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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해사 영파대사비(銀海寺 影波大師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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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는 1816년(순조 16) 경상북도 영천에 건립된 은해사영파대사비(銀海寺影波大師碑)로 남공철(南公轍)이 비문을 지었다.
영파대사(影波大師)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왜적들을 격퇴하였던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7대 의발을 전수받은 승려이다. 영파대사(影波大師)의 법명(法名)은 성규(聖奎)이고 자(字)가 회은(晦隱)이며 속성(俗姓)은 전씨(全氏)이다. 19세에 집을 떠나 용천사(湧泉寺)에 이르러 스스로 오체(五體)를 던져 정성스레 출가(出家)하였다. 해봉(海峰), 연암(燕巖), 용파(龍坡), 영허(影虗) 등 여러 유명한 스님들을 찾아가서 열심히 고생하며 그들의 가르침에서 득력하였으며 홀연히 도를 얻어 돈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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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은해사영파대사비(銀海寺影波大師碑)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선교양종정사(禪敎兩宗正事) 화엄대강주(華嚴大講主) 영파대사(影波大師) 비명(碑銘) 서문을 병기함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겸(兼) 이조판서(吏曹判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경연(知經筵) 춘추관성균관사(春秋館成均館事)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 남공철(南公轍)이 찬술하였고,
봉렬대부(奉列大夫) 행 전생서부봉사(行典牲署副奉事) 심의경(沈宜慶)이 글씨를 썼고,
장사랑(將仕郎)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 유한지(俞漢芝)가 전액(篆額)을 썼다.
우리 동방에 불법(佛法)이 성대하였던 것은 신라와 고려 때로부터이니 이름나고 거대한 사찰들이 여러 도에 즐비하였다. 그런데 본조(조선)에 이르러 유학자들이 출현하여 척불론(斥佛論)이 비로소 성대해 지기 시작하였지만, 스님들 중에서 간간히 대단한 업적을 수립한 자가 있으면 사대부들도 그 공적을 말하고 드러내 칭송하였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과 같은 이가 바로 그 분이시다.
선묘(宣廟) 임진년(선조 25, 1592년)에 왜군이 쳐들어오니 임금의 거가(車駕)가 몽진을 떠나시게 되었다. 바로 이때에 서산대사께서는 분개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담소를 나누듯 순조롭게 그들을 지휘하였고 그의 제자 유정(惟政)을 천거하여 일본(日本)에 사신으로 보내서 화의(和議)가 드디어 이루어지자 사직(社稷)이 그것에 의거해 평안함을 회복하였다. 그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국가를 보호하려는 참된 마음은 진실로 유자들로 하여금 이미 여기저기서 칭찬이 끊이지 않도록 하였다.
그 뒤에 의발(衣鉢)이 전해져 내려가기를 6세가 지난 뒤에 영파대사(影波大師)가 이를 이어 받았다. 은밀히 계주(戒珠)를 이어받고 또 심인(心印)심인(心印) : 불교 선종에서 사용하는 말.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심상으로 인증하여 돈오를 기약하는 것을 말한다.
을 전수받았다. 그는 경을 열심히 외었으며 엄격히 율을 지켰으니 선문(禪門)의 궤범이 될 뿐만 아니라 승도들의 모범이 되었다. 게다가 그는 향촉(香燭)을 공경히 갖추어 놓고 매일 밤 성주(聖主)의 장수를 위하여 부처님께 절하며 빌었는데 늙도록 그만두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이는 만일 군신의 대의가 떳떳한 이치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대사께서는 법명(法名)이 성규(聖奎)이고 자(字)가 회은(晦隱)이며 속성(俗姓)은 전씨(全氏)이다. 고려(高麗) 옥산군(玉山君) 영령(永齡)의 16세 손이었다. 아버지는 만기(萬紀)이고 어머니는 응천(凝川) 박씨(朴氏)이었다. 어머니는 꿈에 큰 별이 품 안으로 들어와서 회임하였으므로, 영묘(英廟) 무신(戊申)년(영조 4, 1728) 11월 11일에 아이를 낳았을 때 태몽(泰夢)이라고 명명(命名)하여 그 기이함을 드러내었다. 대사님은 날 때부터 타고난 기골이 일반 사람들보다 탁월하였다. 나이 15세에 청량암(淸凉菴)에서 독서하였는데 부처님에게 예를 올릴 때 여러 스님들이 둘레를 돌며 절을 올리는 것을 보고 마치 묘한 묵은 인연이 있는 듯이 홀연히 몸을 버리겠다는 원(願)을 내었다. 4년 뒤에 집을 떠나 용천사(湧泉寺) 용천사(湧泉寺) :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 최정산(崔頂山)에 있는 사찰. 신라 문무왕 10년(670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옥천사(玉泉寺)라고 하였다가 고려 원종 2년(1261년)에 보각국존(普覺國尊)이 중건하고 절이름을 용천사로 고쳤다.
