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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 태조릉숭선전비(駕洛國 太祖陵崇善殿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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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숭선전은 가락국(駕洛國)의 김수로왕(金首露王)과 왕비 허씨(許氏)의 신위(神位)를 봉안하고 제사를 받드는 곳이다. 1792년(정조 16)에 전교를 내려 축문(祝文)은 왕의 명의로 고하고 육품(六稟)은 예조에서 마련하도록 하였다. 해마다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지금도 숭선전에서 대제를 지낸다.숭선전비(崇善殿碑)에는 김수로왕이 금합(金盒)에서 태어난 일부터 시작하여 분산(盆山)의 남쪽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국호(國號)를 ‘대가락(大駕洛)’이라고 한 일, 왕비 허씨와의 성혼, 가락국이 국토를 확장하며 흥왕했던 일과 나라가 망하게 된 일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또 왕비 허씨에 관한 별도의 내용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비문은 허전(許傳)이 짓고, 조제화(趙濟華)가 글씨를 썼으며, 김현연(金顯溎)이 전액(篆額)하였다.현재 탁본은 성균관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시기는 1980년대로 추정된다.
駕洛國太祖陵崇善殿의 碑
後裔 正憲大夫 行吏曹判書 兼知經筵 春秋館 義禁府事 同知成均館事 弘文館提學 藝文館提學 五衛都 摠府都摠管 經筵日 講官 孔巖(陽川) 許傳 삼가 撰함
外裔 嘉善大夫 吏曹參判 兼同知經筵 春秋館 成均館 義禁府事 漢陽 趙濟華 삼가 씀
後裔 將仕郞 崇善殿參奉 金海 金顯溎 삼가 篆함
옛일을 상고하건데 駕洛 始祖王의 姓은 金氏이요 諱는 首露이니 탄생하신 처음에 金의 상서로움이 있었기 때문에 金을 姓으로 하였으며,혹은 少昊 金天氏의 후예이므로 金氏라 하였다고도 하고 또는 처음 出生하여 生民의 先祖가 되었기 때문에 首露로서 王號를 삼았다고도 한다。王이 東漢의 光武皇帝 建武八年(西紀 三二年) 三月 三日에 탄강하여 나날이 장성하였고 겨우 十歲에 睿聖仁勇(뛰어나고 賢明하며 어질고 勇氣가 있음)하고 그 知覺이 神과 같으므로 九部의 九干(村長)들이 추대하여 왕으로 삼아 세웠다。盆山의 陽地에 都邑을 定하고 國號를 大駕洛이라고 定하니 建武十八年 壬寅(西紀四二年) 三月 十五日이었다。王은 이미 大位에 올라 거친것을 깨트리고 國土를 개척하며, 터득하지 못함을 개발하고 성취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니 풍속은 크게 순박하고 政治는 맑고 깨끗함을 숭상하였다。王后를 초빙하여 婚姻의 禮를 바르게 하고 다섯 아우를 冊封하여 本支의 區分을 分明히 하고 九卿을 세워 官職이 制度를 定하며, 太子를 세워 嫡統의 重함을 엄하게 하며 仁義를 숭상하고 禮樂을 흥왕하게 하였고, 孤獨한 이를 불쌍히 여기며, 늙고 아내나 남편이 없는 이를 불쌍히 여겼다。百濟가 箕氏(馬韓)을 학멸함에 罪를 문책하는 군사를 일으켰고, 退兵하라는 書信을 내렸었다。이에 슬기로운 德化는 넘쳐 흘렀고 威德은 멀리 퍼졌으니, 弁韓의 옛 땅을 전부 차지하고, 馬韓의 五十四國이 모두 版圖에 들어오니 山南의 여러 작은 나라가 다 朝賀해 와서 王을 높여 太王元君이라 하였으니 盛하도다。桓帝의 延熹五年壬寅(西紀一六二年)에 王의 春秋 一百二十一歲이므로 스스로 政務에 맥이 풀리어 黃帝가 神仙지경에 올랐음을 기꺼히 추모하여, 太子 居登에게 王位를 전하고 別宮을 知品川(山淸郡)의 方丈山(智異山)속에 건축토록 하여 太后와 함께 移居하고 修練하니 王은 스스로 普州皇太王이라 하며, 王后는 普州皇太后라 하며, 山을 太王山이라 하고 別宮은 太王宮이라 하였다。그 후 三十八年 己卯(西紀一九九年)三月 二十三日 蒙御하니 곧 獻帝의 建安四年이다。享年이 一百六十八歲요 王位에 계심이 百二十年, 皇太王位에 계심이 三十八年이였다。龜旨峰 南쪽의 子坐언덕에 장사지냈다.
