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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권필 유허비(石洲權韠 遺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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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이 비는 1739년(영조 15) 인천시 강화도에 건립된 권필유허비(權韠遺墟碑)로 권적(權樀)이 비문을 짓고, 아울러 글씨도 썼다.
권필(權韠, 1569~1612)의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여장(汝章)이며, 호는 석주(石洲)이다. 어려서부터 정철(鄭澈)에게서 수학을 하였다. 과거에는 뜻이 없어 시주(詩酒)로 낙을 삼고, 가난하게 살다가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으며, 평생동안 벼슬을 하지 않았다.. 강화부(江華府)에 갔을 때 많은 유생들이 몰려오자 이들을 모아 가르쳤고, 이정구(李廷龜)가 대문장가(大文章家)로 알려진 명나라 사신(使臣) 고천준(顧天俊)을 접반하게 되어 문사(文士)를 엄선할 때 야인으로서 이에 뽑혀 문명을 떨쳤다. 1612년(광해군 4년) 김직재(金直哉)의 옥(獄)에 연루되어 친국을 받은 뒤 유배되었으며, 귀양길에 올라 동대문 밖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주는 술을 폭음하고는 그 다음날에 죽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석주집』이 전해진다.
현재 탁본은 인천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한 연대는 1990년대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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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문
이대형
권필(權韠) 유허비(遺墟碑 :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석주(石洲) 권(權)선생 유허비(遺墟碑)
강화부(江華府) 서쪽 오리천(五里川)은 석주(石洲) 권(權)선생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선생의 이름은 필(韠)이요, 자는 여장(汝章)이고, 습제(習齊) 선생 벽(擘)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나중에 막내 숙부 생원(生員) 부군(府君 : 죽은 남자 조상을 높여 부르는 말) 별(撇)의 뒤를 이었다.
과거시험에 뜻이 없었고, 관직이 제수되어도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세상의 번거로움을 피해 이곳에 집을 짓고 거주하니, 멀고 가까운 곳의 학자들이 선생의 명성을 듣고 다투어 몰려들어 구의(摳衣 : 옷을 걷어 올려 존경을 표함)를 표하며,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선생은 날마다 가르치고, 성취시키는 것을 일로 삼았으며, 때로는 시를 읊고 유유자적하며, 스스로 늙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수년을 거했다. 강화유수(江華留守 : 수도 이외의 요긴한 곳을 맡아 다스리던 정이품 외관직) 가 재물에 빠져, 아비를 시해한 옥사를 관대히 처결하자, 선생은 소를 올려 그 죄를 바로잡았다. 그리고는 강화(江華)를 떠나 현석강(玄石江 : 지금의 마포 서강)으로 돌아가 살며, 자신을 석주(石洲)라 불렀다.
월사(月沙) 이(李 : 이정구(李廷龜))공이 명(明)나라 사신을 접대할 문사를 엄선할 때, 선생은 포의(布衣 : 벼슬이 없는 선비)로 참석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죽창(竹窓) 구용(具容 : 문인으로 시조 “벽해 갈류 후에”가 있음)과 함께 화친을 주장하는 두 상신(相臣 : 상국으로 삼정승)의 참수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일찍이 이이첨(李爾瞻)을 만나자 남의 집 담을 넘어서 피하였다.
임자년(광해군 4, 1612년) 무옥(誣獄 : 임자옥사로 소북파인 유영경을 제거함)에 궁류시(宮柳詩 : 광해의 난정을 풍자한 시, 광해군의 비 유씨의 척족들이 정사를 마음대로 하므로, 유씨를 버드나무에 비유하여 그에 아부하는 무리를 질책하고 정사를 걱정한 내용의 시)로 연좌되어 화를 입었으니, 간악한 무리들의 모해 때문이다. 계해년(인조 1, 1623년) 인조 개옥(改玉 : 패옥을 바꿈, 즉 예를 고친다는 뜻으로 인조반정을 뜻함)을 하고서야, 선생에게 지평(持平 : 사헌부지평, 사헌부에 속한 종오품)을 추증하고, 선생의 후손을 관직에 채용하니, 특별한 은혜를 베푼 것이다.
선생은 타고난 성품이 매우 고상하였고, 내실은 매우 조신하였으며, 염락(廉洛 : 염계의 주돈이, 낙양의 정호, 정이 형제 곧 정주학)의 여러 책을 읽어, 견해가 두루 통하여 밝았다. 또한 『도학정맥(道學正脈)』 일편을 저술하였는데, 그 가려 평한 것이 자세하고 적절하며 문장은 견고하다. 나머지 일에 대해서는 세상이 모두 아는 바이다. 선생이 단지 시에는 능하나, 심오한 곳까지 깊이 연구하지는 못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또한 공을 잘 알지 못해서이다.
불초(不肖)가 무오년(영조 14, 1738년) 가을, 강화부에 부임하여 선생이 살았던 곳을 찾아가니, 황폐한 집터며 부서진 섬돌을 보고 이곳이 선생이 사셨던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반환정(盤桓亭 : 월출봉 아래 평평한 곳에 소나무를 심어놓고 지은 이름), 앵도파(櫻桃坡 : 권필이 자신의 집 서쪽에 앵두나무를 심고 지은 이름), 소유동(小有洞 : 두보의 시 萬古仇地穴 潛通小有天에서 따와 이름을 지음) 같은 곳은 명승지로, 선생의 시집(詩集)에서 여러 차례 일컬은 곳이고, 또 노인들이 가리켜 설명한 곳이다. 상하(上下)의 두 연못은 지금 논 두둑이 되어, 옛 달의 맑은 잔물결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이곳을 이리저리 거니니, 쓸쓸해지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드디어 초당 옛 터에 작은 표를 세우고, 선생의 사실을 짧게나마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이 역시 선생을 깊이 존경하고 사모하며,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려는 뜻이, 깃든 것이다. 내 뒤를 이어 오는 사람이, 만약 더욱 뜻을 다하여 보호하고, 비문(碑文)이 벗겨져 떨어지거나 부서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 어찌 비단 자손들만의 사사로운 다행이겠는가.
숭정 두 번째 기미년(영조 15, 1739년) 여름 4대손 가선대부(嘉善大夫 : 종이품 문무관품계) 강화부유수 겸 진무사(江華府留守 兼 鎭撫使 : 바다의 방위를 맡은 진무영에 속한 으뜸벼슬로 강화부유수가 겸임) 적(樀)이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