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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奉化 太子寺 朗空大師塔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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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태자사 터에 있던 것을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보존하고 있는 신라말 고려초의 선사 낭공대사 행적(朗空大師 行寂, 832~916)의 비이다.
나말여초의 문인 최인연(崔仁渷)이 짓고 신라 명필 김생(金生)의 행서 글씨를 승려 단목(端目)이 집자하여 승려 숭태(嵩太), 수규(秀規), 청직(淸直), 혜초(惠超)가 새겨 945년(광종 5)에 세웠다. 비문은 31행에 1행 83자로 구성된 큰 비이다. 비신 중앙이 절단되었으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비문 내용은 낭공대사가 태어나 해인사로 출가하고 사굴산문 범일의 제자가 되어 당에 건너가 석상경저(石霜慶諸)의 법을 잇고 돌아와 효공왕의 초빙도 받고 김해 호족인 김율희의 귀의도 받다가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비문은 입적한 이듬해에 지었으나 세운 것은 38년이 지난 954년이었다. 음기는 954년에 비를 세울 때 순백(純白)이 대사의 제자인 양경(讓景)과 윤정(允正)에 대해 길게 서술하고 비문 찬자인 최인연에 대해서도 기술한 것이 특색이다. 마지막에 건립 담당 승려와 각자, 확대된 삼강직이 나온다. 비문 글씨가 김생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찍이 절터에 잡초에 묻혀 있던 것을 1509년(조선 중종 4)에 개관에 옮겨 보관하고 그 추기를 측면에 새겨 놓았다.
신라국(新羅國) 고(故) 양조국사(兩朝國師) 교시(敎謚) 낭공대사(朗空大師) 백월서운탑비명(白月棲雲之塔碑銘)과 서문(序文).
문인(門人)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원사(知瑞書院事)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최인연(崔仁渷)이 왕명 을 받들어 짓고, 석단목(釋端目)이 김생(金生)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새기다.
듣건대 진리의 경계는 보아도 볼 수 없고, 들어도 들을 수 없으며 현현(玄玄)한 진리의 세계로 가는 나루터는 멀고도 아득하니, 맑기 는 푸른 바다와 같고 멀기는 높은 허공과 같도다. 분별의 배로써 어찌 그 끝까지 도달할 수 있으리오. 지혜(智慧)의 수레로써도 능히 그 끝까지 이를 수 없으니, 하물며 부처께서 돌아가신지 이미 오래되었고, 범부(凡夫)의 어둠이 더욱 깊어져서 원숭이처럼 날뛰는 마음을 제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고삐 없는 말처럼 떠도는 의식을 조복받기란 더더욱 어렵도다. 이로 인하여 헛된 것만 따라가고 진실을 저버리는 자들 이 모두 축괴(逐塊)1하는 뜻을 품고 유(有)에 고집하고 공(空)의 이치에 미혹한 이는 모두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물로 잘못 알고 그 곳으로 쫓아가려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만약 철인(哲人)이 출세(出世)하고 보살[開士]인 도사(導士)가 때때로 나타나 진종(眞宗)을 나타내며 참된 방편을 널리 선양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중중현현(重重玄玄)한 진리를 분석하여 중묘(衆妙)의 문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으리오. 그윽이 계주(髻珠)2를 찾고 비밀리 심인(心印)을 전수하여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분이 어찌 다른 사람이겠는가. 낭공대사(朗空大師)가 바로 그러한 분이시다.
대사의 법휘(法諱)는 행적(行寂)이며, 속성은 최씨(崔氏)이다. 그의 선조는 주조(周朝)의 상보(尙父)인 강태공(姜太公)의 먼 후예이며, 또한 제(齊)나라의 정공(丁公)인 여급(呂伋)의 후손인데, 그 후 토군(兎郡)에 사신으로 왔다가 계림(鷄林)에 남게 되었으니, 지금의 경만(京萬) 즉 하남(河南) 사람이다. 할아버지의 휘(諱)는 전(全)이니, 세상의 영화를 모두 던져버리고 숨어 살면서 뜻을 지켰다. 아버지의 휘(諱)는 패상(佩常)이니, 9살 때 이미 관(冠)을 쓰고 약 삼동(三冬) 동안 공부하다가 자라서는 영원히 학문할 마음을 던져 버리고 무예(武藝)를 본받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름을 군려(軍旅)에 두고 무술(武術)을 익히는데 열중하였다.
어머니는 설씨(薛氏)로, 꿈에 어떤 스님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숙세(宿世)의 인연을 쫓아 어머니[阿孃]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라 하거늘, 꿈을 깬 후 그 영서(靈瑞)를 감득하고는, 그 일을 남편[所天]에 게 낱낱이 알렸다. 그로부터 어머니는 비린내 나는 육류 등을 먹지 아니하며 정성을 다하여 태교를 하였다. 그 후 태화(太和) 6년(흥덕왕 7, 832) 12월 30일에 탄생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기이한 골상이어서 보통사람과는 달랐다. 아이들과 놀 때에는 반드시 불사(佛事)를 하였으니, 항상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고 풀잎을 따서 향으로 삼았다. 푸른 옷을 입는 어릴 때부터 학당(學堂)으로 선생을 찾았으며, 공부를 할 때에는 먹는 것과 자는 것을 잊었고, 문장(文章)에 임해서는 그 뜻의 근본을 총괄하는 예지가 있었다.
일찍부터 부처 말씀을 깊이 믿었고, 마음으로는 세속을 떠나려 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아버지에게 고하되 “나의 소원은 출가수도(出家修道)하여 부모님의 끝없는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입니다”라 하니, 아버지 또한 숙세(宿世)부터 선근(善根)이 있어, 전날의 태몽과 합부(合符)하는 줄 알고는 그 뜻을 막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 간절하였으나, 슬픔을 머금고 승낙하였다.
드디어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 고행을 일삼아 배우기를 구 하되, 큰 가르침을 찾아 명산대찰을 두루 다니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이르러 종사(宗師)를 친견하고, 경론(經論)을 깊이 탐구하여 잡화(雜花)의 묘의(妙義)를 통괄하고 경전의 참 뜻을 해통(該通)하였다. 어느 날 종사가 학도(學徒)들에게 이르시되, “아난[釋子]은 다문(多聞)이요 안회[顔生]는 호학(好學)이라 하였는데, 옛날에는 그 말만 들었지만 이제 참으로 그런 사람을 보았으니, 어찌 청안(靑眼)과 적자(赤髭)를 비교해 같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대중(大中) 9년(문성왕 17, 855) 복천사(福泉寺) 관단(官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는 부낭(浮囊)에 대한 뜻이 간절하였고, 초계비구(草繫比丘)와 같이 자비의 정이 깊었다. “상교(像敎)의 종지(宗旨)는 이미 최선을 다하여 배우고 힘썼지만, 현기(玄機)의 비밀한 뜻을 어찌 마음에서 구하지 않으랴” 하고는 행장을 꾸려 지팡이를 짚고 하산하여 길을 찾아 곧 바로 굴산(崛山)으로 나아갔다. 통효대사(通曉大師)를 친견하고 스스로 오체(五體)를 던져 예배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품은 뜻을 여쭈었다. 대사는 곧 입방(入榜)을 허락하고 드디어 그로 하여금 입실(入室)하게 하였다. 대사는 이로부터 수년 동안 통효대사를 모시되 근고(勤苦)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비록 지극한 도(道)는 어려움이 없다하지만, 마치 평지(平地)에 산을 만들 듯이 굳은 뜻을 다하였다.