太子가 비로소 卽位하니 이를 道王이라 하였고 훙어하심에, 王子 成王 麻品이 卽位하고 훙어하심에, 王子 德王 居叱彌가 卽位하고 훙어하심에, 王子 明王 伊尸品이 卽位하고 흥하심에, 王子 神王 坐知가 卽位하고 훙어하심에, 王子 惠王 吹希가 卽位하고 훙어하심에, 王子 莊王 銍知가 卽位하고 훙어하심에, 王子 肅王 鉗知가 卽位하고 훙어하심에, 王子 讓王 仇衡이 卽位하자 新羅가 강성하여 자주 침범하므로 백성들이 많이 죽었다。讓王이 말씀하기를『나는 사람을 양성하는 사람으로서 백성을 해치고자 아니하며, 또 宗廟 社稷이 나로부터 없어짐을 차마 볼 수 없도다』하고, 王弟 仇亥에게 王位를 물려주고 太子와 妃嬪을 거느리고 祭器와 文物을 안고 方丈山의 太王宮에 은거하였다。仇亥王은 新羅에 降服하니 新羅가 金官國王으로 封하였다 뒤에 大角干을 배수하고 그 지역으로써 金官郡을 삼으니 무릇 十世 十一王에 歷年은 四百九十一年이었다。新羅 眞興王이 詔書에 이르기를『駕洛 太祖는 生民의 첫 임금으로 鴻蒙(天地가 갈리지 아니한 모양)을 개척하고 山海에 웅거하니 이에 許王后께서 오시고 나라를 創立하며 王統을 드리웠으니 神같은 德化와 거룩한 功蹟이 千秋에 빛나고 휘황하였다。지금 두 陵이 모두 옛 都邑에 있으니 草木이 황폐하게 할 수 없으며, 香火도 이어졌다가 끊어졌다가 하므로 州干에게 命하여 닦고 다스리게 하며 밭二十이랑을 주어서 享祀의 需要를 충당하도록 하여라』고 하였으며, 文武王이 말씀하시기를『朕은 首露王의 外裔이다。』하고는 禮官을 파견하여 致祭(제향을 드림)하고 두 陵을 다시 보수하게 하였다.
