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종(台宗) 증시원각국사비명(贈諡圓覺國師碑銘)과 서문(序文).
조산대부(朝散大夫)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판사재사(判司宰事) 지제고(知制誥) 겸(兼) 태…
대저 부처께서 설법(說法)하신 삼승(三乘)
2 십이분교(十二分敎)
3인 팔만법문(八萬法門)이 모두 인도[乾竺]에서 갖추어졌으나, 해외의 나라에는 아직 법음法音이 전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부처의 미묘한 말씀의 전파는 원근(遠近)을 막론하고 … 숭상하였다. 그리하여 그 교풍(敎風)이 변한과 마한[卞馬] 지방에 크게 떨쳐, 혜일(慧日)의 비춤과 법우(法雨)의 적시는 한 구역이 되었다. 우리 태조(太祖) 임금께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자못 음(陰)으로 양(陽)으로 불법의 도움을 힘입어 만세(萬世)의 성군이 되었다. … 불교가 점점 동쪽으로 전래하였고, 따라서 천태종(天台宗)도 이미 전해졌지만, 아직 종문(宗門)이 성립되지 못하였다.
문왕(文王)의 넷째 아들인 대각국사가 선왕(宣王)이 즉위하신 3년 (1086) 경오년(庚午年)에 불법(佛法)을 배우고자 송(宋)나라에 들어가 전당(錢塘) 지방으로 다니면서 도(道)를 묻고, 불롱(佛隴) 천태산(天台山) 지자대사의 탑전에 올라가 영정(影幀)을 바라보고 우리나라에 천태종을 세워 홍천하기를 간절히 발원하였다. … 천태종을 논의하는 자들이 대각국사로써 시조(始祖)를 삼았으나,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道)가 사람을 넓게 하는 것이 아니므로, 대도(大道)가 유행함에는 반드시 그러한 사람을 만나야만 되는 것이다. 천태(天台)의 비장(秘藏)한 교리는 최승(最勝)의 법문(法門)이다. 반드시 천태종이란 이름이 세상에 남아 있게 됨은 … 민멸(泯滅)하지 아니한 연후(然後)에 가히 복리(福利)를 자뢰(資賴)하여 나라를 보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각국사가 입적(入寂)한지 이미 7년이 지났으나, 하늘이 국사로써 세상에 강탄(降誕)케 하여 장차 정법(正法)을 옹호토록 하였다. 어찌 그런 줄 아는가! 국사께서는 … 때문 이다. … 손에는 항상 책을 놓지 않고, 불도(佛道)를 구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이 국사로 하여금 정법(正法)을 보호하도록 그렇게 함이 아니겠는가!
또 모든 경문(經文)을 상고해 보건대, 여래(如來)의 실(室)이란 대자비심(大慈悲心)이 그것이며, 여래의 옷이란 유화(柔和)한 인욕심(忍辱心)이 그것이며, 여래의 좌(座)란 법실좌(法室座)가 바로 그것이라고 하였다. … 이러한 경지에 안주(安住)한 연후에 게으르지 않는 정진심(精進心)으로 불교를 천양하여 만세(萬世)토록 유통하도록 하고, 드디어 능히 대법륜(大法輪)을 전하여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는 이는 오직 우리 원각국사 뿐이라 하겠다.
국사의 휘는 덕소(德素)요, 자는 혜약(慧約)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자미(子美)요, 속성은 전씨(田氏)이다. … 아버지가 … 주수(州守)로 있을 때인 정해년(丁亥年) 3월 6일 어머니 남원군부인(南原郡夫人) 양씨(梁氏)는 어느 날 밤 경락(京洛)으로부터 주계(州界)에 이르기까지 수레[軒盖]가 길에 가득히 이어져 있는 꿈을 꾸었는데, 국사는 그 날 밤에 태어났다. 부모가 그 귀(貴)함을 알고 자미(子美)라고 이름을 지었다.
… 어떤 승려가 이르기를 “저는 국청사(國淸寺) 정원(淨源)입니다” 라 하므로, 국사는 기꺼이 그와 더불어 대화하니 마치 오래전부터 잘 아는 구면과 같았다. 드디어 따라가서 교웅대선사(敎雄大禪師)의 문하에서 9살 때 삭발하고 출가하였다. 웅공(雄公)이 항상 이르기를 “나의 종지(宗旨)를 중흥할 자는 반드시 이 사미(沙彌)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 스님과 함께 유희하였는데, 어느 날 함께 불전(佛殿)을 참관하다가 우연히 대장당(大藏堂)에 들어가 경함을 열고 책을 빼내어 국사에게 주었는데 국사는 꺼내는 책마다 능통(能通)하였다. 인조 임금께서 찬탄하여 이르시기를, “이 승려는 훗날 반드시 큰 법사(法師)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신년(戊申年) … 법계 고시장을 열고 대선(大選) 시험을 보기 전에 이미 자미가 당선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다음날 과연 합격되었으니, 국사는 단지 일세(一世) 동안 불교에 선근을 심었을 뿐 아니라, 소시(少時)의 이름 또한 숙세(夙世)의 이름이었다. 인종(仁宗)이 즉위[踐祚]한 지 11년째인 임자년(壬子年)에 인종 임금이 국청사(國淸寺)에 행행(幸行)하여 … 계해년(인종 21, 1143) 봄에 국사께서 문도들을 흩어 보내고 제방(諸方)으로 유력(遊歷)하면서 심사방도(尋師訪道)하다가, 울주(蔚州) 영취산(靈鷲山)에 이르러 주석(住錫)하였다. 지자(智者)들이 여러 곳에서 모여 들어 이보다 더할 것이 없었고, 사방의 학자(學者)들이 법을 청함이 날로 많아졌다.