그러나 정신적 피로는 항상 담박하여 마치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려는 수고로움을 더하였으며, 모든 난관을 겪되 아무리 굴욕적 이고 비굴한 일이라도 능히 이겨내었다. 앉으나 누우나 항상 운수행각(雲水行脚)하면서 입당구법(入唐求法)할 생각이 간절하였다. 드디어 함통(咸通) 11년(경문왕 10, 870) 당나라에 비조사(備朝使)로 가는 김긴영(金緊榮)을 만나 입당유학(入唐遊學)하려는 서소지심(西笑之心)을 자세히 말 하였다. 김긴영이 갸륵하게 여기고 뜻이 통하여 같이 가는 것을 허락 하였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편하게 바다를 건너 서안(西岸)인 중국 땅에 도달하였다. 그 곳에서 천리를 멀리 여기지 아니하고 장안[上都]에 이르렀다. 한 담당관이 있어 특별히 구법(求法) 연유를 자세히 의종황제(懿宗皇帝)에게 알리니, 칙명(勅命)을 내려 좌우승록(左街僧錄)으로 하여금 보당사(寶堂寺) 공작왕원(孔雀王院)에 대사를 편안히 모시게 하였다. 기꺼운 바는 거처가 머무르기 좋은 환경이었고, 그 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부처께서 강탄(降誕)하신 날에 칙명으로 궁내에 들어가게 되었다.
의종황제는 “지극한 교화를 넓히고 또한 경건한 마음으로 불교인 현풍(玄風)을 드날리나”라 하였다. 황제가 대사에게 묻되 “머나 먼 바다를 건너오신 것은 무엇을 구하려 합니까”하였다. 대사가 황제에게 대답하되, “빈도(貧道)는 상국(上國)의 풍속을 관찰하고 불도(佛道)를 중화(中華)에게 묻고자 하였는데, 오늘 다행히도 홍은(鴻恩)을 입어 성사(盛事)를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소승(小僧)이 구하고자 하는 것은 두루 영적(靈跡)을 샅샅이 참배하여 적수(赤水)의 구슬을 찾고, 귀국하여서는 우리나라를 비추는 청구(靑丘)의 법인(法印)을 짓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천자(天子)가 대사의 말을 듣고 기꺼워하며 후하게 선물[寵賚]를 더하고, 그 말을 매우 훌륭하게 여긴 것은 마치 법수대사(法秀大師)가 진(晉)나라의 문제(文帝)를 만난 것과 담란법사(曇鸞法師)가 양(梁)나라 무제(武帝)와 대좌 한 것과 같았으니 고금(古今)이 비록 다르나 이름난 대덕(大德)의 일은 더욱 같다 하겠다.
그 후 오대산(五臺山) 화엄사(花嚴寺)에 들러 문수대성전(文殊大聖殿)에 기도하면서 감응(感應)을 구하게 되었다. 먼저 중대(中臺)에 올라가 홀연히 머리카락과 눈썹이 하얀 신인(神人)을 만나 머리를 조아려 절하 고 가호를 빌었다. 신인이 대사에게 이르되 “멀리 오느라고 고생이 많았다. 선재(善哉)야 불자(佛子)여! 이곳에 오래 머물지 말고 속히 남방(南方)을 향하여 가서 오색지상(五色之霜)을 찾으면 반드시 담마(曇摩)3의 비에 목욕하리라”고 일러 주거늘, 대사는 슬픔을 머금고 이별하여 남행(南行)하였다.
건부(乾符) 2년(헌강왕 1, 875) 성도(成都)에 이르러 아래로 순례하다가, 정중정사(靜衆精舍)에 도달하여 무상대사(無相大師)의 영당(影堂)에 참배하게 되었으니 대사는 신라 사람이었다. 영정에 참배한 후 무상대사에 대한 아름다운 유적을 자세히 들으니, 한때 당제(唐帝)인 현종(玄宗)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모국은 같건만 오직 그 시대가 달라서 후대에 법을 구하러 와서 그의 자취를 찾게 됨이 한이 될 뿐이라 했다. 그 당시 석상경제화상(石霜慶諸和尙)이 여래의 집을 열고 가섭(迦葉)의 종(宗)을 연설하여 도수(道樹)의 그늘에 많은 선류(禪流)들이 운집하여 수도하고 있었다. 낭공대사는 그 곳을 찾아가서 정성스럽게 예배를 드리고 입방(入榜)을 허락받아 그 곳에 머물게 되었으며, 방편(方便)의 문(門)에서 과연 마니(摩尼)의 보배를 얻었다.
그 후, 그 곳을 떠나 형악(衡岳)으로 가서 선지식(善知識)이 있는 선거(禪居)를 참배하였고, 다시 멀리 조계산으로 가서 6조대사의 탑에 예배하고 곁으로 동산홍인(東山弘忍)의 자취를 찾고 6조까지의 유적을 모 두 순례하였다. 이어 사방으로 다니면서 가 볼만한 곳은 두루 참방하였다. “비록 이와 같이 공색(空色)을 관(觀)하여 국경을 초월하였다고는 하나, 어찌 편수(偏陲)4인 고국를 잊을 수 있으리요”하고 중화(中和) 5년 (헌강왕 11, 885)에 귀국하였다. 그 때 바로 굴령(堀嶺)으로 가서 다시 통효대사(通曉大師)를 배알(拜謁)하니 대사가 이르시되 “일찍 돌아와서 반갑구나. 어찌 다시 서로 만나 볼 줄이야 기약조차 하였겠는가”하였다. 후학들이 각각 그로부터 법을 이어 받으면서 이렇게 실천하고 있었으니, 대사의 문하[扉蓮]에 있으면서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얼마를 지난 후 갑자기 병발(甁鉢)5을 휴대하고 운수행각(雲水行脚)의 길을 떠나니, 때로는 석장(錫杖)을 오악(五嶽)의 처음에 날려 잠깐 천주사(天柱寺)에 머물기도 하고, 혹은 배를 삼하(三河)의 뒤에 띄워 행각하다가 수정사(水精寺에 주(住)하기도 하였다. 문덕(文德) 2년(진성여왕 3, 889) 4월 중에 굴산대사(崛山大師)께서 병환에 있으므로 곧 고산(故山)으로 돌아가 정성껏 시봉하였으니, 열반할 때 이르러 부촉(付囑)하고 전심(傳心)을 받은 이는 오직 낭공대사 한 사람 뿐이었다. 처음 삭주(朔州) 건자난야(建子蘭若)에 주석(住錫)하고 겨우 초막을 수축하자마자 비로소 산문(山門)을 여니, 찾아드는 자가 구름과 같이 끊이질 않았다.
근년에 액운(厄運)에 당하여 세상은 몽매한 때였으므로 재성(災星)이 오랫동안 삼한(三韓)에 비추고 독로(毒露)는 항상 사군(四郡)에 퍼져 있어서 암곡(岩谷)에도 숨어 피난할 곳이 없었다. 건녕(乾寧, 894~898) 초년(初年)에 왕성(王城)에 가서 머물면서 담복향을 내불당(內佛堂)에 분향하고, 강화(光化, 898~900) 말년(末年)에는 곧 야군(野郡)으로 돌아가서 풀을 깎아낸 유허(遺墟)에 전단향을 심기도 하였으나, 유감스러운 것은 마군(魔軍)의 시대를 만난 것이었다. 장차 불도(佛道)를 선양하고자 할 때, 효공대왕(孝恭大王)이 갑자기 보위(寶位)에 오르고 특히 선종을 흠모하여 받들었다. 당시 대사는 해동에 있어 독보적일 뿐만 아니라, 그 고고함 이 천하에 우뚝 드러났으므로 특별히 승정(僧正)인 법현(法賢) 등을 보내어 봉필(鳳筆)을 전달하여 황거(皇居)인 왕궁(王宮)으로 초빙하였다. 대사가 문인들에게 이르시되 “처음 안선(安禪)함으로부터 하화중생(下化衆生)인 교화를 마칠 때까지 우리의 불교가 말대(末代)에 이르시기까지 유통됨은 국왕 대신들의 외호(外護)의 은혜이다”라 하였다.
천우(天祐) 3년(효공왕 10, 906) 9월 초에 홀연히 명주(溟州) 교외를 나와 경주[京邑]에 도착하였다. 16일에 이르러 비전(祕殿)으로 인도하여 고고하게 법상(法床)에 올라 설법하니, 효공왕이 미리 어심(御心)을 맑게 하고, 면류관과 조복(朝服)을 정돈하여 국사(國師)의 예로써 대우하며 경건하게 진리를 배우겠다는 뜻을 밝혔다. 대사는 말씀과 안색이 종용(從容)하고 신의(紳儀) 또한 자약하였다. 도(道)를 높이 숭상함에는 복희씨와 헌원씨의 술(術)을 설하여 주고,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요임금과 순임금의 풍도(風道)를 일러 주었는데, 대사는 설법하거나 남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마치 거울이 물상(物像)을 비추어 주되 피로함을 잊은 것과 같이 하였고, 물음에 답할 때에는 종이 치기를 기다려 울리는 것과 같이 하였다.