高麗의 文宗은 首露王의 卽位한 舊甲인 壬寅年을 당하여 특히 知金州事인 金良鎰에게 命하여 陵園을 보수하고 향사를 갖추게 한 일은 모두 良鎰이 지은 바 碑文에 자세히 실려있는데 碑文은 아직 있지마는 碑石은 마멸되고 퇴폐하였으니 가탄스럽다。세대가 바뀐 뒤로 祭禮가 미치지 못하였으니 고을사람이 神聖한 임금은 감히 祭享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每年 冬至날에 俎豆(제사)를 단절하지 않았다。裔孫인 義城縣令 金係錦과 文愍公 金馹孫이 이 고을에 살면서 서로 함께 追遠報本의 道理를 다하였다。萬曆八年庚辰(宣祖十三年, 一五八〇年)에 나의 十世祖인 曄이 慶尙道 觀察使가 되어, 二陵을 크게 補修하고 祭儀를 갖추었으며, 그 후 十三年째인 壬辰(宣祖二五年, 一五九二年)에 倭寇가 王陵을 발굴함에 神兵이 일어나 섬멸했는데 直長 許景胤이 고을사람을 거느리고 봉축했으며, 그 후 五十三年째인 乙酉(仁祖二三年, 一六四五年)에 領議政 許積이 道觀察使가 되었을 때 능침을 더욱 補修하고 碑石을 세웠으니 碑文은 右議政 許穆이 찬술한 것이다。우리 英宗大王(英祖) 乙丑(二一年, 一七四五年)에 이르러 命令하시기를『首露王陵과 許王后陵의 祭享은 함께 거행하라。』고 하시었고, 正宗大王(正祖) 壬子(一六年, 一七九二年)에는 閣臣(奎章閣檢校直閣) 李晩秀를 파견하여 二陵을 봉심케하고 合享하는 儀式으로 親히 致祭文을 지었으니, 말씀하시기를『聖君이 나라를 창업하심에 하늘이 배필을 정해주셨다。나의 肇禋(처음으로 드리는 제사)을 향하옵시고 내 백성을 복되게 하소서』하므로 인해서 常享의 祝文을 삼았으며, 位土田을 내려주고 牲牢(제사에 바치는 짐승)를 시정하여 春秋로 享祀를 받들게 하였다。우리 統天隆運 肇極敦倫(高宗의 尊號) 聖上 十五年戊寅(西紀一八八七年)에 傳(撰者)이 上疏올려 陳乞함으로 말미암아 朝廷으로 하여금 禀定토록 하였다。領議政 李最應이 議政府의 협의로 아뢰기를『마땅히 慶州 崇德殿의 成規에 의거할 일입니다。』고 하니 王은 이를 允許하셨다。이에 寢廟를 개축하고 殿號를 崇善殿이라 賜額하며 옛날의 祭禮와 같이 合享하며 寢郞(參奉)을 두되 後孫中에서 金·許 兩 姓에서 교대로 추천하여 제수받아 수호를 받들게 하였으니 어진 朝廷에서 崇高하고 報本하신 뜻의 德은 하늘같이 높고 땅같이 두텁도다.
太后의 姓은 許氏요, 이름은 皇玉이시니 대개 이르기를 阿踰陀國 임금의 따님이라 하고 或은 南天竺國 임금의 따님이라고도 하며, 或은 西域 許國 임금의 따님이라 하는데 或은 許黃國이라고도 하니 方外의 別國은 譜牒 및 金官古事 東史綱目 등 書籍에서 여러모로 나오니 一致하지를 않다。駕洛王 戊辰(西記四八年)에 王后께서 큰 배를 타고 바다에 떠서 오심에 王은 幔殿을 설치하고 이를 맞이하였다。스스로 말씀하시기를『저는 阿踰陀國 임금의 公主입니다。나이는 지금 十六歲입니다』父王이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꿈에 上帝가 命令하기를 '駕洛國의 元君은 베필을 정하지 못했으므로 마땅히 王의 딸을 보내어 王后가 되게 하라고 하였으니 너는 그 곳에 갈지어다 하시고, 곧 石塔을 배 위에 실어서 風波를 진압하게 하셨기 때문에 제가 여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고 아뢰니 王은 드디어 冊立하여 王后로 삼았었다。대개 皇玉夫人은 또한 普州太后라고도 한다。王后는 建武癸巳(西紀三三年) 七月 七日에 誕生하여 建安己卯(西紀一九九年)三月一日에 薨御하시니 壽가 百六十七歲이고, 王陵의 西北方 一里의 가까운 곳에 葬하니 역시 子坐이다。王后는 王子 十人을 탄생하였다。王后가 훙어하기 임박하여 王에게 청하기를『저는 東國이 客地이므로 제가 죽은 뒤 姓이 傳하지 못함을 슬퍼합니다。』고 하니 王께서는 그 말씀에 感動하시고 두 王子에게 許氏의 姓을 賜姓하였으니 後世에 각각 受封하는 고을로써 貫籍을 삼았는데, 金海, 孔巖, 河陽, 泰仁, 漢山의 區別이 있다。
