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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묘갈(李瀷墓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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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이 비는 1763년(영조 39) 경기도 안산에 건립된 이익묘갈(李瀷墓碣)로 채제공(蔡濟共)이 비문을 지었고, 유희강(柳熙綱)이 글씨를 썼다.
이익(李瀷 : 1681~1763년)의 본관은 여주이고, 자는 자신(子新)이며, 호는 성호(星湖)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다. 1681년(숙종 7) 아버지의 유배지인 평양도 운산에서 태어났다. 10세까지는 몸이 약해 학문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으나, 조금 더 자라서 둘째 형인 이잠(李潛)에게서 수학하였다. 이잠(李潛)은 1706년(숙종 32) 장희빈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역적으로 몰려 고문을 당해 옥사하였으며, 이 일 계기로 이익(李瀷)은 과거에 응시할 뜻을 버리고 칩거하여 학문을 닦았다. 1727년(영조 3) 명성이 높아져서 조정에서 선공감가감역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는 않았다.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명성도 높아졌으나, 가세는 쇠락해갔으며, 끝내는 거동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 학문적인 기반은 정통 유학이었으나, 실학적으로 당시 조선의 사회현실에 입각한 사회개편을 주장한 개혁사상의 특징을 띄고 있다. 저서로는 『성호사설』이 전해진다.
현재 탁본은 명지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한 연대는 1980년대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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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영
이익묘갈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행 통정대부 첨지 중추부사 성호 이선생 묘갈명 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찬 함
청전 후인 유희강 서함
선생의 휘는 익이고, 자는 자신이며, 성은 이씨로 광주의 첨성리에 은거하면서 도를 닦았다. 자호를 성호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선생은 태어난 지 두 해만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모부인은 선생이 허약하고 병치레가 많은 것을 걱정하여 일찍부터 스승에게 나아가 배우게 하지 않았다. 조금 자라서는 중형인 섬계공을 좇아 배웠는데, 전심으로 학업에 힘써 총영이 남보다 뛰어났고, 여러 가지 서적들을 박람하였다. 중형이 세화에 걸림에 이르러 공은 출세에 뜻이 없어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서 셋째 형인 옥동공과 종형인 소은공 이공을 좇아 배웠는데, 개연히 구도의 의지를 지니고서 방안에 단정히 앉아 경 · 전 및 송나라의 정자 · 주자와 우리나라 퇴계 등의 서적들을 가져다가 고개 숙여 읽고 고개 들어 사색하면서 칼로 실을 끊듯이 이치를 명확하게 분별하였다.
대체로 그는 입도하는 문턱을 오직 경으로써 주지를 삼았는데, 일찍이, “미발은 정시의 경이요, 이발은 동시의 경이다. 그러나 동시의 경도 단지 정시의 공부를 근본으로 한다. 만약 정시에 경을 주로 삼지 못한다면 동시에 이르러 어떻게 지수하고 득정하겠는가?”라고 하고서「경재잠」및 도 · 설을 지어 동정이 어긋나지 않고, 표리가 서로 올바른 것으로써 경의 절도를 삼았다. 또 후대의 학자들이 간혹 언사나 문구의 말단에만 생각을 집중하고 실체의 공부에 대해서는 대부분 손을 쓰려 들지 않아 항상 성현의 말씀을 배워도 마음에는 반드시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마음으로는 비록 깨닫더라도 몸은 반드시 실행하지 못할 때가 있음을 병 되게 여기고서 요컨대 반드시 자기 몸에 체에는 성찰하고, 참되게 알고, 힘써 행하는 것 등에 대해 쏟은 노력은 편의한 바가 없었던 점이 이와 같았다.
조정에서 그의 명성을 듣고서 선공감 가감역에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미 나이가 지긋해진 후에 첨지중추부사에 제수했으니 그것은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이었다.