친히 모시며 법을 받은 제자가 4인이니 행겸(行謙)·수안(邃安)·신종(信宗)·양규(讓規) 등이다. 양경(讓景)은 행(行)이 10철(十哲)을 뛰어넘고 이름은 삼선(三禪)을 덮었으며, 진리의 근본을 탐색하고 절대경의 심오한 이치를 논하였다. 성인(聖人)은 자주 진미(麈尾)인 불자(拂子) 휘두름을 보이니 이러한 설법으로 임금을 기껍게 하였다. 그러던 중 홀연히 다음 해 여름 끝자락[夏末]에 잠깐 경기를 떠나서 바닷가로 행각하다가 김해부(金海府)에 이르니, 지부급제(知府及第)이며 동령군(同領軍)인 충자(忠子) 소율희공(蘇律熙公)이 옷깃을 여미고 덕풍(德風)을 흠모하던 중, 옷깃을 열고 도를 사모하여 이름난 큰절에 주석하도록 청하였는데, 이는 백성[蒼生]을 복되게 하기를 희망한 것이었다. 십사(十師)가 함께 산중에 서지(棲遲)하니, 그윽이 자비의 교화(敎化)를 드리워 요망한 액운(厄運)의 연기는 모두 나라 밖으로 쓸어버리고 감로(甘露)의 법수(法水)를 산중에 뿌리게 되었다.
신덕대왕(神德大王)이 비도(丕圖)를 빛나게 통어(統御)하려 하여 왕위에 올라 은총으로 대사를 궁중으로 초빙하였다. 정명(貞明) 원년(신덕 왕 4, 915) 봄에 대사는 선중(禪衆)을 거느리고 제향(帝鄕)에 이르니, 전날과 같이 명에 의하여 남산(南山) 실제사(實際寺)에 계시도록 하였다. 이 절은 본래 성상(聖上)이 아직 보위(寶位)에 오르기 전 황합(黃閤)6에 있을 때 잠룡(潛龍)7하던 곳인데, 이를 선방(禪房)으로 만들어 대사께 헌납하여 영원히 선우(禪宇)가 되게 하였던 것이다. 이때에 대사를 행소(行所)로 맞이하여 거듭 대사의 자안(慈顔)을 배알하고, 이에 기다렸던 마음을 열어 다시 무위의 설법을 들었다. 하직하고 돌아가려 할 때에 특별히 왕과 사자(師資)의 좋은 인연도 맺었다.
이때에 여 제자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명요부인(明瑤夫人)이고 오도(鼇島)의 후손이며 구림(鳩林)의 관족(冠族)이었다. 대사를 우러름이 고산(高山)과 같았고, 불교를 존중하는 돈독한 불자(佛子)였다. 석남산사(石南山寺)를 대사께 드려서 영원히 주지하시라 청하니, 가을 7월에 대사는 기꺼이 이를 받아들이고 비로소 이 절에 주석(住錫)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절은 멀리는 4악(四岳)을 연(連)하였고, 높기로는 남쪽의 바다를 눌렀으며, 시냇물과 석간수가 다투어 흐르는 것은 마치 쇠로 만든 수레를 계곡으로 끄는 것과 같았다. 암만(岩巒)이 다투어 빼어난 것은 자색(紫色) 구슬을 장식한 거개(車盖)가 하늘로 치솟은 것과 같았으니, 참으로 은사(隱士)를 초빙하여 유거(幽据)하게 할 만한 곳이며, 또한 선(禪)을 닦기에 좋은 가경(佳境)이라 하겠다. 대사는 오래전부터 영산(靈山)을 찾아 다녔으나 정거(定居)할 곳을 구하지 못하다가, 이 산에 이르러서야 비로 소 마지막 열반할 곳으로 삼았다.
그 다음 해 봄 2월 초에 대사는 가벼운 병을 앓다가 12일 이른 아침에 대중을 모아 놓고 이르시되 “생명이란 마침내 끝이 있는 법. 나 는 곧 세상을 떠나려 하니 도를 잘 지키고 잃지 말 것이며, 너희들은 정진에 힘써 노력하고 게으르지 말라”하시고 승상(繩床)에 가부좌를 맺고 단정히 앉아 엄연히 열반에 드시니 세수는 85세요, 승랍(僧臘)은 61 세였다. 그 때에 구름과 안개가 마치 그믐처럼 캄캄하였고 산봉우리가 진동하였다. 산 아래 사람이 산정(山頂)을 올려다보니 오색(五色)의 광기(光氣)가 하늘로 향해 뻗쳐 있고, 그 가운데 한 물건이 하늘로 올라가는 데 마치 금으로 된 기둥과 꼭 같았다. 이것이 어찌 지순(智順)대사가 열반할 때 방안에 향기가 가득하고 하늘로부터 화개(花盖)가 드리운 것과 법성(法成)대사가 입적(入寂)함에 염한 시신을 감마(紺馬)가 등에 업고 허공으로 올라가는 것뿐이라 하겠는가! 이때에 문인(門人)들은 마치 오정(五情)을 잘라내는 것과 같이 애통(哀痛)해 하였으니 천속(天屬)을 잃은 것 과 다를 바 없었다.
17일에 이르러 공경히 색신(色身)을 모시고 서봉(西峰)의 기슭에 임시로 장례를 지냈다. 신덕왕[聖考大王]이 갑자기 대사의 열반 소식을 듣고, 진실로 어심[仙襟]을 아파하면서 특별히 칙사[中使]를 보내어 장례를 감호(監護)하는 한편, 조의(吊儀)를 표하게 하였다. 3년(경명왕 1, 917) 11월 중순에 이르러 동만(東巒)의 정상(頂上)으로 이장하였으니, 절과의 거리는 약 300보였다. 이장하려고 열어 보니 전신(全身)이 그대로 제자리에 있어 조금도 흩어지지 않았으며, 신색(神色)도 생전(生前)과 같았다. 문하생(門下生)들이 거듭 자안(慈顔)을 보고, 감모(感慕)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하면서 석호(石戶)를 마련하여 봉폐(封閉)하였다.
대사께서는 영정(靈精)을 하악(河嶽)에서 받아 태어났고, 기질은 성신(星辰)으로부터 받았다. 신분(身分)은 누더기 걸치는 황납(黃衲)에 속하나, 황상(黃裳)의 길상(吉相)에 응하였다. 이런 연유로 일찍이 선경(禪境)에 깃들었고 오랫동안 수도하여 객진번뇌(客塵煩惱)를 모두 털어 버렸으며, 두 임금을 양조(兩朝)에 걸쳐 보비(補裨)하고 군생을 삼계고해(三界苦海)에서 구제하였다. 그리하여 나라가 태평하고 마적(魔賊)을 모두 귀항(歸降)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대각의 진신(眞身)이며 관음의 후신(後身)인 줄 알겠다.
현관(玄關)을 열어 지묘(至妙)한 이치를 부양하고, 자실(慈室)을 열어 미혹한 중생을 인도하다가 열반을 보이시니, 이는 부처께서 학수(鶴樹)8에서 진적(眞寂)으로 돌아가신 자취를 본받은 것이요, 화신(化身)이 살아있는 것 같으니, 가섭존자가 계족산(鷄足山)에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있는 것과 같다 하겠다. 살아있을 때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을 교화하고 시종(始終)에 걸쳐 도를 넓히시니, 가히 정혜(定慧) 무방(無方)하며 신통이 자재(自在)한 분이라고 할만하다. 제자 신종선사(信宗禪師)와 주해선사(周解禪師), 임엄선사(林儼禪師) 등 500여 명에 가까운 사람이 함께 일심으로 다져졌으니, 모두 상족(上足)의 위치에 있어서 항상 부지런히 수호하여 길이 추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거해(巨海)에 먼지가 날듯, 강한 바람에 번갯불이 꺼지듯, 대사의 고매한 위적(偉跡)이 점점 연멸할까 염려하여, 여러 차례 조정[魏闕]에 주달하여 비명 세우기를 청하였다.
