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용어명 | 아라가야 양식 토기(阿羅伽倻樣式土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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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함안 지역의 말이산 고분군을 비롯하여 칠원 오곡리 고분군, 창원 현동 유적 등지에서 5세기 전반에서 6세기중엽까지 일정한 조합상을 이루면서 형식 변화를 나타내는 토기군을 말한다. 특히, 이 토기군은 암자색을 띠는 경질제로서 가야 지역의 공통적 특징인 대각을 3단으로 구획하고 위의 2단에만 일단 투창이나 종이단일렬투창을 뚫은 고배와 화염형 투창을 배치한 고배, 동부(胴部)의 중위에서 최대경을 가지며 구연에서 저부로 큰 손잡이가 연결된 파수부배(把手附杯), 단추 모양의 꼭지가 붙고 파상문이 시문 된 뚜껑, 짧은 목에 구형의 동체부를 갖춘 단경호(短頸壺), 원형의 동체부에 직선상으로 벌어져 오르는 경부를 갖춘 장경호(長頸壺), 발부가 크고 넓으며 대각부가 좁아 불안정한 느낌을 주는 고배형기대 등 여러 가지 속성들을 공유하고 있다. 아라가야 양식 토기에 대한 연구는 1990년대 이후 함안과 김해를 비롯한 낙동강 하류 지역에 대한 활발한 발굴 조사에 의해 축적된 각종 토기 자료 가운데 고배류와 기대류, 호류를 중심으로 시도되었다. 이를 통해 주로 4세기에서 6세기 전반에 이르는 함안과 김해 지역 도질토기의 분포 변화와 편년 체계를 마련하고 아라가야 세력의 정치적 변화와 동향이 다양한 형태로 제시되었다. 이들 연구 가운데 주목되는 것으로 안재호, 송계현은 신라, 가야 토기가 분화되기 이전의 고식 도질토기 단계에 있어서 김해·부산, 함안 이서, 경주 등 세 지역권으로 구분되며 통형고배(筒形高杯), 노형기대(爐形器臺), 파수부잔, 대부파수부고배(臺附把手高杯) 등이 출토되는 범위는 함안을 중심으로 한 아라가야의 세력권으로 보았고, 조영제는 고식 도질토기 단계에서 통형고배와 노형기대 등은 영남일대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지금까지의 조사에 의하면 함안과 그 주변 지역에서 발견 빈도가 가장 높은 자료들임으로 이를 ‘함안식 토기’라고 명명하고, 묘제와 토기 문화의 변동을 통하여 아라가야의 역사발전 과정을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대형 목곽묘의 등장, 고식 도질토기의 소멸 , 새로운 토기의 출현을 고구려의 남정과 관련지었으며 말이산 34호분으로 대표되는 5세기 3/4분기를 전성기로 아라가야와 고구려의 밀접한 관계를 상정하였다. 5세기 4/4분기 이후 대가야 연맹체의성장과 관련하여 화염형투창고배(火焰形透窓高杯)가 사라지고 대신 개배가 등장하며 횡혈식석실묘와 고령식 토기 문화의 유입이 나타나는 6세기 전반 대를 백제와 대가야 문화의 확산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6세기 전반대의 아라가야 양식 토기의 존재를 인정하여 독자적인정치 집단이 존속한 것으로 보았다. 이성주는 함안의 중심 고분인 말이산 고분군으로부터 시간과 공간상의 거리로 아라가야 토기가 정의될 수 있다고 보고, 기종, 아기종 혹은 기형으로 구분하여 편년하였다. 김정완은 함안 권역의 도질토기를 9단계로 나누고 Ⅰ단계에서 Ⅳ단계는 전기(4세기 전반~5세기 1/4분기) 즉, 고식 도질토기 단계로서 진양-의령-함안-마산에 이르는 중서부 경남 일대가 대체로 동일한 양상을 보이며, 통형고배와 컵형토기, 노형토기가 기본 조합이 되며 여기에 파수부잔, 대부파수부배(臺附把手附杯) 등이 첨가되는데 유적은 주로 함안 분지 내 보다는 주변의 산록에 위치하며 소형 목곽묘가 중심이어서 아직까지 뚜렷한 권력의 집중 현상은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Ⅴ단계에서 Ⅷ단계는 중기(5세기 2/4분기~6세기 1/4분기)로서 함안식 토기가 구체화되며 상하 일렬 장방형이단투창고배, 화염형투창고배가 특징이 되며 장경호, 고배형기대 등이 추가된다. 분묘의 입지도 주변 산록에서 함안 분지 내로 이동하고 유구도 대형 목곽묘나 대형 봉토를 갖춘 석곽분 및 횡형식석실분이 등장하고 있으므로 강력한 정치 집단의 존재를 반영하는 것으로 아라가야의 발전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후 Ⅸ단계는 기존에 주류를 보이고 있는 화염문투창고배와 이단장방형투창고배류가 사라지고단각의 삼각형투창고배와 개배류가 보편화되면서 토기의 형태에 있어서도 외래계 요소가 많이 유입되며 백제계 횡혈식석실분이 들어오면서 기존의 분묘 축조 위치에도 큰 변화가 나타 난다고 보았다. 