아! 선생의 향년은 맹자가 말씀하신 부동심의 나이에 비교하자면 갑절을 보태고도 오히려 남는 수를 누리면서 무릇 성분의 고유한 바에 대해서는 한 가지의 이치라도 궁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직분의 당연한 바에 대해서는 한 가지의 일이라도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행실은 신명에 통할 만 하였는데 그것의 근원은 계구와 근독에서 나왔고, 도는 천인을 꿰뚫을 만 한데 그것의 기본은 자그마한 수양들이 쌓인 데서 비롯되었다. 땅과 바다처럼 범위가 컸고, 잠사와 우모처럼 분수가 세밀하였다. 그로 하여금 세상에서 펴게 하였다면 임금은 요 · 순과 같은 임금이 되고, 백성은 요 · 순 시대의 백성이 되었을 것임을 틀림없는 이치이나 선생은 시운에 막혀 진정한 포부를 열에 한 둘도 시행할 수가 없었고, 후인들이 볼 수 있었던 점은 오직 가행이 예법에 엄격하였다는 것뿐이요,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은 유독 지론이 지상에 실린 것뿐이다. 그의 가행을 말하자면, 매양 선고의 안범을 기억하지 못하는 점을 지극한 슬픔으로 여기고서 얘기가 미칠 때마다 줄줄 눈물을 떨구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노년에 이르렀을 때도 그러하였다. 나중에 선고가 작고했던 해를 당하여 추복하려고 하였다가 곧 이어 “퇴옹도 나처럼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추복을 행하지 않았다. 퇴옹은 나의 스승이니 어찌 감히 그보다 지나치게 행하겠는가?”라고 말하고서 일생을 마칠 때까지 소복을 입은 채 지냈으며, 애모의 태도는 거상할 때와 다름이 없었다. 평소에는 새벽에 일어나 가묘에 배알한 다음, 물러나서 서실에 앉았는데, 옷차림을 반드시 단정히 하였으며 사우들과 상견할 때면 배읍을 반드시 공경히 하면서, “절은 예의 시초가 되는데, 어찌 꺼려하고 안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문인이나 자제로써 사가에 머무르는 자는 들어올 때까지 반드시 절하면서 뵈었고, 나갈 때도 반드시 절하고 하직하였다. 규문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히 처신하여 비록 자손이나 친족이라도 까닭없이 내실에 들어감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항상『주역』의「가인」괘에,『가인이 준엄하면 실수가 없다. 부녀자가 웃고 즐긴다면 가절을 잃는다.』고 한 것을 송독하였다.
형제나 자질에게 사랑을 베풀고 교육을 행함은 한결같이 성심에서 나왔고, 비록 소원한 족인이라도 굶주리면 구제하고, 병들면 약을 보내고 죽으면 부의를 보냈다. 또 혼사에 시기를 놓친 이가 있으면 혼수를 장만해 주어 그들로 하여금 폐륜하지 않게 해주었고, 선영 중에 세대가 오래 되어 제사할 수 없는 곳이 있으면 각기 묘전을 두어 해마다 시월에 제사를 거행하였고, 8세조인 경헌공의 사당을 종자의 집에 창설하여 해마다 종인을 거느리고 한 차례 제사를 지내는 한편 그에 대한 설을 지어 그 일의 뜻을 밝히기를, “국조에 공자와 훈신의 집안 이외에는 종통을 세운다는 문구가 없다. 그래서 서성 · 대족은 산란하여 통속이 없다. 그러나「왕제」를 살펴보면 ‘별자를 시조로 하고, 별자를 계승하면 종통이 된다.’고 하였는데, 주에 ‘비록 별자는 아니지만 처음 작위를 얻은 자도 마찬가지다.’고 했고, 소에 ‘이성으로써 대부가 된 자도 또한 태조가 될 수 있다.’고 했으니 이것은 서성도 종통을 세웠다는 증거가 된다.”고 하였다.