지금 임금인 경명왕이 홍기(洪基)에 올라 공손히 보록(寶籙)을 계승 하고, 아울러 선화(禪化)를 흠숭(欽崇)하시기를 전조(前朝)와 다름없이 하였다. 그리하여 시호를 낭공대사라 하고, 탑명(塔名)을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이라 추증하였다. 이에 보잘 것 없는 신하[微臣]인 저에게 명하여 “경은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제구(虀臼)인 명문(名文)을 지으라” 하였다. 인연(仁渷)은 고사(固辭)하였지만 끝내 면치 못하여 명을 따라 나름대로 천박한 비사(菲詞)를 나열하여 대사의 빛나는 유덕(遺德)을 찬양하려 하니, 마치 표주박으로 바닷물을 헤아리려는 것과 같아서 바닷물의 깊이를 짐작할 수 없으며, 또한 대롱으로 하늘을 엿보는 것과 같아서 창천(蒼天)의 광활함을 측량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일찍부터 대사로부터 자비하신 가르침을 입었으며, 종맹(宗盟)으로써 임금의 보살핌을 입은 것에 보답하는 뜻으로 붓을 잡아 정성을 다하였으니, 지은 글에 크게 부끄러움은 없다. 억지로 현도(玄道)라 이름하여 이로써 법은(法恩)을 갚고자 한다.
그 찬사(讚詞)는 다음과 같다.
지극한 도리는 본래 무위법(無爲法)이니
마치 대지가 무념무작(無念無作)한 것과 같네.
차별한 만법이 마침내 동귀(同歸)하니
천문무행(千門無行) 그 근원은 일치하도다.
깊고도 오묘한 정각(正覺)의 높은 경지
방편(方便)을 베풀어서 군생(群生)을 제도하네.
성인(聖人)과 범부(凡夫)가 다르다곤 말하지만
진리를 깨고 보면 조금도 다름없네.
석상(石霜)을 이어받은 위대한 선백(禪伯)이여!
동방(東方)에 빛나는 해동(海東)에 태어났도다.
지혜의 총명함은 일월(日月)보다 더 하고
풍도(風度)의 높고 넓음은 허공(虛空)과 같도다.
이름은 덕(德)으로 인하여 나타났지만
지혜는 자비와 더불어 융통했으니,
당(唐)나라에 들어가 법인(法印)을 전해 왔고
본국(本國)에 돌아와선 동몽(童蒙)을 개도했네.
마음은 맑고 맑아 수중(水中)의 달과 같고
은은하고 고요함은 연하(煙霞)와 같으며,
임금은 숙연하게 도덕(道德)을 흠모하여
친서를 보내 왕궁으로 초빙하였네.
진성(眞聖)과 효공(孝恭)의 양조(兩朝)를 부찬(扶贊)하였고
불교(佛敎)의 교리를 곳곳에 드날려서
지혜의 등을 밝혀 무명(無明)을 깨뜨리고
무명의 구름 사라지니 밝은 달 비추네.
도와 덕이 높으신 철인(哲人)은 떠나가고
승속(僧俗)의 제자들은 어쩔 줄 몰라하네.
문도(門徒)들은 혜명(慧命)의 책무 더욱 느끼고
임금님의 베푸신 은혜 깊고도 깊네.
봉정(峰頂)에는 사리탑(舍利塔)이 우뚝이 솟았고
대사의 비석은 시내 곁에 서 있네.
개자겁(芥子劫)의 긴 세월(歲月) 비록 다하더라도
오래도록 이 비석 선림(禪林)을 비출 것이다.
사자교인(獅子咬人) 한로축괴(韓獹逐塊)의 준말이다. 사람이 흙덩어리를 던지면 사자는 던지는 사람을 깨물지만, 개는 반대로 그 흙덩어리를 깨문다는 데서 나온 고사(故事)로, 한갓 지엽말절(枝葉末節)인 언어문자(言語文字)에만 얽매어 사물의 진상(眞相)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
계중명주(髻中明珠)의 준말이다. 대인(大人)의 상투 속에 든 귀중한 구슬로, 불교의 최상교리인 일승법(一乘法)을 가리킨다. ↩
신라국(新羅國) 고양조국사(故兩朝國師) 교시낭공대사(敎謚朗空大師) 백월서운지탑비명(白月栖雲之塔碑銘)과 아울러 서문.
문인(門人)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원사(知瑞書院事)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신(臣) 최인연(崔仁渷)이 왕명을 받들어 짓고, 석단목(釋端目)이 김생(金生)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새기다.
듣건대 진리의 경계는 보아도 볼 수 없고, 들어도 들을 수 없으며 현현(玄玄)한 진리의 세계로 가는 나루터는 멀고도 아득하니, 맑기는 푸른 바다와 같고 멀기는 높은 허공과 같도다. 분별의 배로써 어찌 그 끝까지 도달할 수 있으리오. 지혜(智慧)의 수레로써도 능히 그 끝까지 이를 수 없으니, 하물며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지 이미 오래되었고, 범부(凡夫)의 어둠이 더욱 깊어져서 원숭이처럼 날뛰는 마음을 제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고삐 없는 말처럼 떠도는 의식을 조복받기란 더더욱 어렵도다. 이로 인하여 헛된 것만 따라가고 진실을 저버리는 자들이 모두 축귀(逐塊)하는 뜻을 품고 유(有)에 고집하고 공(空)의 이치에 미혹한 이는 모두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물로 잘못 알고 그 곳으로 쫓아가려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만약 철인(哲人)이 출세(出世)하고 개사(開士)인 도사(導士)가 때때로 나타나 진종(眞宗)을 나타내며 참된 방편을 널리 선양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중중현현(重重玄玄)한 진리를 분석하여 중묘(衆妙)의 문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으리오.
그윽이 계주(髻珠)를 찾고 비밀리 심인(心印)을 전수하여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분이 어찌 다른 사람이겠는가. 낭공대사(朗空大師)가 바로 그러한 분이시다. 대사의 법휘(法諱)는 행적(行寂)이며, 속성은 최씨(崔氏)이다. 그의 선조는 주조(周朝)의 상보(尙父)인 강태공(姜太公)의 먼 후예이며, 또한 제(齊)나라의 정공(丁公)인 여급(呂伋)의 후손인데, 그 후 토군(兎郡)에 사신으로 왔다가 계림(鷄林)에 남게 되었으니, 지금의 경만(京萬) 즉 하남(河南) 사람이다. 할아버지의 휘(諱)는 전(全)이니, 세상의 영화를 모두 던져버리고 숨어 살면서 뜻을 지켰다. 아버지의 휘(諱)는 패상(佩常)이니, 9살 때 이미 관(冠)을 쓰고 약 삼동(三冬) 동안 공부하다가 자라서는 영원히 학문할 마음을 던져 버리고 무예(武藝)를 본받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름을 군려(軍旅)에 두고 무술(武術)을 익히는데 열중하였다.
어머니는 설씨(薛氏)이니, 꿈에 어떤 스님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숙세(宿世)의 인연을 쫓아 아양(阿孃)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라 하거늘, 꿈을 깬 후 그 영서(靈瑞)를 감득하고는, 그 일을 소천(所天)에게 낱낱이 여쭈었다. 그로부터 어머니는 비린내 나는 육류 등을 먹지 아니하며 정성을 다하여 태교를 하였다. 그 후 태화(太和) 6년 12월 30일에 탄생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기이한 골상이어서 보통사람과는 달랐다. 아이들과 놀 때에는 반드시 불사(佛事)를 하였으니, 항상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고 풀잎을 따서 향으로 삼았다. 푸른 옷을 입는 어릴 때부터 학당(學堂)으로 선생을 찾았으며, 공부를 할 때에는 먹는 것과 자는 것을 잊었고, 문장(文章)에 임해서는 그 뜻의 근본을 총괄하는 예지가 있었다.