에 이르러 스스로 오체(五體)를 던져 정성스레 출가(出家)를 청하니, 부름을 받아 응하였던 장노(長老)가 그를 사랑하여 허락하였다. 그로 하여금 드디어 삭발하게 하고 갑자기 계율(戒律)을 받게 하였다. 이날 밤 꿈에 검은 옷을 입은 늙은 스님이 계단 앞에 서서 경쇠를 울리고 예를 행한 것이 세 번 올리는 것을 보았다. 이때부터 사방으로 멀리 스승을 찾아서 구름 따라 다니며 도를 물었다. 해봉(海峰), 연암(燕巖), 용파(龍坡), 영허(影虗) 등 여러 유명한 스님들을 찾아가서 열심히 고생하며 그들의 가르침에서 득력하였다. 어느 날 홀연히 생각이 떠올라 말하기를, “불가에서 가르침을 펴는 것은 돈오(頓悟) 돈오(頓悟) : 불가의 말로 점수와 대비되는 말로서 불성을 단번에 깨치는 것을 말한다.
를 우선으로 한다.”고 하였다. 마침내 금강대(金剛臺)에 부들을 깔고 성대한 음식을 차려 놓고 도량을 청결히 하고나서 관음(觀音)의 법력(法力)을 우러러 기원하였다. 재를 마친 뒤에 꿈에서 “한 방으로 들어가서 보기를 불서(佛書)가 책꽂이에 가득하고 장황(裝潢)이 선명하고 깨끗하였으니 전부 화엄경(華嚴經)이었다. 곁에 노승(老僧)이 있어서 가리켜 말하기를, ‘도는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9년 뒤에 황산(黃山)에서 물러나 숨은 장노가 한번 만나 마음이 맞자 화엄경 전부를 주었는데 마사장권(摩挲粧卷)으로 과연 전데 꿈과 딱 들어맞았다. 읽으니 이미 익숙하여 오묘한 이치를 탐구하였고 여러 묘한 뜻을 본 지 30년이 지내기를 하루와 같이 하였으니 유가에서의 이른바 진실한 마음으로 각고로 공부한 것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선공부에는 지송(持誦)이 제일이므로 보현(普賢)과 관음(觀音) 두 보살(菩薩)을 원불(願佛)로 삼아서 치재(致齋)하는데 더욱 열심히 하였고 또 무술년으로부터 신축(辛丑)년 대비주(大悲呪)를 외기를 10만 번 하였는데 날마다 과제를 정하였다. 갑술년 이래로 참여한 설파(雪坡)와 ▨月 두 화상(和尙)이 화엄(華嚴)의 종지(宗旨) 와 선교(禪敎) 요령(要領)을 다 터득하고서 신의(信衣)를 받아서 단에 올랐다. 대개 공문(空門)의 연원(淵源)이 이로부터 있었다.
임진년 7월 27일에 작은 병으로 입적하셨으니 연세가 85세였고 승납(僧臘)은 66세였다. 이에 앞서 꿈에서 천구성(天狗星)을 보고. 자기가 장수할 것인지 일찍 죽을 것인지를 자신에게 물으니 답하기를 “이름이 동국에 가득 차서 달하여도 다하지는 못할 것이다. 85세까지 살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이르러 보니 과연 맞아떨어졌다. 화욕(火浴)화욕(火浴): 화장(火葬)을 말한다.