그의 지론을 말하자면 모두가 깊이 통찰하여 자득한 것으로 옛사람들이 발명하지 않은 것을 발명한 것이니, ‘하도’와 ‘낙서’를 논하면서 “하도의 수는 기우로써 ‘서천도’를 삼고, 배합하는 것으로써 ‘후천도’를 삼았으며, 생성하는 것으로써 ‘낙서’를 삼았다. ‘낙서’를 연역하여 ‘홍범’이 지어졌으니 ‘홍범구주’의 두 번째에 해당하는 숙 · 애 · 철 · 모 · 성의 오사가 여덟 번째인 서징에서 상호적으로 나타났고, ‘낙서’에서는 동북의 이와 서남의 팔이 교환된 것이다. 기자가 어찌 우리를 속였겠는가?”라고 하였고, 삼대의 정지에 대해 논하기를, “‘50에서 변하여 70이 되고, 70에서 변하여 100묘가 되었다.’고 함은 마치 경계를 바꾼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선유는 의심을 하였으나 그것을 판단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은 바로 ‘1정은 9전이고, 1전은 4구이며, 1구는 사방 50보이다.’는 전제를 판별함으로써 ‘하대에는 농부 1인이 1구를 받았고, 은대에는 농부 1인이 2구를 늘려 받았으며, 주대에는 농부 1인이 4구로 늘려 받았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하 · 은 · 주를 거치면서 50으로부터 변하여 70 또는 100묘에 이르렀다.’함은 의미가 그런 것이다. 맹자가 어찌 우리를 속였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삼대의 정삭에 대해 논하기를, “개시와 개월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분분하여 절충하기가 어려우나『시경』,『서경』,『주역』을 상고하면 시 · 월을 바꾸지 않은 것이 분명하고,『춘추』,『맹자』및 맹헌자의 말을 상고하면 시 · 월을 바꾼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시 · 월을 바꾼 것은 주나라가 동천한 이후의 잘못이다. 능히 동천이전에 시 · 월을 바꿨다는 글을 얻은 자가 있는가?”라고 하였고,『시경』의 ‘왕풍’에 대해 논하면서, “정 현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모두 ‘주나라가 동천한 뒤로는 왕실이 비약하여 제후들과 비슷하였으므로 아(雅)가 되지 못하고 풍(風)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풍과 아는 각자의 체재가 있고 흥쇠에는 관계되지 않는다. 주나라의 왕업이 한창 융성하던 시기에도 또한 풍이 있었으니 ‘주남’과 ‘소남’의 2남이 그것이고, 제후가 미약하면 시기에도 또한 아가 있었으니 ‘억시’가 그것이다. 왕택이 다하자 변아가 지어졌는데, 평왕이 비록 비약했지만 유독 변아의 끝머리에는 끼일 수 없겠는가? 또 계찰이 주나라를 살필 적에 왕성은 위나라의 아래에 있었으니 대 · 용 · 위 · 왕은 모두 동도였다. 동도는 왕성으로서 천하의 제후들이 천자에게 조회를 하던 곳인데, 나중에는 그곳에 천거하였으며, 무릇 튼 도회지이면 시를 두어 백성들의 풍속을 살피지 않는 곳이 없었으니 동천 이전에는 빈주의 풍이 있고, 동천 이후로는 왕성의 풍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왕풍’이라고 하는 것은 왕성의 풍을 이른 것이지, 주나라의 평왕을 위해 설정한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또 삼경과 사서 및『소학』,『근사록』,『심경』등에 대해서도 글자마다 훈을 찾고, 문구마다 요지를 탐색하여 모두『질서』를 남겼으니 그것은 횡거의 묘계의 뜻을 취한 것이며, 그 순서는『맹자』로부터 시작하면서, “지어진 시기는 후대이나 뜻은 상세하다. 후대이면 내용이 현재와 가깝고, 뜻이 상세하면 의미가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인의 뜻을 구하려면 반드시『맹자』로부터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예제에 대해서는 삼례의『통전』및 역대 제유들의 학설을 널리 통달하여 주자의『가례』를 절충하였으므로 또『가례질서』를 남겼고 「산절관의」,「가취의」,「상위록」,「묘제향사의」등의 여러 편저들에 이르러서는 일가의 법도가 된다. 퇴계를 존모하는데 주자와 다름없이 하였으니 언행으로써 유집에 드러난 것과 문인들이 기록한 것들을『근사록』의 예와 같이 편집하여 이름을『동도록』이라 하였고 또 퇴계가 예제를 논한 글을 취하여 분류· 편찬해서 이름을「이선생예설」이라고 하였으며, 퇴옹 이후의 4 · 7 이기설이 주자가 ‘조심은 의리에서 발하고, 인심은 형기에서 발한다.’고 해명한 것과『주자어류』에 실린 4 · 7 이기설이 서로 어긋나는 점이 있음을 염려하여『사칠신편』을 찬 함으로써 주자의 뜻을 발휘시키는 한편 퇴도의 학설을 우익하였다.