일찍부터 부처님 말씀을 깊이 믿었고, 마음으로는 세속을 떠나려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아버지에게 고하되 “나의 소원은 출가수도(出家修道)하여 부모님의 끝없는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입니다”라 하니, 아버지 또한 숙세(宿世)부터 선근(善根)이 있어, 전날의 태몽과 합부(合符)하는 줄 알고는 그 뜻을 막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 간절하였으나, 슬픔을 머금고 승낙하였다. 드디어 머리를 깎으며 먹물 옷을 입고 고행을 일삼아 배우기를 구하되, 큰 가르침을 찾아 명산대찰을 두루 다니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이르러 종사(宗師)를 친견하고, 경론(經論)을 깊이 탐구하여 잡화(雜花)의 묘의(妙義)를 통괄하고 경전의 참 뜻을 해통(該通)하였다. 어느 날 스님께서 학도(學徒)들에게 이르시되, “석자(釋子)는 다문(多聞)이요 안생(顔生)은 호학(好學)이라 하였는데, 옛날에는 그 말만 들었지만 이제 참으로 그런 사람을 보았으니, 어찌 청안(靑眼)과 적자(赤髭)를 비교해 같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대중(大中) 9년 복천사(福泉寺) 관단(官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는 부낭(浮囊)에 대한 뜻이 간절하였고, 초계비구(草繫比丘)와 같이 자비의 정이 깊었다. ‘상교(像敎)의 종지(宗旨)는 이미 최선을 다하여 배우고 힘썼지만, 현기(玄機)의 비밀한 뜻을 어찌 마음에서 구하지 않으랴’하고는 행장을 꾸려 지팡이를 짚고 하산하여 길을 찾아 곧바로 굴산(崛山)으로 나아갔다. 통효대사(通曉大師)를 친견하고 스스로 오체(五體)를 던져 예배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품은 뜻을 여쭈었다. 대사는 곧 입방(入榜)을 허락하고 드디어 그로 하여금 입실(入室)하게 하였다. 스님은 이로부터 수년 동안 대사를 모시되 근고(勤苦)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비록 지극한 도(道)는 어려움이 없다하지만, 마치 평지(平地)에 산을 만들 듯이 굳은 뜻을 다하였다.
그러나 정신적 피로는 항상 담박하여 마치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려는 수고로움을 더하였으며, 모든 난관을 겪되 아무리 굴욕적이고 비굴한 일이라도 능히 이겨내었다. 앉으나 누우나 항상 운수행각(雲水行脚)하면서 입당구법(入唐求法)할 생각이 간절하였다. 드디어 함통(咸通) 11년 당나라에 비조사(備朝使)로 가는 김긴영공(金緊公)을 만나 입당유학(入唐遊學)하려는 서소지심(西笑之心)을 자세히 말하였다. 김공(金公)이 갸륵하게 여기고 뜻이 통하여 같이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편하게 바다를 건너 서안(西岸)인 중국땅에 도달하였다. 그 곳에서 천리를 멀리 여기지 아니하고 상도(上都)에 이르렀다. 한 담당관이 있어 특별히 구법(求法)연유를 자세히 의종황제(懿宗皇帝)에게 알리니, 칙명(勅命)을 내려 좌우승록(左街僧錄)으로 하여금 보당사(寶堂寺) 공작왕원(孔雀王院)에 대사를 편안히 모시게 하였다. 기꺼운 바는 거처가 머무르기 좋은 환경이었고, 그 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부처님께서 강탄(降誕)하신 날에 칙명으로 궁내에 들어가게 되었다. 의종황제는 “지극한 교화를 넓히고 또한 경건한 마음으로 불교인 현풍(玄風)을 드날리나이다”라 하였다. 황제가 대사에게 묻되 “머나 먼 바다를 건너오신 것은 무엇을 구하려 함입니까”하였다. 대사가 황제에게 대답하되, “빈도(貧道)는 상국(上國)의 풍속을 관찰하고 불도(佛道)를 중화(中華)에게 묻고자 하였는데, 오늘 다행히도 홍은(鴻恩)을 입어 성사(盛事)를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소승(小僧)이 구하고자 하는 것은 두루 영적(靈跡)을 샅샅이 참배하여 적수(赤水)의 구슬을 찾고, 귀국하여서는 우리나라를 비추는 청구(靑丘)의 법인(法印)을 짓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천자(天子)가 스님의 말을 듣고 기꺼워하며 후하게 총뢰(寵賚)를 더하고 그 말을 매우 훌륭하게 여긴 것은 마치 법수대사(法秀大師)가 진(晉)나라의 문제(文帝)를 만난 것과 담란법사(曇鸞法師)가 양무제(梁武帝)와 대좌한 것과 같았으니 고금(古今)이 비록 다르나 이름난 대덕(大德)의 일은 더욱 같다 하겠다.
그 후 오대산(五臺山) 화엄사(花嚴寺)에 들러 문수대성전(文殊大聖前)에 기도하면서 감응(感應)을 구하게 되었다. 먼저 중대(中臺)에 올라가 홀연히 머리카락과 눈썹이 하얀 신인(神人)을 만나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가호를 빌었다. 신인이 대사에게 이르되 “멀리 오느라고 고생이 많았다. 선재(善哉)라 불자(佛子)여! 이 곳에 오래 머물지 말고 속히 남방(南方)을 향하여 가서 오색지상(五色之霜)을 찾으면 반드시 담마(曇摩)의 비에 목욕하리라”고 일러 주거늘, 대사는 슬픔을 머금고 이별하여 점차로 남행(南行)하였다. 건부(乾符) 2년 성도(成都)에 이르러 이리저리 순례하다가, 정중정사(靜衆精舍)에 도달하여 무상대사(無相大師)의 영당(影堂)에 참배하게 되었으니 대사는 신라 사람이었다. 영정에 참배한 후 스님에 대한 아름다운 유적을 자세히 들으니, 한때 당제(唐帝)인 현종(玄宗)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모국은 같건만 오직 그 시대가 달라서 후대에 법을 구하러 와서 그의 자취를 찾게 됨이 한이 될 뿐이라 했다. 그 당시 석상경제화상(石霜慶諸和尙)이 여래의 집을 열고 가섭(迦葉)의 종(宗)을 연설하여 도수(道樹)의 그늘에 많은 선류(禪流)들이 운집하여 수도하고 있었다. 낭공대사(朗空大師)는 그 곳을 찾아가서 정성스럽게 예배를 드리고 입방(入榜)을 허락받아 그 곳에 머물게 되었으며, 방편(方便)의 문(門)에서 과연 마니(摩尼)의 보배를 얻었다. 그 후, 그 곳을 떠나 형악(衡岳)으로 가서 선지식(善知識)이 있는 선거(禪居)를 참배하였고, 다시 멀리 조계산으로 가서 6조대사의 탑에 예배하고 곁으로 동산홍인(東山弘忍)의 자취를 찾고 6조까지의 유적을 모두 순례하였다. 이어 사방으로 다니면서 가 볼만한 곳은 두루 참방하였다. “비록 이와 같이 공색(空色)을 관(觀)하여 국경을 초월하였다고는 하나, 어찌 편수(偏陲)인 고국를 잊을 수 있으리요”하고 중화(中和) 5년에 귀국하였다. 그 때 바로 굴령(堀嶺)으로 가서 다시 통효대사(通曉大師)를 배알(拜謁)하니 대사가 이르시되 “일찍 돌아와서 반갑구나. 어찌 다시 서로 만나 볼 줄이야 기약조차 하였겠는가”하였다. 후학들이 각각 그로부터 법을 이어 받으면서 이렇게 실천하고 있었으니, 대사의 비련(扉蓮)에 있으면서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얼마를 지난 후 홀연히 병발(甁鉢)을 휴대하고 운수행각(雲水行脚)의 길을 떠나니, 때로는 석장(錫杖)을 오악(五嶽)의 처음에 날려 잠깐 천주사(天柱寺)에 머물기도 하고, 혹은 배를 삼하(三河)의 뒤에 띄워 행각하다가 수정사(水精寺)에 주(住)하기도 하였다. 문덕(文德) 2년 4월 중에 굴산대사(崛山大師)께서 병환에 있으므로 곧 고산(故山)으로 돌아가 정성껏 시봉하였으니, 열반할 때 이르러 부촉(付囑)하고 전심(傳心)을 받은 이는 오직 낭공대사 한 사람 뿐이었다. 처음 삭주(朔州) 건자난야(建子蘭若)에 주석(住錫)하고 겨우 초막을 수축하자마자 비로소 산문(山門)을 여니, 찾아드는 자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어 아침에 셋, 저녁엔 넷으로 이어져 끊이질 않았다.