의 저녁에 영험한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상서로운 구름이 허공을 가렸다. 이 때에 의를 사모하는 자는 소리를 내어 조문하였고 업을 받은 사람들은 슬픔을 삼키고 흐느껴 울었으니 이것은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희(噫)라 스님은 품성이 온유하였고 지기가 맑고 밝았으며 희노애락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으며 재화에 대한 욕심이 마음에 없었다. 이 때문에 일찍이 깨끗한 땅에 머물면서 오래도록 객진(客塵)을 떠나서 자애로운 항해에 보배로운 뗏목을 타고 두루 중생(衆生)을 구제하였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이 문에 이르면 진심으로 상심하였고 혹시라도 와서 구걸하는 사람이 있으면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와주었으며 조금이라도 난색을 표시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식객의 신발이 항상 집밖에 가득 찼다.
어렸을 적부터 자기를 단속하기를 매우 엄격히 하여 매일 반드시 옷을 바르게 입고 가부하여 앉아서 게으른 용모를 보이지 않았다. 평생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을 언급하지 않았고 진실로 물러나 겸양하였다. 그 의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서 취하지 않았으니 더욱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서경(西經) 천착(千凿)은 그의 책 상자에 보관되어 있고 동쪽과 남쪽의 명찰에도 그의 족적이 두루 거쳐 갔고 교화 받은 승도와 대중들만도 천만이 될 뿐 아니라 스님의 풍성이 유포되지 않은 곳이 없다. 이와 같은 자는 비록 옛적의 명승이라고 하더라도 더 더할 것이 없다. 앞뒤의 꿈에서 나타난 징조는 자못 기이하고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대사는 필시 허장하게 세상을 속이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여기에서도 대략 썼다. 제자(弟子) 지첨(知添)은 곧 그의 고족이다. 다박머리를 내리고 있을 때부터 늘 그의 문을 들락거렸으므로 보고 느낀 바가 깊었으므로 지금 영원하고 절실하게 옛일을 추모하며 풍비(豐碑)를 세울 것을 모의하여 그가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뽑아서 그의 제자인 몽필(夢弼)과 석민(碩旻) 등을 다리를 싸매고 천리를 달리게 하여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수년을 거치는 동안 더욱 열심히 하였으므로 나는 선가(禪家)의 문자(文字)에 일찍이 자주 쓴 적은 없었지만 서산(西山)과 사명(泗溟)에 대하여 삼가 감동한 바가 있어서 일찍이 찬술한 그들의 비적비를 보존하고 있있다. 대사(大師)는 서산(西山)과 사명(泗溟)에 대하여 적적(嫡傳)이고 또 그 가운데 올곧아 속세와 끊지 않는 점이 있으니 어찌 서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드디어 사양하지 못하고 글을 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이 선백(禪伯)께서는 사문(沙門)의 위대한 분이시니
총령(葱嶺)의 묵은 뿌리 화엄의 묘결이로다.
물 속의 달 마음을 맑히고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안개 정신을 편안케 하는구나.
장자의 나비가 나풀나풀, 환상이 아니면 현실이겠지
은밀히 비밀스러운 심인을 받고서 문득 법단에 올랐구나.
깨끗한 방에서 물처럼 고요하나니 짓는 일이 이처럼 보기를
위로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니 그 둘레 나룻배에 이르렀네.
자비에 일념을 두었을 뿐 스스로 떠벌리지 않네.
자신을 규율하는 엄격함은 우리들 유가들에게 부끄럽지 않네.
인자는 반드시 장수하니 그 이치를 속일 수 없네.
인과(因果)와 방원(方圓) 법동(法棟)이 꺾였구나.
사람은 죽어도 법은 남아서 검은 것과 흰 것은 흥하고 사라지네.
저 산문(山門)을 바라보니 귀두(龜頭)가 열 길이네.
나는 명의 글을 적어서 영원히 기림(祇林)에 드리우리라.
숭정기원후 세 번째 병자년(순조 16, 1816) 6월 일에 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