上의二十一年甲申(高宗二十一年, 西紀一八八四年) 十月 初八日 세움。
謹按駕洛國記曰漢光武建武十八年壬寅首露王誕降漢獻帝建安四年己卯薨壽一百五十八又曰后生于建武癸巳漢靈帝中平六年己巳薨壽一百五十七且默齋許公積兩陵碑陰記及眉壽記言中說壽處幷與駕洛國記同其他雜出於東國傳記者皆如是今據性齋公傳崇善殿碑文則有曰王誕降于建武八年甫十歲建武十八年九干等推立爲王建安四年薨享年一百六十八后生于建武癸巳薨于建安己卯壽一百六十七竊恐性齋公必無諸說不知之理於何處眞的考證特書加壽十年恨不質問於在世之當日也
삼가 살피건대, 駕洛國記에 이르기를『漢 光武皇帝의 建武十八年壬寅(西紀四二年)에 首露王이 誕降하여, 漢 獻帝 建安四年(西紀一九九年)에 薨御하였으니 壽는 一百五十八歲』라고 하였고, 또한 이르되『王后는 建武 癸巳(西紀三三年)에 誕降하여 漢의 靈帝 中平六年己巳(西紀一九九年) 薨御하였다。』고 하였으며, 默齋 許積公의 兩陵碑陰記 및 眉叟記言의 壽를 말한 곳에는 모두 駕洛國記와 더불어 同一하며 其他 東國傳記에서 雜出한 者도 다 이와 같았는데 지금 性齋 許積公의 崇善殿碑文에 의거하면 말하기를『王은 建武八年(西紀三二年)에 탄강하여 겨우 十歲인 建武十八年(西紀四二年)에 九干등의 추대로 王이 되었으며 建安四年(西紀一九九年)에 훙어하시니 享年 一百六十八歲』라 하였으며,『王后는 建武癸巳(西紀三三年)에 탄강하여 建安己卯(西紀一九九年)에 훙어하시니 壽는 一百六十七歲』라고 하였다。가만히 생각하니 두렵건데 性齋公이 必然 여러가지 說을 알지 못할 이치가 없을 터인데, 어디에서 틀림없이 考證한 것인지? 特히 壽를 十年이나 보태어 쓴 것은 在世할 當日에 질문하지 못하였음을 한탄스러워 하는 바이다。
가락국태조릉숭선전비(駕洛國太祖陵崇善殿碑)
후손(後孫)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행 이조판서 겸 지경연 춘추관 의금부사 동지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오위도총부도총관 경연일강관(行吏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義禁府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經筵日講官)인 공암(孔巖)의 허전(許傳)은 삼가 비문(碑文)을 짓고, 외가(外家)의 후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춘추관 성균관 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經筵春秋館成均館義禁府事)인 한양(漢陽)의 조제화(趙濟華)는 삼가 글씨를 쓰고, 후손으로 장사랑(將士郞) 숭선전 참봉(崇善殿參奉)인 김해(金海)의 김현연(金顯溎)은 삼가 전액(篆額)을 하다.
아! 이에 옛날을 상고해보건대, 가락국(駕洛國)의 시조(始祖)인 왕(王)의 성(姓)은 김씨(金氏)이고, 휘(諱)는 수로(首露)이다. 처음 탄생할 때에 금합(金盒)에서 태어나는 상서로운 일이 있었기 때문에 김성(金姓)이라고 하였다. 또는 소호(小昊) 김천씨(金天氏)의 후손이기 때문에 김씨(金氏)라고 한다. 또 말하기를, 맨 먼저 세상에 나와서 백성들의 조상이 되었기 때문에 ‘수로(首露)’로 왕호(王號)를 삼았다고 한다.
