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용어명 가락동 고분(서울 可樂洞 古墳)
설명 서울시 송파구 가락동 일대에 위치한 초기 백제고분이 확인된 유적이다. 이 일대에는 아차산성(峨嵯山城), 몽촌토성(夢村土城), 풍납리토성(風納里土城), 춘궁리사지(春宮里寺址) 등의 유적이 산재해 있고, 암사동, 명일동, 가락동, 고덕동 등지는 신석기시대로부터 청동기시대의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이 지역 최초의 학술조사는 1916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행해졌으며, 이에 대해서는 간략한 보고서만 있을 뿐이다. 이 후 1963년 고려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집자리가 조사되면서 1969년 가락동 제1?2호분이 조사되었다. 1974년 서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단국대학교에 의해 제3?4?5?6호분이 조사되었다. 가락동 백제고분은 모두 6기가 확인되었으며, 백제 한성 도읍기로 알려진 인근유적과 인접하고 있어 백제 초기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1호분은 움무덤(土壙墓)으로 평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축조연대는 2~3세기로 알려져 있다. 분구(墳丘)의 형태는 방대형이며, 상당부분이 파괴된 상황이었다. 잔존하는 장변의 길이와 분구의 높이는 14.0×1.89m이다. 분구의 표토는 흑갈색의 점토였고 그 아래는 깬돌(割石)과 냇돌(川石)로 덮여있었다(葺石封土墳). 유물로는 쇠못(鐵釘), 꺾쇠, 손칼(刀子), 창, 띠고리 등이 있었으나 당시 용출수가 심하여 수습이 불가능하였다. 2호분은 움무덤으로서 축조시기는 2~3세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분구의 전체적인 형태는 방형(方形)을 이루고 있었으며, 기저부의 각변은 12.0~15.0m정도의 규모이다. 이 고분은 하나의 봉토 안에 4개의 묘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즉 단식 옹관(甕棺)과 3개의 움무덤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 4기의 무덤을 하나의 큰 봉토로 덮은 것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흑색항아리 2점과 회색 경질토기 4점, 꺾쇠, 작은 쇠칼, 띠고리, 쇠투겁창(鐵矛) 등이 있다. 3호분은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축조연대는 5세기 중엽으로 판단되고 있다. 이 고분은 조사전의 상태가 상당히 불량하여 그 형태를 잘 알 수 없었다. 돌방(石室)은 구릉의 경사면을 파고 들어가 방형으로 구축하였는데 규모는 길이, 너비가 3.7×3.65m이며, 남벽에는 2.9×1.3m의 널길(羨道)이 붙어 있었다. 널방의 4벽은 80~90㎝까지를 수직에 가깝게 쌓아올리고 그 위 부분은 안으로 좁혀서 쌓고, 마지막의 천장은 1매의 돌로 마감하였다. 출토유물은 토기뚜껑 2점, 바리(鉢) 2점, 항아리 1점과 쇠못 5점이 수습되었다. 4호분은 횡혈식석실분이다. 조사전의 봉토는 직경, 높이가 18.0×3.5m 정도로 거의 원형을 이루고 있었다. 유구의 규모는 2.6×2.3m 크기의 방형 널방(玄室)에 널길(羨道)이 널방의 동남쪽에 연결되어 있었다. 유물은 회청색 경질의 큰항아리와 승석문(繩蓆文) 회황색 연질항아리 등이 출토되었다. 5호분은 횡혈식석실분으로서 축조연대는 대개 4세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봉토의 규모는 직경, 높이가 17.0×2.2m이며, 널방은 길이, 너비, 높이가 2.8×2.25×1.7m의 크기로 방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그리고 남벽의 중앙에 널길이 마련되어 있었다. 널받침(棺臺)이나 주검받침(屍床臺)은 설치되어 있지 않았으나 동벽에 베개(頭枕)로 보이는 돌 하나가 있었다. 유물로는 금동고리 4점과, 쇠칼 1점, 기와편 그리고 굽다리접시(高杯) 뚜껑의 입술편이 수습되었다. 이전에는 단순히 움무덤이라고 불렀던 유적을 즙석봉토분(葺石封土墳)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와 유사한 유적으로는 석촌동 3?5호분, 석촌동 파괴분 등이 있다. 이들 유적은 단일 봉토 안에 다장(多葬)이 이루어지면서 매장주체부가 깊은 움이 아니라 흔적만 나타나는 움이거나 아예 지상으로 올라오고 봉토 중간이나 상부에 즙석이 가해진 것들이다. 발생시기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약간씩 견해의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3~4세기경에 유력 토착인이 사용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전통적인 움무덤의 봉토 위에 깬돌이나 냇돌을 덮는 새로운 요소는 선행하는 돌무지무덤(積石塚)에서 채택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 유적은 한 강유역에서 토착민과 고구려계 이주민들이 접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며, 구조상으로 보아 매장주체부는 토착적인 것이고 외형만 돌무지무덤을 본 따서 만든 토착민의 묘제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百濟初期 漢城時代 古墳에 관한 硏究(林永珍, 韓國考古學報 30, 韓國考古學會, 1993), 蠶室地區 遺蹟 發掘調査 報告(蠶室地區遺蹟發掘調査團, 1976), 可樂洞百濟古墳 第一號?第二號墳 發掘調査 略報(尹世英, 考古學 3, 韓國考古學會, 1974), 昭和2年度 古蹟調査報告 第二冊(朝鮮總督府, 1936)
구분 용어
사전명 한국고고학사전(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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