또 들으니 … 돌아오는 길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중,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 성난 파도가 산과 같이 높이 솟았다. 배에 탄 사람 들이 어찌 할 바를 몰라 두려움에 싸여 우왕좌왕하였다. 이때 국사께 서 태연히 보문품(普門品)을 독송하기 시작하니, 순식간에 풍랑이 저절로 가라앉아 무사히 건너갔다. 경오년(의종 4, 1150)에 손수 금박으로 사경하였다. … 즉위(卽位)하여 국정에 임한지 8년째인 계유년(의종 7, 1153년)에 국사를 선사(禪師)로 진가(進加)하였으며, 을해년(의종 9, 1155) 봄에는 마납법의(磨衲法衣)를 하사하였다. 갑신년(의종 18, 1164) 여름 날씨가 오랫동안 가뭄이 들어 의종이 문명궁(文明宮)에서 설경법회(說經法會)를 열고 국사를 초빙하여 강주(講主)로 추대하였다. 강경(講經)을 시작하자마자 큰 비가 쏟아져 전야(田野)와 식수가 완전히 해갈하여 그 해에 크게 풍년이 들었다. … 어가를 수행하여, 임시거처인 행재소(行在所)에 있는 임금을 돕기 위해서였다. 곧 국사에게 명하여 거종(擧宗)의 석학(碩學)들에게 가히 비직(批職)을 줄만한 자를 추천토록 하였으니, 그가 추천한 대상은 모두 공망(公望)에 부응하였다. 의종 임금이 돌아오는 도중 평주(平州)에 머물러 있을 때, 국사께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첨가(添加)하였다. 명종(明宗) 2년(1172) 신묘년(辛卯年)에 이르러 … 불(佛)·법(法)·승(僧)에게 …
이와 때를 같이하여 국내의 모든 고승대덕 중에 덕망이 높은 승려를 선발하여 사범(師範)을 삼고자 하였으나, 왕의 뜻대로 스스로 결정 할 수 없어서 선(禪)·교종(敎宗) 중 많은 원로[耆舊]와 대덕[宿德]들을 택하여 불전(佛前)에 각기 그 이름을 봉(封)하여 두고 기도한 다음, 일봉(一封)씩 추첨으로 선발하였다. 또 임금의 진영(眞影) 앞에 나아가서 … 왕[上] 이 이에 척제(戚弟)
4… 승통(僧統)과 우복사(右僕射) 박경서(朴景瑞) 등을 보내어 왕의 뜻을 전달한 후 계속 여러 번 청하였지만, 국사는 모두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사신을 세 번이나 보내어 청하니, 국사께서도 임금의 뜻이 간절한 줄 알고, 왕명을 받아들였다. 갑인년(甲寅年)에 보내어 … 등이 예를 갖추어 왕사(王師)로 책봉하였다. 11월 갑술에 도속(道俗)과 군신(群臣)이 크게 모여 국사께 예배를 올리고, 이어 이 날에 백고좌회(百高座會)를 베풀어 행향(行香)하는 때에 이르러, 임금께서 먼저 국사 앞에 나아가 공손히 예배한 후 상전(上殿)하였다. 그 후 수창궁(壽昌宮) 화평전(和平殿)에서 금광명법회(金光明法會)를 베풀고, 국사를 청하여 회주(會主)로 추대하였다. … 임금께서 보연(步輦)으로 행행하시어 스님의 얼굴을 뵙고 문안하였으니, 그 공경함이 이와 같았다.
갑오년(명종 4, 1174) 10월 기축 … 천수사(天壽寺) 대연(大延) … 11월 계사癸巳에 병세[微疾]가 나타났으므로 임금께서 친히 병석(病席에) 왕림하여 손수 약물을 제공하였다. 또 우복야(右僕射) 박경서(朴景瑞)를 보내 약탕을 올렸으나, … 스님께서 손을 들어 뿌리치고, 선좌(禪座)에 돌아가 가부(跏趺)를 틀고 앉았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이것이 국사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마음자세”라고 찬탄하였다. 이 날 시봉(侍奉)인 승지선사(承智禪師)에게 명(命)하여 모시고 의왕시(毉王寺)로 옮기게 하였다. 하루를 지난 후, 서쪽을 향하여 단정히 앉아 합장(合掌)하고 엄연히 입적(入寂)하였다.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 송악산(松岳山) 서쪽 기슭에서 다비하였다.
스님께서 병에 걸릴 때 내인(內人) 곽영견(郭永堅)이 꿈에 … 성문인(聲問人)이 대답하되, “이것이 여래께서 열반하신 때”라고 하였다. 승도(僧徒)를 바라보니, 옷 빛이 백색(白色)으로 변하여 학림(鶴林)을 이루었다. 이 백색 광명(光明)이 주변을 돌다가 허공으로 올라 서쪽으로 … 다음날 병이 들었다. 11월 경인년(庚寅年)에 승지선사(承智禪師)에게 명(命)하여 유골을 받들어 … 양산(陽山) 관내(管內) 지륵산(智勒山) 영국사(寧國寺)에 안장하였다. 을미년(명종 5, 1175) 4월 태사(太史)를 보내어 … 형원사(瑩原寺)에 있을 때, 일찍이 이르기를 형원(瑩原)이란 선가(禪家)의 고찰(古刹)로 … 사(事)가 분요(紛擾)하여 부(不) … 지륵(智勒)은 산고수청(山高水淸)하여 참으로 수도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드디어 상청(上請)하여 선사(禪師) 승지(承智)로 하여금 … 무병(無病)하며, 입은 의상(衣裳)에 … 불전(佛典)을 읽는 일을 제외하고는 다른 일은 전혀 흉중(胸中)에 걸어두지 아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