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용어명 | 바위그림〔岩刻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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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선사·고대인의 주술과 기원을 담고 있는 것으로, 유럽과 시베리아, 몽골, 중국 등 세계 각지에 분포하고 있는데, 한반도에서는 현재까지 15개소 이상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표현기법 상 암각(岩刻, carvimg, graving)과 암채(岩彩, painting)로 구분되나, 편의상 바위그림(岩刻畵, petroglyphs)으로 통칭되며, 한반도에서의 바위그림(rock art)은 모두 암각(carvimg)된 것이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하천변에 있는 수직의 암면(岩面)에 새겨져 있으며, 산괴(山塊)와 떨어진 독립된 봉우리에 있는 경우가 많다. 바위그림이 위치하는 장소에서 내려다볼 때 주변에 넓은 평지가 전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천, 즉 물이 내려다보이는 것이 보통이다. 더구나 바위그림이 새겨질 당시의 지리적 환경을 고려해 보면, 바위그림이 있는 곳은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다. 유적의 입지가 전체 생활공간 가운데에서 은밀한 곳이고, 바위그림 앞의 공간이 매우 좁은 점으로 보아, 이곳에서의 행위는 대중이 아닌 특정 소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동시에 이곳이 따로 독립된 봉우리인 점을 감안하면 이 지역은 일반인들이 평상시에 접근하지 않는 특별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암각의 표현방법과 내용에 따라 크게 세 개의 군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첫째는 사실적 표현으로서 울산 대곡리 바위그림에서 확인되는 그림이다. 사실적이고 생동적인 동물의 표현, 인물의 전신상이나 사냥하는 모습,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모습, 인물상에 있어서 성기의 표현 등이 특징이다. 특히 활을 들고 사냥하는 모습이나 생동적인 동물의 표현은 중국 북부나 몽골, 시베리아의 초원지대 바위그림에서 흔히 보이는 것으로, 수렵사회에서의 생활모습을 말해준다. 고래를 잡는 모습이나 고래, 거북, 물개 등 바다동물 그림에서는 어로를 중심으로 한 사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반구대에서는 팔과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인물상이 주목되는데, 이러한 인물상은 몽골 초원지대 바위그림에서 보이는 샤만(shaman)의 모습 과 매우 유사하다. 둘째는 기하학적 문양으로 연속마름모꼴을 비롯한 각종의 기하학적 무늬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울산 천전리 바위그림에서만 보인다. 풍요나 생명력 등 농경과 관련된 도상(圖像)으로 파악되고 있다. 셋째는 사람의 얼굴 또는 신상(神像)으로서 고령 양전리, 고령 안화리, 포항 칠포리, 남원 대곡리, 영천 보성리, 경주 석장동, 경주 상신리, 영주 가흥동 등의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도식적으로 표현된 신상+동심원+홈구멍〔性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상은 유적별로 세부적인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신상은 패형(牌形), 혹은 방패형(防牌形) 등으로 불려지는 형상이 주류를 이루는데, 넓은 지역에 걸쳐 있으면서 형태적으로 서로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어 이를 제작한 당시의 사람들이 서로 공감하고 있던 어떤 이미지가 그 속에 내포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이 형태가 당시인에게 있어 신의 모습, 즉 신체(神體)를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외에도 바위그림이 발견된 예로서 포항 인비리 고인돌 (간돌검〔磨製石劍〕, 돌화살촉〔石鏃〕), 여수 오림동 고인돌(사람, 간돌검), 함안 도항리 고인돌(동심원, 홈구멍)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고인돌의 덮개돌〔上石〕에 새겨진 경우이며, 그 내용도 무구(武具)를 기본으로 하고 있어 앞서의 경우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다만 함안 도항리의 경우 동심원이 새겨져 있어 고령 양전리이나 경주 상신리와 비교해 볼 여지가 있다. 또한 안동 수곡리에서도 생활과 관련이 있는 바위그림이 알려져 있으나, 그림의 내용이 다른 유적과는 동떨어진 특이한 성격의 것이다. 현존하는 바위그림의 실물 자료만을 토대로 그 행위를 복원하는 작업은 용이하지 않으나 지금까지의 검토를 토대로 하여 대체로 살펴본 의례행위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유적의 입지가 생활공간 가운데에서도 매우 은밀한 곳이고, 주위에 공간이 거의 확보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이러한 행위는 대중이 아닌 특정 소수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동시에 독립된 봉우리인 점을 감안하면 이 공간은 일반인 들이 평상시에 접근할 수 없는 신성지역이었을 것이다. 둘째, 패형암각(牌形岩刻)을 기획도안하고 제작한 사람은 의례와 관련된 기원자(祈願者)가 아니라 샤먼과 같은 특정인이었다. 여러 지역에서 동일한 모티프를 가진 공통된 형태가 나타나고 있고, 한 지역에서도 거의 유사한 형태가 반복해서 제작된 점으로 보아 이러한 형상을 공유하고 전하면서 표현할 수 있는 자는 특별한 지위에 있으면서 그들끼리만 통하는 어떤 관념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셋째, 의례의 구체적인 행위는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하여 샤만 등의 특정인이 패형 신체(神體)의 기본적인 윤곽을 쪼은 후, 기원자가 거기에 덧대어 가는 행위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 결과 현재 미완성처럼 쫀 윤곽만 남아 있는 것도 있고, 윤곽의 골이 넓고 깊어진 것도 있는 것이다. 