때는 시대가 액운(厄運)에 당하여 세상은 몽매한 때였으므로 재성(災星)이 길을 삼한(三韓)에 비추고 독로(毒露)는 항상 사군(四郡)에 퍼져 있음인즉, 하물며 암곡(岩谷)에도 숨어 피난할 곳이 없었다. 건녕초년(乾寧初年)에 왕성(王城)에 가서 머물면서 담복향을 내불당(內佛堂)에 분향하고, 광화말년(光化末年)에는 곧 야군(野郡)으로 돌아가서 풀을 깎아낸 유허(遺墟)에 전단향을 심기도 하였으나, 유감스러운 것은 마군(魔軍)의 시대를 만난 것이었다. 장차 불도(佛道)를 선양하고자 할 때, 마침 효공대왕(孝恭大王)이 보위(寶位)에 오르고 특히 선종을 흠모하여 받들었다. 당시 대사는 해동에 있어 독보적일 뿐만 아니라, 그 고고함이 천하에 우뚝 드러났으므로 특별히 승정(僧正)인 법현(法賢) 등을 보내어 봉필(鳳筆)을 전달하여 황거(皇居)인 왕궁(王宮)으로 초빙하였다. 대사가 문인들에게 이르시되 “처음 안선(安禪)함으로부터 하화중생(下化衆生)인 교화를 마칠 때까지 우리의 불교가 말대(末代)에 이르시기까지 유통됨은 국왕 대신들의 외호(外護)의 은혜이다”라 하고는 천우(天祐) 3년 9월 초에 홀연히 명주(溟州) 교외를 나와 경읍(京邑)에 도착하였다. 16일에 이르러 비전(祕殿)으로 인도하여 고고하게 법상(法床)에 올라 설법하니, 주상이 그 마음을 맑게 하고, 면류관과 조복(朝服)을 정돈하여 국사(國師)의 예로써 대우하며 경건하게 찬앙(鑽仰)의 정을 펴거늘, 대사는 말씀과 안색이 종용(從容)하고 신의(紳儀) 또한 자약하였다. 도(道)를 높이 숭상함에는 복희씨와 헌원씨의 술(術)을 설하여 주고,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요임금과 순임금의 풍도(風道)를 일러 주었는데, 대사는 설법하거나 남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마치 거울이 물상(物像)을 비추어 주되 피로함을 잊은 것과 같이 하였고, 물음에 답할 때에는 종이 치기를 기다려 울리는 것과 같이 하였다. 친히 상전(上殿)하여 법을 받은 제자가 4인이니 행겸(行謙)·수안(邃安)·신종(信宗)·양규(讓規) 등이요, 양경(讓景)은 행(行)이 10철(十哲)을 뛰어넘고 이름은 삼선(三禪)을 덮었으며, 진리의 근본을 탐색하고 절대경의 심오한 이치를 논하였다. 성인(聖人)은 자주 진미(麈尾)인 불자(拂子) 휘두름을 보이니 이러한 설법으로 임금을 기껍게 하였다. 그러던 중 홀연히 다음 해 하말(夏末)에 잠깐 경기인 서울을 하직하고 바닷가로 행각하다가 김해부(金海府)에 이르니, 지부급제(知府及第)이며 동령군(同領軍)인 충자(忠子) 소율희공(蘇律熙公)이 옷깃을 여미고 덕풍(德風)을 흠모하던 중, 옷깃을 열고 도(道)를 사모하여 이름난 큰절에 주석하도록 청하였는데, 이는 창생을 복되게 하기를 희망한 것이었다. 십사(十師)가 함께 산중에 서지(棲遲)하니, 그윽이 자비의 교화(敎化)를 드리워 요망한 액운(厄運)의 연기는 모두 나라밖으로 쓸어버리고 감로(甘露)의 법수(法水)를 산중에 뿌리게 되었다.
신덕대왕(神德大王)이 비도(丕圖)를 빛나게 통어(統御)하려 하여 왕위에 올라 은총으로 스님을 궁중으로 초빙하였다. 정명(貞明) 원년 봄에 대사는 약간의 선중(禪衆)을 거느리고 제향(帝鄕)에 이르니, 전날과 같이 명에 의하여 남산(南山) 실제사(實際寺)에 계시도록 하였다. 이 절은 본래 성상(聖上)이 아직 보위(寶位)에 오르기 전 황합(黃閤)에 있을 때 잠룡(潛龍)하던 곳인데, 이를 선방(禪房)으로 만들어 스님께 헌납하여 영원히 선우(禪宇)가 되게 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대사를 행소(行所)로 맞이하여 거듭 스님의 자안(慈顔)을 배알하고, 이에 기다렸던 마음을 열어 다시 무위의 설법을 들었다. 하직하고 돌아가려 할 때에 특히 왕과 사자(師資)의 좋은 인연도 맺었다.
이 때에 여제자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명요부인(明瑤夫人)이고 오도(鼇島)의 후손이며 구림(鳩林)의 관족(冠族)이었다. 스님을 우러름이 고산(高山)과 같았고, 불교를 존중하는 돈독한 불자(佛子)였다. 석남산사(石南山寺)를 스님께 드려서 영원히 주지하시라 청하니, 가을[秋] 7월에 대사는 기꺼이 이를 받아들이고 비로소 이 절에 주석(住錫)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절은 멀리는 4악(四岳)을 연(連)하였고, 높기로는 남쪽의 바다를 눌렀으며, 시냇물과 석간수가 다투어 흐르는 것은 마치 쇠로 만든 수레를 계곡으로 끄는 것과 같았다. 암만(岩巒)이 다투어 빼어난 것은 자색(紫色) 구슬을 장식한 거개(車盖)가 하늘로 치솟은 것과 같았으니, 참으로 은사(隱士)를 초빙하여 유거(幽据)하게 할만한 곳이며, 또한 선(禪)을 닦기에 좋은 가경(佳境)이라 하겠다. 대사는 오래전부터 영산(靈山)을 찾아 다녔으나 정거(定居)할 곳을 구하지 못하다가, 이 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지막 열반할 곳으로 삼았다. 그 다음 해 봄 2월 초에 대사는 가벼운 병을 앓다가 12일 이른 아침에 대중을 모아 놓고 이르시되 “생명이란 마침내 끝이 있는 법. 나는 곧 세상을 떠나려 하니 도(道)를 잘 지키고 잃지 말 것이며, 너희들은 정진에 힘써 노력하고 게을리하지 말라”하시고 승상(繩床)에 가부좌를 맺고 단정히 앉아 엄연히 열반에 드시니 세수는 85세요, 승랍(僧臘)은 61이었다. 그 때에 구름과 안개가 마치 그믐처럼 캄캄하였고 산봉우리가 진동하였다. 산 아래 사람이 산정(山頂)을 올려다보니 오색(五色)의 광기(光氣)가 하늘로 향해 뻗쳐 있고, 그 가운데 한 물건(物件)이 하늘로 올라가는데 마치 금으로 된 기둥과 꼭 같았다. 이것이 어찌 지순(智順)스님이 열반할 때 방안에 향기가 가득하고 하늘로부터 화개(花盖)가 드리운 것과 법성(法成)스님이 입적(入寂)함에 염한 시신을 감마(紺馬)가 등에 업고 허공으로 올라가는 것뿐이라 하겠는가! 이 때에 문인(門人)들은 마치 오정(五情)을 잘라내는 것과 같이 애통(哀痛)해 하였으니 천속(天屬)을 잃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17일에 이르러 공경히 색신(色身)을 모시고 서봉(西峰)의 기슭에 임시로 장례를 지냈다. 성고대왕(聖考大王)이 홀연히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진실로 선금(仙襟)을 아파하면서 특별히 중사(中使)를 보내어 장례를 감호(監護)하는 한편, 조의(吊儀)를 표하게 하였다. 3년 11월 중순에 이르러 동만(東巒)의 정상(頂上)으로 이장하였으니, 절과의 거리는 약 300보였다. 이장하려고 열어 보니 전신(全身)이 그대로 제자리에 있어 조금도 흩어지지 않았으며, 신색(神色)도 생전(生前)과 같았다. 문하생(門下生)들이 거듭 자안(慈顔)을 보고, 감모(感慕)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하면서 석호(石戶)를 마련하여 봉폐(封閉)하였다.