왕은 동한(東漢) 광무황제(光武皇帝) 건무(建武) 8년(서기 32년) 3월 3일에 태어났으며, 날이 갈수록 숙성(熟成)하여 겨우 10살이 되어서는 슬기롭고 용맹하여 그 지혜가 신(神)과 같았다. 9부(部)의 9간(干) 등이 추대(推戴)하여 왕으로 세우니 분산(盆山)의 남쪽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국호(國號)를 ‘대가락(大駕洛)’이라고 하였다. 건무 18년 임인년(서기 42년) 3월 보름에 왕이 대위(大位)에 올라 세상을 개벽(開闢)하고 만물(萬物)을 뜻을 통하여 천하(天下)의 일을 완수하니, 세속(世俗)은 이로 인해 순박해지고 다스림은 오히려 두텁게 교화(敎化)되었다.
왕후(王后)를 맞이함으로써 혼인(婚姻)의 예(禮)를 바로 잡고, 다섯 명의 아우를 봉(封)함으로써 근본과 곁가지의 구분을 밝혔으며, 9경(卿)을 세움으로써 관직(官職)의 제도를 정하고, 태자(太子)를 세움으로써 적자(嫡子)가 계통(系統)을 이어받는 중대함을 엄격하게 하였다. 인의(仁義)를 숭상하고 겸양(謙讓)을 일으키며, 부모 없는 아이와 자식 없는 노인을 보살피고 홀아비와 과부를 가엽게 여겼다.
백제(百濟)가 기씨(箕氏)를 멸망시키니 죄를 묻는 군대를 일으켰고, 왜적(倭賊)이 사라국(斯羅國)을 침벌(侵伐)하니 군대를 물리도록 하는 글을 내려 보냈다. 이에 신비한 교화가 흘러넘치고 위엄 있는 덕화(德化)가 먼 지역에까지 미치어 문득 변한(弁韓)의 옛 땅을 소유하였고 마한(馬韓) 54국(國)이 모두 가락국의 영역 안으로 들어왔으며, 산 남쪽의 여러 작은 나라들이 와서 조빙(朝聘)하고 왕을 높여 ‘태왕원군(太王元君)’으로 삼았으니, 성대하도다!
환제(桓帝) 연희(延熙) 임인년(서기 162년)에 왕의 나이가 121살이었는데 스스로 부지런히 일하는데 지쳤다라고 생각하여 흔연히 황제(皇帝)가 신선(神仙)이 된 것을 그리워하여 태자 거등(居登)에게 왕위(王位)를 전하고, 별궁(別宮)을 지품천(知品川)의 방장산(方丈山) 안에 짓고 태후와 함께 옮겨 살면서 수련(修鍊)하였다. 왕은 스스로 자신의 호칭을 ‘진주황태왕(晉州皇太王)’이라 하고, 왕후의 호칭을 ‘진주황태후(晉州皇太后)’라고 하며, 산의 호칭은 ‘태왕산(太王山)’이라고 하고, 궁(宮)의 호칭을 ‘태왕궁(太王宮)’이라고 하였다.
38년이 지난 기묘년(서기 199년) 3월 23일에 훙서(薨逝)하니, 헌제(獻帝) 건안(建安) 4년이다. 향년(享年)은 168세였는데, 왕위에 있은 지 120년이었으며 황태왕위(皇太王位)에 있은 지 38년이었다. 구지봉(龜旨峯) 남쪽의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葬事)를 치렀다.
태자가 비로소 즉위(卽位)하니, 참으로 이 사람이 도왕(道王)이다. 도왕이 훙서하니, 아들 성왕(成王) 마품(麻品)을 세웠다. 성왕이 훙서하니, 아들 덕왕(德王) 거질미(居叱彌)를 세웠다. 덕왕이 훙서하니, 명왕(明王) 이시품(伊尸品)을 세웠다. 명왕이 훙서하니, 아들 신왕(神王) 좌지(坐知)를 세웠다. 신왕이 훙서하니, 아들 혜왕(惠王) 취희(吹希)를 세웠다. 혜왕이 훙서하니, 아들 장왕(莊王) 질지(銍知)를 세웠다. 장왕이 훙서하니, 숙왕(肅王) 겸지(鉗知)를 세웠다. 숙왕이 훙서하니, 아들 양왕(讓王) 구형(仇衡)을 세웠다.