다만 현재 미완성처럼 보이는 패형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제작 도중에 그만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신체로서 묘사된 것이면, 이것은 완성된 형태의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넷째, 기원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밝히기 어렵다. 시베리아나 예니세이강유역 등에서는 이것을 수렵과 관련된 의례로 보고 있으나 한반도 남부지방의 당시 사회가 농경을 기반으로 한 사회이고 이들 유적의 입지가 대체로 물과 관련이 깊은 것을 감안한다면 농경과 관련된 의례일 가능성이 크다. 네이머엉구쯔즈취(內蒙古自治區)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 북부나 알타이지역의 바위그림은 동물을 사냥하는 그림을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수렵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이에 반해 꾸앙씨쭈앙주쯔즈취(廣西壯族自治區)나 윈난(雲南省)에서는 취락, 전쟁이나 목축, 무용과 제사 등을 표현한 바위그림이 주로 그려져 있다. 북부 초원지대의 바위그림은 한반도의 울산 반구대와 유사한 점이 많다. 대곡리 역시 바다동물을 포획하거나 육지동물을 사냥하는 어로와 수렵을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이 바위그림을 새긴 집단의 수렵어로사회의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 중국의 바위그림 인면(人面)은 외형적인 형태에서 보는 한 한반도의 신상(神像)과 유사하다. 더구나 굴포리 집자리나 리토프카(Lidovka) 유적에서 출토되는 사람모양의 흙인형은 여러 특징에서 칠포리 등의 신상과 흡사하다. 따라서 고령 양전리를 비롯한 여러 유적에서 보이는 다양한 형태의 신상은 인물상이 도식적이고 추상적으로 변화된 것으로 판단된다. 시베리아 샤만의 무복(巫服)은 접신(接神)할 당시의 샤만의 외형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그 자체를 사람의 신체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무복은 가장 중요한 무구(巫具)로서, 악령으로부터 보호되는 갑옷이나 방패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점도 바위그림의 신상과 연결되는 의미이다. 결국 농경사회의 신상은 사람의 형상이 극도로 도식화된 것으로, 수렵채집사회의 사실적인 표현과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사실적 표현에서 추상적이면서 도식화’로의 방향성은 흙인형(土偶) 등 고고학 자료에서도 입증된다. 흙인형이 출토되는 유적의 시기를 고려할 때 ‘사실적 표현=수렵채집사회의 특징, 추상적이면서 도식화=농경사회’라는 등식의 성립이 가능하다. 수렵사회에서는 사냥의 직접적인 대상물을 새기고, 그것을 통해 주술적, 기원적으로 행해지던 의례가 일반적인 것이었다. 거기에는 식량을 조달하고자 하는 실용적인 목적에 충실히 따르는 것 이상의 다른 의미는 부여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림은 대상의 재현이자 대상 그 자체이며 소망의 표현임과 동시에 소망의 달성이기도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몽골 등 초원지대의 바위그림은 대부분 여기에 속한다. 그것이 신석기시대이건 청동기시대이건 간에, 그 사회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경우 정착생활과 함께 농경이 시작되면서 생활은 크게 변화하게 되었다. 인간의 힘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존재나 자연의 이치와 섭리를 깨달아 가게 되면서, 인간은 절대적인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단순히 자연물에 영적인 힘이 존재하고 있다는 초보적인 단계의 믿음이나 개인적인 주술·기원이 아닌, 집단이 공유하면서 숭배할 수 있는 보다 강하고 구체적이며 포괄적인 신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청동기시대 이후 한반도 남부지방은 농업생산을 주요한 경제활동으로 하는 고인돌〔支石墓〕사회이다. 농경은 가경지(可耕地)와 함께 물의 확보가 그 필수조건이다. 따라서 농경을 주로 하는 이들 바위그림 제작집단에게 물은 그 자체가 신성시(神聖視)되는 것이었다. 당시가 농경사회이고, 바위그림의 제작이 이러한 농경과 관련하여 풍요를 기원하는 의례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바위그림의 제작 시기, 즉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그림 그 자체만을 가지고 바위그림의 제작 시기를 단적으로 제시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절대연대 추정이 어느 정도 가능한 유적으로 함안 도항리 유적이 있다. 이 유적은 출토된 유물을 근거로 하여 기원전 5세기를 하한으로 보고 있다. 도항리에서 동심원이나 홈구멍을 제작한 집단이 그 무덤을 제작한 집단과 동일하다고 판단할 때, 동심원이나 홈구멍 제작의 연대를 기원전 5세기 무렵으로 볼 수가 있다. 다만 동일한 동심원이 제작된 고령 양전리나 경주 상신리의 경우 유적의 성격이 이와는 다르므로 양자를 동일시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고령 양전리에서는 여러 개의 동심원과 패형암각이 하나의 암면(岩面)에 배치되어 있으면서 서로 중복되지 않는 점에서 양자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서로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고령 양전리나 경주 석장동, 상신리 유적의 주변에 민무늬토기와 관련된 유적이 있다. 이들 민무늬토기는 대체로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 바위그림이 이 유적에서 생활한 주민들에 의해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따라서 전체적인 바위그림의 제작 시기를 청동기시대 후기로 보아도 무리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길) |
참고문헌 | 한국 선사시대 암각화의 성격(임세권, 단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4), 패형암각의 의미와 그 성격(이상길, 한국의 암각화, 한길사, 1996) |
구분 | 용어 |
사전명 |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청동기시대편) |
만족도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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