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 영의정 김육(金堉)의 대동균역(大同均役)한 일을 만세토록 잊지 않기 위해 세운 비
호서 선혜 비 (湖西宣患碑)
토지를 고르게 나누어 주고 부세(賦銳)를 내게 하는 것은 삼대(三代)
2로부터 크게 갖추어졌으니 구일(九一)의 법
3이나 십일(仕一)의 법
4은 실로 왕정의 커다란 일이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세상이 쇠퇴하면서 탐욕스럽게 마구 거두어들이는 자가 나타나 백성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게 되었다. 진(素)나라에 이르러 정전(井田)이 없어지고 천맥(阡陌)
5이 열리며 겸병(兼井)
6의 폐단이 극에 이르게 되었으니 어찌 선왕(先王)의 은혜를 내리는 도리를 또한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는 산과 바다 사이에 끼어있어 땅은 협애(滅陰)하며, 방리(方里)의 제도는 이전에는 시행하여 사용한 바가 없었다는 것을 성인이 평양 한 지역에 베푼 훌륭한 법에서 대략 볼 수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그 제도가 쇠퇴해지니 천년이 지나자 백성들이 날로 곤궁해졌다. 처음 토지에 조세를 부과할 때 그 소출에 따랐는데 뭇[束(속)]이 열이면 한 짐[負(부)]이라 하고, 짐이 백이면 한 결(結)이라 하였다. 결의 수를 헤아려 쌀과 베[布(포)]를 내어 공가(公家)의 지출에 이용하니 이로 인해 거두는 것이 갑작스럽게 많지 않았고 사용하는 것이 절제가 있어 조철(助微)
7의 대체적인 뜻에 어긋나지 않았다. 오로지 토지에서 바치는 공물(貢物)은 일체 쌀과 베로 징수할 때는 국가에서 사용하는 모든 물자의 대가와 제종(蹄踵)
8 ․ 문호(門戶)
9의 비용까지 계산하여 받아가서 당초에 책정한 액수보다 몇 갑절이 넘는 부담을 지게됨으로써 백성의 고통은 더욱 심해갔다. 지난 만력(萬曆) 무신년(1608: 선조 41)에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문충공(文忠公)이 처음으로 기보(織輪)
10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기보의 백성들이 되살아났다. 그 20년 뒤인 정묘년(1627, 인조 5)에 길천군(吉川君) 권반(權勝)이 호서관찰사(湖西觀察使)가 되었는데, 호서의 백성들은 기보의 제도를 매우 바라고 있었다. 권공은 이에 완평군(完平君)의 취지에 따라 도 전체의 토지세와 부역의 실태를 조사하고 이에 납세액을 조정하여 일원화시키는 계획을 세워 놓았으나 실시하지는 못하고 장부만 정리해 두었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무인년(1638: 인조 16)에 김 상국(相國)
11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그 장부를 꺼내어 보고 “백성을 살릴 방법이 다른 데 있지 않다”고 탄식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연구하여 잠자는 것과 먹는 일까지 잊어가면서 이 법을 실시하기 위한 세밀한 계획안을 마련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다시 조정으로 들어갔는데, 얼마 안 되어 지금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신 뒤에 임금의 은혜가 더욱 두터워져서 정석(鼎席)
12에 올랐다. 공은 정사를 논의하는 여가에 먼저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임금께서는 이 정책에 대한 이해관계를 밝게 통찰하시어 모든 실시 계획을 공에게 일임하였다. 그 관서를 대동청(大同廳)이라 하였으며 연성군(延城君) 이시방(李時味)도 이 사무에 참여하였다. 그 제도의 내용은 한 도의 전안(田案)을 모두 헤아려 계산하는데, 각 군의 대소를 막론하고
13 오직 토지의 실결수(實結數)
14에 따라 한 결에 대하여 쌀 열 말씩을 징수하여 배를 이용하여 강으로 수송하는데 산간벽지와 먼 바다의 오지지역에서는 쌀에 준하는 만큼 베로 징수하여 모두 서울에 수송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품이나 종묘와 사직의 제사, 빈객 접대 등에 쓰이는 갖가지 것을 비롯하여 말먹이 여물, 땔감 같은 세세한 것까지도 모두 이것을 가지고 구매하여 충당하게 되었다. 이에 각 고을에서는 넓고 좁은 차이에 따라 부과액이 느슨하거나 죄어지지 않았고, 아전들은 수납할 때 많게 하거나 적게 할 수 없었고, 건몰(乾沒)
15할 수도 없었다. 부세를 바꾸는 일이 없어서 일정한 액수를 내게 되니 백성들이 편안히 땅에서 농사에 힘쓰게 되었으며, 봄, 가을 두 철에 바칠 것만 바치고 나면 여가에 늙은이를 봉양하고 어린 아이를 기르며 즐겁게 지내게 되었으며 시골 마을에는 ‘성치(聖治)’라는 노래 소리가 퍼졌다. 대동법을 행한지 9년이 되자 백성들이 생각하기에 “무릇 문충공의 은혜는 널리 펴지지 못했고 길천공은 계획만 세우고 미쳐 실시하지 못하였으나 김 상국과 이 판서가 전력을 기울여 마침내 위대한 업적을 세웠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와 비난이 있었으나 조금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더욱 치밀한 계획과 확고한 신념으로 백성들의 시급한 고통을 풀어주고 한 지역의 안정된 정책을 수립하였다. 조정에서 바야흐로 미루어 호남지역에까지 행하려하니 그 이익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으므로 자주 상국의 백성에 대한 권위와 덕망이 성하였음을 감탄하였다. 오호라! 상국의 인민에게 마음을 두는 정치와 성상의 널리 은혜를 펴려는 생각이 위아래에서 서로 맞아 대동법의 시행에 이르렀으니 상국께서 성상을 만난 것은 천년에 한 번 있을 만한 것이다. 예전에 관양후(官陽候) 두예(杜預)가 부평하(富平河)에 다리를 세울 것을 청하였는데 여러 신하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였다. 하지만 다리가 만들어져 무제(武帝)가 술잔을 들어 두예의 술잔과 부딪히자 두예가 말하기를 “만약 폐하의 밝음이 아니었다면 신은 그것을 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였고, 후세에 그것을 두예의 공적이라 칭송하지 않고 그 아름다움을 ▨▨에게 돌렸다. 대동법은 실로 백성들에게 큰 공헌이니 어찌 하나의 하천에 다리를 세워 지나는 길손들을
건너게 한 것에 비견될 뿐인가. 비록 그러하나 임금은 하늘이니 하늘의 넓고도 큰 덕을 형용할 수 없다. 다만 풍비(豊碑)
16를 길가에 세워 상국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자 하니 이것은 호서 백성들의 뜻이라. 김 상국의 이름은 육(增), 자는 백후(伯厚)이며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재상이 되어 오직 나라를 근심하며 공사(公事)를 받드는 일로 임무를 삼았다.
가선대부 전임 홍문관 부제학(壽善大夫 ․ 前任弘文館副提學) 이민구(李敏求)가 짓고,
숭정대부(崇政大夫) 행 의정부 우참찬(行議政府右參贊) 오준(吳竣)이 쓰다.
순치(順治)
17 16년 (1659) 4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