대사께서는 영정(靈精)을 하악(河嶽)에서 받아 태어났고, 기질은 성신(星辰)으로부터 품받았다. 신분(身分)은 누더기 걸치는 황납(黃衲)에 속하나, 황상(黃裳)의 길상(吉相)에 응하였다. 이런 연유로 일찍이 선경(禪境)에 깃들었고 오랫동안 수도하여 객진번뇌(客塵煩惱)를 모두 털어 버렸으며, 두 임금을 양조(兩朝)에 걸쳐 보비(補裨)하고 군생을 삼계고해(三界苦海)에서 구제하였다. 그리하여 나라가 태평들하고 마적(魔賊)을 모두 귀항(歸降)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대각의 진신(眞身)이며 관음의 후신(後身)인 줄 알겠도다. 현관(玄關)을 열어 지묘(至妙)한 이치를 부양하고, 자실(慈室)을 열어 미혹한 중생을 인도하다가 열반을 보이시니, 이는 부처님께서 학수(鶴樹)에서 진적(眞寂)으로 돌아가신 자취를 본받은 것이요, 화신(化身)이 살아 있는 것 같으니, 가섭존자가 계족산(鷄足山)에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있는 것과 같다 하겠다. 살아있을 때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을 교화하고 시종(始終)에 걸쳐 도를 넓히시니, 가히 정혜(定慧) 무방(無方)하며 신통이 자재(自在)한 분이라고 할만 하도다. 제자 신종선사(信宗禪師)와 주해선사(周解禪師), 임엄선사(林儼禪師) 등 500여 명에 가까운 사람이 함께 일심으로 다져졌으니, 모두 상족(上足)의 위치에 있어서 항상 부지런히 수호하여 길이 추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거해(巨海)에 먼지가 날듯, 강한 바람에 번갯불이 꺼지듯, 스님의 고매한 위적(偉跡)이 점점 연멸할까 염려하여, 여러 차례 위궐(魏闕)에 주달하여 비명 세우기를 청하였다.
지금 임금이 홍기(洪基)에 올라 공손히 보록(寶籙)을 계승하고, 아울러 선화(禪化)를 흠숭(欽崇)하시기를 전조(前朝)와 다름없이 하였다. 그리하여 시호를 낭공대사(朗空大師)라 하고, 탑명(塔名)을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이라 추증하였다. 이에 미신(微臣)인 저에게 명하여 “경은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제구(虀臼)인 명문(名文)을 지으라”하였다. 인연(仁渷)은 고사(固辭)하였지만 끝내 면치 못하여 명을 따라 나름대로 천박한 비사(菲詞)를 나열하여 스님의 빛나는 유덕(遺德)을 찬양하려 하니, 마치 표주박으로 바닷물을 헤아리려는 것과 같아서 바닷물의 깊이를 짐작할 수 없으며, 또한 대롱으로 하늘을 엿보는 것과 같아서 창천(蒼天)의 광활함을 측량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일찍부터 스님으로부터 자비하신 가르침을 입었으며, 종맹(宗盟)으로써 임금의 보살핌을 입은 것에 보답하는 뜻으로 붓을 잡아 정성을 다하였으니, 지은 글에 크게 부끄러움은 없다. 억지로 현도(玄道)라 이름하여 이로써 법은(法恩)을 갚고자 한다.
그 찬사(讚詞)에 이르되,
지극한 도리는 본래 무위법(無爲法)이니
마치 대지가 무념무작(無念無作)한 것과 같네.
차별한 만법이 마침내 동귀(同歸)하니
천문무행(千門無行) 그 근원은 일치하도다.
깊고도 오묘한 정각(正覺)의 높은 경지
방편(方便)을 베풀어서 군생(群生)을 제도하네.
성인(聖人)과 범부(凡夫)가 다르다곤 말하지만
진리를 깨고 보면 조금도 다름없네.
석상(石霜)을 이어받은 위대한 선백(禪伯)이여!
동방(東方)에 빛나는 해동(海東)에 태어났도다.
지혜의 총명함은 일월(日月)보다 더 하고
풍도(風度)의 높고 넓음은 허공(虛空)과 같도다.
이름은 덕(德)으로 인하여 나타났지만
지혜는 자비와 더불어 융통했으니,
당(唐)나라에 들어가 법인(法印)을 전해 왔고
본국(本國)에 돌아와선 동몽(童蒙)을 개도했네.
마음은 맑고 맑아 수중(水中)의 달과 같고
은은하고 고요함은 연하(煙霞)와 같으며,
임금은 숙연하게 도덕(道德)을 흠모하여
친서를 보내 왕궁으로 초빙하였네.
진성(眞聖)과 효공(孝恭)의 양조(兩朝)를 부찬(扶贊)하였고
불교(佛敎)의 교리를 곳곳에 드날려서
지혜의 등을 밝혀 무명(無明)을 깨뜨리고
무명(無明)의 구름 사라지니 밝은 달 비추네.
도(道)와 덕(德)이 높으신 철인(哲人)은 떠나가고
승속(僧俗)의 제자들은 어쩔 줄 몰라하네.
문도(門徒)들은 혜명(慧命)의 책무 더욱 느끼고
임금님의 베푸신 은혜 깊고도 깊네.
봉정(峰頂)에는 사리탑(舍利塔)이 우뚝이 솟았고
큰스님의 비석은 시내 곁에 서 있네.
개자겁(芥子劫)의 긴 세월(歲月) 비록 다하더라도
오래도록 이 비석 선림(禪林)을 비출지이다.
신라국(新羅國) 석남산(石南山) 고국사비명(故國師碑銘) 후기(後記)
문하법손(門下法孫) 석순백(釋純白) 지음.
공손히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 대사께서 출태(出胎)로부터 몰치(沒齒)에 이르기까지 생연(生緣)과 권속들, 그리고 모든 촉사(觸事)에 대한 인연은 문생(門生)인 김장로(金長老) 윤정(允正)이 지은 기록에 갖추어 기록되어 있으며, 문인(門人) 최대상(崔大相)인 인연(仁渷)이 지은 비문에 서술하였으니, 지금 순백(純白)이 기록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오직 대사께서 당신라국(唐新羅國) 경명왕(景明王) 때인 천우년중(天祐年中)에 화연(化緣)을 마치고 열반에 드셨을 때, 명왕(明王)이 시호와 탑명(塔名)을 추증하고 이어 최인연(崔仁渷) 시랑(侍郞)에게 칙명을 내려 비문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복잡하고 인심은 교활하여 뜻있는 일을 하기에 더욱 어려운 시대였다.
그 후 해가 바뀌고 여러 달이 지났지만 비석을 세우지 못하다가, 후고려(後高麗)가 사군(四郡)을 평정하고 삼한(三韓)이 정정(鼎正)됨에 이르러서 현덕(顯德) 원년(元年) 7월 15일에 태자산(太子山)에 이 큰 비를 세우게 되었으니, 참으로 좋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국사(國師)의 문하(門下)에 제일 신족(神足)은 국주(國主)인 임금이고, 사찰(寺刹)의 승두(僧頭)는 건성원(乾聖院)의 화상이니 휘는 양경(讓景)이요, 속성은 김씨이며, 자는 거국(擧國)이다. 낭공대사(朗空大師)에게 경우에 따라 몸이 되고 마음이 되어 보필하였으며, 국왕(國王)의 편에 스스로 귀가 되고 눈이 되어 보국(補國)하였다. 장차 방진(芳塵)이 바람에 날아가고, 시간이 오래되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아름다운 위적(偉蹟)도 구름처럼 잊혀져 빛나는 기록마저 연멸되리니, 취염(翠琰)도 세우지 않으면 대사의 법은(法恩)은 작보(雀報)만이 스스로 세워진 비가 되리라.