비록 초야에서 지냈지만 당세로써 자신의 근심을 삼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곽우록』,『새설』들을 찬술하였고, 일찍이 슬픈 심정으로 “백세를 지나도록 선정이 없는 것은 3얼 로부터 말미암았다. 구주를 높이고 신하를 억누름은 영정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한나라가 그것을 혁파할 수 없었고, 인재를 등용함에 문벌을 중시함은 위만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진나라가 그것을 혁파할 수 없었으며, 문사로써 과시하는 것은 양광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당나라가 그것을 혁파할 수 없었다. 이상의 삼얼을 제거하지 못하면 족치 정치를 한다고 말 할 수 없으나 세 가지 중에 과거가 더욱 해로운 것이다. 만일 저게 이보다 낫다는 식으로 말하자면, 당나라 때 양 관이 거론했던 효렴과가 제일 근사하고, 우리나라의 조정암 선생이 거론한 현량과가 그 다음이다. 그러나 정암이 이미 성묘에 배향된 후 누구 하나 거론하지 않았는데, 시행된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탄식하였다.
또 우리나라의 사적이 엉성한 것을 염려하고서는 무인 안정복에게 부탁하여 의례를 전수 하므로써 마침내 믿을 만한 역사책 한 질을 완성케 하였으며, 지은 시문과 아울러 찬집한 여러 서적들이 합하면 수백여 권이 된다. 요약하자면 선생은 학문에 있어서는 문사를 버리고 실질에 힘썼고, 예법을 논할 적엔 사치를 버리고 검약함을 따랐으며, 경제에 있어서는 위 사람의 것을 덜어내어 아랫사람에게 보태주는 방식을 취했는데, 이는 모두 근본과 요체를 탐색한 것으로서 각자 조리가 있어 거론하여 시행할 만한 것이니 아! 훌륭하도다.
이씨는 본계가 황려에서 나왔으며, 비조는 고려 때에 인용교위를 지낸 인덕이다 선생의 8세조는 휘가 계손인데, 병조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경헌으로 일찍이 복로의 관찰사로 있으면서 유화를 크게 드러냈으므로 북인들이 사원을 건립하여 선사의 예로써 제사하였다 선생의 증조부는 휘가 상의인데 의정부 좌찬성을 지냈고, 시호는 익헌이며, 실로 목릉 때의 명신이 되었다. 조부는 휘가 지안인데 사헌부 지평을 지냈고, 미수 허 문정공과 더불어 정 총산의 문하에 유학하면서 도의로써 서로 추켜세웠다. 선생의 아버지는 휘가 하진인데,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고, 숙종 때에 청의를 힘껏 주장하여 사류들이 중히 여기는 바가 되었다. 전비인 증정부인은 용인 이씨로 유수를 지낸 후산의 딸이고, 후비인 정부인은 안동권씨로 대후의 딸인데, 선생은 권부인의 소생이다.