신라(新羅)가 강성해져서 자주 침벌하여 백성들이 사망하였다. 양왕이 말하기를, “내가 사람을 기르기 위한 토지로써 사람을 해치고 싶지가 않다. 그리고 종사(宗社)가 나로부터 끊어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하고, 왕제(王弟) 구해(仇亥)에게 왕위를 양위(讓位)하였다. 그리고 태자와 비빈(妃嬪)을 거느리고 제기(祭器)와 문물(文物)을 가지고 방장산 안의 태왕궁으로 은둔(隱遁)하였다.
구해가 신라에 항복하니 신라가 구해를 ‘금관국주(金官國主)’로 봉하였으며, 뒤에 대각간(大角干)을 제수(除授)하고 그 지역을 금관군(金官郡)으로 삼았다. 모두 10대(代)에 걸쳐 열한 명의 왕이 재위하였으며, 나라가 유지된 햇수가 491년이다.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가락의 태조(太祖)는 백성의 시조로서 왕이 혼돈한 세상을 개벽하고 산과 바닷가에 근거할 터를 잡았다. 이에 허 황후(許皇后)와 함께 나라를 세워 후손에게 전해주니 신묘한 덕화와 위대한 공적(功績)이 영원히 빛났다. 이제 그 두 분의 능(陵)이 모두 옛 도읍에 있으니 잡초에 뒤덮이고 제사가 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하고, 주간(州干)이 수리하고 전답(田畓) 20경(頃)을 주어서 제사를 지내는 비용에 충당하라고 명하였다. 문무왕(文武王)이 이르기를, “짐은 수로왕(首露王)의 외가 후손이다.”하고, 관원을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고 다시 두 분의 능을 수리하게 하였다.
고려(高麗) 문종(文宗)이 수로왕이 즉위한 임인년(문종 12, 1062년) 옛 갑자(甲子)를 만나 지금주사(知金州事) 김양일(金良鎰)에게 능원(陵園)을 수리하고 제사를 갖추라고 특별히 명한 일이 모두 김양일이 지은 비문에 실려 있는데, 비문은 아직까지 남아 있으나 비석은 마모(磨耗)되었으니 애석하다.
왕조(王朝)가 바뀌고 난 뒤에 전례(典禮)를 거행할 겨를이 없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신성한 임금을 감히 제사지내지 않을 수 없다.’라 하고서 매년 동짓날에 제사를 지내고 중단하지 않았다. 후손인 의성현령(義城縣令) 김계금(金係錦)과 문민공(文愍公) 김일손(金馹孫)이 이 땅에 거주하면서 서로 더불어 옛 조상을 추모하고 근본을 보답하는 도리(道理)에 정성을 다하였다.
만력(萬曆) 8년 경진년(선조 13, 1580년)에 우리 10대조(代祖) 김엽(金曄)이 두 능를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제사지내는 의식을 갖추었다. 그로부터 13년 뒤인 임진년(선조 25, 1592년)에 왜구(倭寇)가 왕릉(王陵)을 파헤치자 신병(神兵)이 일어나서 무찔렀으며, 직장(直長) 허경윤(許景胤)이 고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봉분(封墳)을 쌓았다. 그로부터 53년 뒤인 을유년(인조 23, 1645년)에 영상(領相) 허적(許積)이 도백(道伯)으로 있을 때에 능침(陵寢)을 더 크게 늘려 수리하고 비석을 세웠는데, 비문은 우의정(右議政) 허목(許穆)이 지었다.