화상(和尙)의 왕부(王父)는 애(藹)이니, 원성왕(元聖王)의 표래손(表來孫)이자 헌강왕(憲康王)의 장인이다. 청렴결백하여 모든 사람들의 입에 자자하였고, 충효는 높아 낮은 모든 사람들의 입으로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칭송되었다. 안으로는 집사시랑(執事侍郞)을 지냈고, 밖으로는 패강(浿江) 도호(都護)를 역임하였다. 아버지의 이름은 순례(詢禮)니, 재주는 육예(六藝)를 겸하였고, 학문은 오경(五經)을 관통하였다. 월하(月下)와 풍전(風前)에서 읊으면 연정체물(緣情體物)의 시구(詩句)에 속하고, 봄꽃과 달밤에는 무현(撫絃)과 운죽(韻竹)의 소리를 나타내는 풍류(風流)가 있었다. 내직(內職)으로는 집사함향(執事含香)에 이르고, 외임(外任)으로는 삭주장사(朔州長史)를 역임하였다. 화상의 젊은 시절부터 늙음에 이르기까지의 행동거지와 언모(言謨)와 행적(行蹤)과 풍격(風格) 등은 모두 별록(別錄)에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국사(國師)의 비문과 어록에 마땅히 기록되어야 할 것이 기록되지 아니한 것들만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용담식조(龍潭式照), 건성양경(乾聖讓景), 연▨혜희(鷰▨惠希), 유금윤정(宥襟允正), 청룡선관(淸龍善觀), 영장현보(靈長玄甫), 석남형한(石南逈閑), 숭산가언(嵩山可言), 태자본정(太子本定)이 있으니, 앞에 열거한 아홉 분의 스님은 국사가 생존시에는 날개가 알 속에 있어서 아직 청운(靑雲)의 뜻을 펴지 못하였으나, 국사께서 열반하신 후에는 각자 나름대로의 각족(角足)이 발달하고 완전한 몸체가 이루어져 비로소 자유롭게 푸른 바다 가운데로 유희(遊戲)하게 되었다. 스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법석(法席)의 대중이 우모(牛毛)처럼 많았으나, 입멸(入滅)하신 후에는 선좌(禪座)가 겨우 종유(鍾乳)의 수에 불과(不過)하였다. 흔히 사람들이 평하기를 구유(九乳)는 종과 같아서 그 젖으로 구방(九方)의 불자(佛子)를 기르되 일면(一面)은 거울과 같다하였으니, 마치 일국(一國)의 군신(君臣)과 같은 격이라 하였다. 이른바 날개와 같은 대중이 많다고 한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것 같다. 윤정장로(允正長老)는 건성양경(乾聖讓景)과 동태(同胎)의 동생이다. 계(戒)를 고상하게 가져 이름이 뛰어났던 것과 생몰연대(生歿年代)와 언행(言行) 등은 모두 그의 문인이 따로 기록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태양이 침실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고, 만삭이 되어 해산하려는 달에는 달이 밀굴(密窟)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니, 과연 꿈대로 건성양경(乾聖讓景)과 유금윤정(宥襟允正)을 분만하였다. 어찌 석담체(釋曇諦)의 어머니가 이물(二物)의 상징을 꿈꾸고, 혜▨(慧▨)의 아양(阿孃)이 이과(二果)의 상서를 얻은 것 뿐 이겠는가. 최인연(崔仁渷)은 진한(辰韓)의 무족(茂族) 사람이다. 이른바 일대(一代)의 삼최(三崔)가 모두 당나라에 유학하여 금방(金榜)으로 급제하고 귀국하였으니 최치원(崔致遠), 최인연(崔仁渷), 최승우(崔承祐) 등인데, 인연(仁渷)은 그 중간에 속하는 사람이다. 학문은 해악(海岳)을 두루 덮었고, 열람한 책은 오거(五車)에 이거(二車)를 더하였으며, 재주는 풍운(風雲)을 모두 맡아 칠보시(七步詩)의 재능에서 삼보(三步)를 제하였으니, 실로 군자국(君子國) 군자(君子)이며 또한 대인향(大人鄕)의 대인(大人)이라 하겠다.
이는 월계수(月桂樹)의 가지를 중화(中華)에서 꺾었고, 향풍(香風)은 상국(上國)에서 드날렸으며, 다라국(多羅國)에서 불교를 배워 동향(東鄕)인 우리나라를 빛나게 하였다. 대사의 무거운 은혜를 입었기에 스님에 대한 홍비(鴻碑)의 기록을 순백(純白)이 찬술하였으나, 마치 잣대로 하늘의 높이를 재려함과 같으니 어찌 그 가깝고 멀음을 알 수 있으며, 달팽이 껍질로 바닷물을 짐작하려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어찌 그 많고 적음을 헤아릴 수 있으리오. 그렇다면 말을 해도 부당하고, 또한 말하지 않고 묵묵히 있어도 옳지 않으니, 후래(後來)의 군자(君子)들은 취하거나 버리는 것을 각자 자의(自意)에 맡길 뿐이다.
현덕원년(顯德元年) 세재갑인(歲在甲寅) 7월(七月) 15일(十五日) 세우다.
句當事僧:逈虛長老
刻字僧:嵩太尙座 秀規尙座 淸直師 惠超師
院主僧:高賢長老
典座僧:淸良
維那僧:秀宗
史 僧:日言
直歲僧:規言
【追記側面】
내가 어릴 때 김생(金生)의 필적(筆蹟)을 비해당집고첩[匪懈堂集古帖(安平大君 1418~1455)]에서 얻어보니, 그 필법(筆法)이 마치 용이 날뛰고 호랑이가 누워있는 것과 같아서, 그 기세(氣勢)를 보고 크게 좋아하였다. 그러나 세상에 전함이 많지 않음을 한탄하여 오던 중 근래(近來)에 영주(榮州)의 인읍(隣邑)인 봉화현(奉化縣)에 김생(金生) 글씨의 비석(碑石)이 홀로 고사(古寺)의 유허(遺墟)에 남아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나는 이와 같은 희세(希世)의 보배가 초망지간(草莽之間)에 매몰되어 있으나 수호하는 사람이 없어 야우(野牛)의 뿔에 부딪쳐 상하거나, 목동들의 불장난 등이 모두 염려되었다. 그리하여 군인(郡人)인 전참봉(前叅奉) 권현손(權賢孫)과 공모(共謀)하여 자민루(字民樓) 아래에 이전하여 안치하고 사방(四方)으로 난함(欄檻)을 둘러 출입을 통제하였다. 탁본(托本)하는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출입을 금하였으니, 함부로 만져 손상이 생길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김생(金生)의 필적(筆蹟)이 세상에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그 후 선비들이 앞을 다투어 감상하러 찾아 들었다. 슬프다. 천백년(千百年) 동안 폐허에 버려져 있던 비석이 하루아침에 큰 집으로 옮겨져서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물건의 나타나고 숨는 것도 또한 운수에 속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비록 재주가 미천하고 창려[昌藜(韓愈의 封號)]와 같은 박학(博學)에는 미치지 못하나, 이 비석을 만나 상완(賞翫)하고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은 진실로 기산(岐山)의 석고[石鼓 : 주(周)의 선왕(宣王) 2대 사주(史籒)의 송(頌)을 대전(大篆)으로 새긴 10개의 석고(石鼓)이니, 중국에서 제일로 꼽는 보물로서 현재 북경(北京)의 구국자감(舊國子監) 대성문(大城門) 좌우에 있음)]와 다를 바가 없다 하겠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 정덕(正德) 4년(1509) 가을[秋] 8월 군수(郡守)인 낙서(洛西) 이항(李沆)이 짓고 박눌(朴訥)이 쓰다.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