선생은 숙종 신유년에 출생하였고, 영종 계미년에 작고하니 향년은 83세이었다. 속광하자마자 즉시 여각의 전을 마련하고, 빈전에는 조석의 궤를 중지하지 않았으며, 염할 때엔 지금과 같이 지서를 사용했고, 명정과 관은 송지를 칠하지 않았는데, 이는 모두 선생이 평소에 정한 바였다. 문하의 제자들은 모두 조복을 입고 가마한 채 일년을 보냈고 족인으로써 단문을 벗어난 관계에 있던 자도 포건과 포대를 둘렀다가 장사지낸 후에 벗었다. 장지는 집의 북쪽 임좌의 언덕에 있다.
선생의 초취는 고령 신씨로 정언을 지낸 필청의 딸인데 후사를 두지 못했고, 재취는 사천 목씨로 천건의 딸이다. 두 부인은 선생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외아들인 맹휴는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은 정랑에 머물렀고, 가학을 능히 전승했으나 일찍 작고하여 끝맺음을 보지 못했으며, 1녀는 위솔 이극성에게 출가하였다. 정랑을 지낸 선생의 아들은 참판 채팽윤의 딸에게 장가들어 외아들 구환을 낳았는데, 그는 성균관 생원이고, 위솔을 지낸 선생의 사위 이극성의 계자는 윤하이다. 선생의 증손· 현손 이하를 기록하지 않는다.
나 제공은 일찍이 기보를 안찰하고 있었는데, 도내의 군현을 시찰할 적에 그 길을 둘러 가서 선생을 첨성리의 집으로 찾아뵈었다. 선생은 그 당시연세가 81세로 협소하고 누추한 집에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눈빛이 뚜렷하여 쏠 듯 하였고, 성긴 수염은 내리 드리워 허리까지 이르렀다. 아직 절도 하기 전에 벌써 숙연히 공경스런 마음을 일으켰고, 조금 후 선생에게 나아가니 온화하고 너그러웠으며, 경전을 담설 할 적에 고금을 통달하여 듣지 못한 바를 듣게 되었다. 적이 세상일이 사람을 바삐 닦달하므로 숭배하는 마음으로써 적막한 물가에서 섬길 수 없음을 스스로 한스럽게 여겼었다.
그로부터 삼기가 지난 지금에 이르러 선생의 종손인 처사군 삼환이 가장을 지니고 와서 나 제공에게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나 제공은 그저 나이만 들었을 따름인데, 어찌 도를 지닌 기상을 형용할 수 있겠는가? 다만 생각건대 우리의 도는 자연히 통서가 있었으니, 퇴계는 우리나라의 부자로써 그 도를 한강에 전했고, 한강은 그 도를 미수에게 전했으며, 선생은 미수를 사숙하였으니 미수에게 배워서 퇴계의 통서에 접한 것이다. 후세의 학자들은 사문이 적전으로 서로 계승되어 의심할 것이 없다는 점을 안 후라야 거의 취향에 미혹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글로써 선생을 명하면 되겠는가?”하니 처사군은 “그 말이 긴요하면서 번거롭지 않으니 선생을 제대로 알았다.”고 하기에 드디어 옷깃을 다듬고서 글을 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도를 품고서도 은택을 베풀 수 없었음은 일세의 불행이었도다.
책을 저술한 것은 또한 족히 아름다운 은혜가 되니 백세의 행운이로다.
하늘의 뜻은 이 점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일세는 짧고 백세는 길도다. 선생의 명을 지어 오당을 전면하노라.
어찌 더불어 선생의 글을 읽지 않으리오?
전통서를 전함은 자기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남으로 말미암는 것이겠는가?
공이 작고한 지 20□년 후인 정미년 공력 1967년 5월 □일 추모회 삼가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