우리 영종 대왕(英宗大王) 을축년(영조 21, 1745년)에 이르러 명하시기를, “수로왕의 능과 허 왕후의 능에 제사를 일체 거행하라.”하였다. 정종 대왕(正宗大王) 임자년(정조 16, 1792년)에 각신(閣臣) 이만수(李晩秀)를 보내어 두 능에 함께 제사지내는 의식을 봉심(奉審)하게 하고, 치제문(致祭文)을 직접 지었다. 제문(祭文)에 이르기를, “성왕(聖王)께서 세상을 개벽하시니 하늘만이 그의 짝이 되었다. 우리의 첫 제사를 흠향(歆饗)하시어 우리에게 안락하고 화목한 복(福)을 주셨다.”운운(云云)하고, 이로 인하여 항상 제사할 때의 축문(祝文)으로 삼도록 하고, 토지를 하사(下賜)하고 희생(犧牲)을 주어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지금 우리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성상(統天隆運肇極敦倫聖上) 15년 무인년(고종 15, 1878년)에 내가 상소(上疏)하여 요청한 일로 인하여 묘당(廟堂)에서 품정(稟定)하라고 명하였는데,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이 “동경(東京 경주)의 숭덕전(崇德殿) 전례(前例)에 따라서 거행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성상께서 윤허(允許)하셨다. 이에 침묘(寢廟)를 개축(改築)하고, 전호(殿號)를 ‘숭선전(崇善殿)’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옛 전례(典例)와 같이 함께 제사하고, 침낭(寢郎)을 두어 후손 중에서 김씨(金氏)와 허씨(許氏) 두 성씨(姓氏)를 번갈아 제수하여 받들어 지키게 하였으니, 성조(聖朝)께서 융성하게 보답한 의리(義理)를 실천한 덕(德)이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두텁다고 하겠다.
태후(太后)의 성은 허씨(許氏)이고 이름은 황옥(皇玉)인데, 대체로 아유타국(阿隃陀國) 임금의 딸이라고도 하고 남천축국(南天竺國) 임금의 딸이라고도 하며 서역허국(西域許國) 임금의 딸이라고도 한다. 또한 허황국(許黃國)은 우리나라 밖에 있는 다른 나라라고 하여 보첩(譜牒)과『금관고사(金官古事)』,『동사강목(東史綱目)』 등의 책에 섞여 나오는 것이 동일하지가 않다.
가락왕(駕洛王) 7년 무신년(서기 48년)에 태후가 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니 왕이 휘장(揮帳) 친 전각(殿閣)을 설치하고 맞이하였다. 태후가 스스로 말하기를, “첩(妾)은 아유타국 임금의 공주이며 나이는 16살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꿈에 상제(上帝)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락원군(駕洛元君)이 아직 배필(配匹)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왕의 딸을 보내서 태후가 되게 하라고 하였으니, 너는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석탑(石塔)을 배에 싣고서 바람과 파도를 잠재웠기 때문에 첩이 여기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마침내 그를 세워서 태후로 삼았다.
황옥부인(皇玉夫人)을 ‘진주태후(晉州太后)’라고도 한다. 태후는 건무 계사년(서기 33년)에 태어나서 건안 기묘년(서기 199년) 3월 초하루에 훙서하니, 향년은 167세였다. 왕릉(王陵)에서 서북쪽으로 1리(里)되는 곳에 장례(葬禮)를 치렀는데 자좌(子坐)의 방향에 가깝다.
태후는 아들 열 명을 낳았는데, 태후가 훙서할 때가 되어 왕에게 청하기를, “첩은 동쪽 나라에 있어서는 손님입니다. 첩이 죽고 나면 첩의 성씨가 전해지지 않을 것을 서글픕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 말에 느낀 바가 있어서 두 아들에게 허씨 성을 주었다. 후세(後世)에 각각 봉지(封地)를 받은 곳과 거처하는 고을로 관향(貫鄕)을 삼아 김해(金海), 공암(孔巖), 하양(河陽), 태인(泰仁), 한산(漢山)의 구별이 있게 되었다.
성상(聖上)께서 즉위하신 지 21년째인 갑신년(고종 21, 1884년) 10월 8일에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