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왕의 딸을 보내서 태후가 되게 하라고 하였으니, 너는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석탑(石塔)을 배에 싣고서 바람과 파도를 잠재웠기 때문에 첩이 여기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마침내 그를 세워서 태후로 삼았다.
황옥부인(皇玉夫人)을 ‘진주태후(晉州太后)’라고도 한다. 태후는 건무 계사년(서기 33년)에 태어나서 건안 기묘년(서기 199년) 3월 초하루에 훙서하니, 향년은 167세였다. 왕릉(王陵)에서 서북쪽으로 1리(里)되는 곳에 장례(葬禮)를 치렀는데 자좌(子坐)의 방향에 가깝다.
태후는 아들 열 명을 낳았는데, 태후가 훙서할 때가 되어 왕에게 청하기를, “첩은 동쪽 나라에 있어서는 손님입니다. 첩이 죽고 나면 첩의 성씨가 전해지지 않을 것을 서글픕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 말에 느낀 바가 있어서 두 아들에게 허씨 성을 주었다. 후세(後世)에 각각 봉지(封地)를 받은 곳과 거처하는 고을로 관향(貫鄕)을 삼아 김해(金海), 공암(孔巖), 하양(河陽), 태인(泰仁), 한산(漢山)의 구별이 있게 되었다.
성상(聖上)께서 즉위하신 지 21년째인 갑신년(고종 21, 1884년) 10월 8일에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