우지남은 출토 수도 많고 시간에 따른 속성 변화가 민감하게 반영되고 있는 고배, 기대, 파수부배를 한정하여 형식 분류를 실시하고 단경호, 뚜껑, 대부호 등의 기종을 단계별로 나누어 유물 조합상의 특징을 설명하였다. 그는 4세기에서 6세기 중엽에 이르는 함안 지역 출토 도질토기의 특징을 모두 10개의 단계로 나누어 보았는데, Ⅰ단계에서 Ⅴ단계까지는 고식 도질토기(가야 토기 전기)로, Ⅵ단계에서 Ⅹ단계까지는 아라가야 토기(가야 토기 후기)로 파악하였다. 특히, 5세기 2/4분기에 해당되는 Ⅵ단계를 아라가야 토기의 발생기로, Ⅶ단계 ~ Ⅸ단계는 전성기, Ⅹ단계는 쇠퇴기로 파악하였다. 또한, 함안군 이외의 지역에서 아라가야 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을 근거로 아라가야의 영역을 추적하였는데, 아라가야의 영역은 함안 분지를 중심으로 하여 6세기 전반경에는 남강 변의 의령군 일부 지역과 강한 유대 관계를 형성했을 것으로 추정 하였다. 한편, 남강 연안의 함안 윤외리와 황사리, 의령 예둔리 분묘군과 낙동강 이서 지역에서 4세기 대에 유행한 노형기대, 고배, 승석문양이부호(繩席文兩耳附壺)를 아라가야 양식 토기의 특징적인 기종으로 보는 연구도 있다. 특히, 박천수는 이들 토기의 중심은 함안 분지를 둘러싼 남강 하류 지역의 양안과 진동만 일대이며, 남강과 황강 수계를 포함하는 광역의 분포권을 형성하고, 금관 가야권과 경주를 비롯한 신라권에도 반출되며 해당 지역의 토기 제작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았으며, 이정근은함안 지역에서 보이는 승문계타날호(繩文系打捺壺)의 제작기술 및 특징을 살펴본 후 이를 기준으로 여타 지역에서 출토된 승문계타날호가 함안에서 만들어진 후 남강과낙동강을 따라 유통되었다고 지적하였다. 하승철은 4세기 대 함안 양식 토기는 광범위한 분포권을 가지며 생활 유구, 생산 유구 등 다양한 유적에서 출토된 이유는 도질토기 제작 기술의 전파가 함안 지역 공인의 이동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정주희는 함안지역 분묘에서 보이는 고식 도질토기의 분포 정형을 검토하고, 함안 지역이 김해와 부산 지역보다 고식 도질토기 문화의 성립이 늦지 않았으며 여타 지역에서 함안 양식 토기가 출토되는 분포를 확인하여 함안산과 함안계를 구분하였다. 아라가야 양식 토기는 가야의 지역 문화에 대한 연구와 함께 주요 가야 세력권의 변화 양상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특히, 400년 고구려의 남정으로 인한 금관가야 세력의 약화와 가야 토기에 있어 형식 난립기이후인 5세기 중엽부터 도질토기 가야 양식권 내에 고성·진주식, 고령식, 함안식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단순한토기 문화의 변화라기보다는 정치적 변동에 수반된 문화적인 변동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5세기 전반 대 이후 정치적 변동에 의해 연맹체의 통할 능력이 약화됨으로서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연맹체의 와해가 이루어지고 새로이 고령 지역의 대가야 연맹과 경남 서부 지역의 서남부 가야 연맹으로 분리됨으로 인해 토기 문화에 있어서도 지역색이 강하게 등장하는 문화 변동이 생겨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아라가야 양식 토기 문화를 통하여 볼 때, 5세기 전반에서 6세기 중엽 무렵까지 독특한 양식의 토기 문화를 유지한 아라가야는 김해, 고령의 후기 가야의 제국과 견줄 수 있는 세력 집단으로 상정되며, 함안 분지를 중심으로 하여 5세기 중엽 이후에는 칠원, 창원, 진동, 군북, 의령 지역까지 공간적인 범위를 확장시켜 간 것으로 분석된다.(이주헌) |
참고문헌 | 고식도질토기에 대한 약간의 고찰(안재호·송계현, 영남고고학 1, 영남고고학회, 1986), 삼각투창고배에대한 일고찰(조영제, 영남고고학7, 영남고고학회, 1990), 함안권역 도질토기의 편년과 분포변화(김정완, 경북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4), 함안양식 고식도질토기의 분포정형에 관한 연구(정주희, 경북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 전환기 가야토기연구(박승규, 동의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
구분 | 용어 |
사전명 | 한국고고학 전문사전(고분유물편) |
만족도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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