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용어명 | 가야문화(伽耶文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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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가야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삼국시대 한반도 남부에 존속했던 소국(小國), 혹은 소국연합체(小國聯合體)의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가야 역사에 대해 상세히 기록된 문헌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그 고지(故地)에는 고고학 자료가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어서 그 문화상의 복원 뿐 아니라 역사의 재구성도 시도되고 있다. 하지만 명칭부터 ??加耶??, ??伽耶??, ??伽倻??, ??加羅??, ??狗邪??, ??駕洛?? 등으로 일관되지 않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지칭하는 실체와 존재했던 시기가 기록물에 따라 일정하지도 않다. 때문에 가야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항상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자체적인 역사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가야에 대한 기록은 백제나 신라 혹은 왜의 역사 중에 단편적으로 언급된 정도이므로 가야사는 항상 주변국의 관심과 입장에 의해 왜곡되어 왔다. 그래서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가야사의 위상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최근 가야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와 연구성과가 급증하고 역사학계에서도 가야의 자체적인 역사를 집중적으로 논의해 온 결과, 삼국시대의 역사에서 가야의 역할이나 비중이 결코 작지 않았으리라고 여겨지고 있다. 특히 고대 가야의 문화는 주변국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이 최근 고고학적 발굴성과로부터 얻어낸 공통된 견해이다. 가야에 대한 연구성과를 살펴보면, 첫째 가야(加耶) 혹은 가라(加羅)라는 명칭에 대한 것으로, 대개 이른 시기에는 김해의 금관가야(金官伽耶)를, 늦은 시기에는 고령(高靈)의 대가야(大伽耶)를 지칭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둘째, 가야로 불리는 정치체는 삼한시기 변한의 여러 소국들이 발전하여 성립하였고, 이 정치집단들은 낙동강(洛東江) 서쪽지역에 주로 분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셋째, 가야는 다른 삼국과 달리 중앙집권화(中央集權化)된 영역국가를 성립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러 개의 소국으로 분립된 채 각자 성장해 나갔다고 본다. 그러나 늦은 시기가 되면 대가야(大伽耶)나 아라가야(阿羅伽耶) 혹은 소가야(小伽耶)와 같이 상대적으로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한 가야국이 등장하여, 이들에 의해 가까운 지역집단이나 혹은 소국들이 느슨하게 통합되기도 했을 것이라는 점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래서 가야는 연맹체를 형성하였다고 보는데, 다만 그 시기와 연맹체의 범위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원래 신라와 가야지역은 고구려나 백제보다 광역의 정치체로의 통합이 시기적으로 늦게 달성되었다. 특히 가야사회는 매우 늦은 시기에 이르기까지 소국단위로 성장해 왔으며,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연맹체를 구성했다고 주장되어 온 점에서 독특한 사회적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야의 사회적 특성은 가야 지역의 독특한 환경적 여건과 한반도 동남부라는 지리적 위치와 관련시켜 이해할 수 있다. 가야의 본거지인 소백산맥 이동(以東)과 낙동강 서쪽지역 일대는 지형적으로 첫째, 산줄기로 둘러싸여 폐쇄되거나 반폐쇄된 분지로 구성되어 있고, 둘째 각 분지마다 자원분포가 불균등하며, 셋째 각 분지는 일정한 방향으로만 교통로가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폐쇄된 분지라는 지형적으로 한정된 영역 안에서 정치체가 성장하게 되므로 늦은 시기까지 소국의 규모로 남아있게 될 여지가 많은 것이다. 또한 각 분지마다 한정된 자원을 소유할 수밖에 없으므로 각 분지의 정치체는 제한된 교통로를 이용하여 교역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교역망은 경제적인 교환망으로서만 기능하지 않고, 소국들 사이의 사회적?정치적 관계망으로 발전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가야 소국들은 한반도 동남부 해안을 포함하여 낙동강, 남강, 섬진강 수계를 끼고 분산되어 있었으므로, 해안과 내륙, 나아가 한군현이나 중국 본토와 일본 각지로 통하는 교통망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삼한시기 및 4세기경의 김해 금관가야와 5~6세기경의 고성?사천지역 소가야는 국제적인 해상 교역망과 영호남의 내륙을 연결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 리라 추측된다. 그러한 연유로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양동리 고분군 등 덧널무덤(木槨墓)단계의 대형묘에서는 다량의 낙랑계(樂浪系) 및 왜계(倭系) 유물이 출토되며, 5~6세기 고성지역 고분문화에서 신라계 문화와 왜계 문화요소가 혼합되는 양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정학적인 여건은 가야문화 자체가 국제성을 띠게 되고 또한 주변국들에게 문화적인 영향을 끼치는 배경이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가야의 문화적 특성은 두 가지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전체 가야사회의 문화적 특성이 어떠한지를 파악하는 것이 한 가지 이해의 방향이라면, 다른 하나의 관점은 개별 가야소국의 문화는 어떠한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가야문화의 원형은 선사시대부터 파악되어야 하겠지만, 우선은 가야소국의 직접적인 선구라고 할 수 있는 변한 소국들의 문화부터 논의될 수 있다. 그러나 삼한시기에 있어서 변한의 문화를 신라의 모태가 되었다고 여겨지는 진한의 문화와 별개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기록대로 진한과 변한이 제사를 지내는 것 이외에는 서로 섞여 살면서 언어나 습속까지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면, 고고학적인 자료상으로도 두 사회의 차이점을 지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원삼국시대의 분묘문화와 토기문화상으로는 지역적인 차이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는데, 그것이 진한과 변한 양 문화상의 차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가령 3세기대부터 경주의 사로국 일대에서는 덧널무덤 평면형이 아주 길어지는 특징이 나타나는 반면 김해나 함안지역에서는 그러한 변화를 볼 수 없다든지, 무덤에 부장하는 그릇의 종류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그릇의 제작방법이 상이하다든지 하는 예를 들 수 있지만 그것을 진한과 변한 문화상의 차이에 대입하기는 어렵다. 5세기 이후부터 영남지방에서는 낙동강을 경계로 신라와 가야의 문화가 뚜렷이 대비된다. 특히 고고학적으로 많이 조사된 고분문화를 보면 신라와 가야의 문화적 특성이 분명하게 구별됨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중심지에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 木槨墳)이 주된 묘제이지만 돌덧널무덤(石槨墓)도 경주를 비롯한 낙동강 동안 일대에 널리 퍼져 있다. 가야의 묘제도 돌덧널무덤이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는데, 신라와 가야는 덧널의 형태와 그 배치 방법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가야문화의 전반적인 특성은 토기의 조형성(造形性)이나 고분 부장 철기의 종류와 형태, 마구류의 형식, 관모(冠帽)의 양식, 갑옷의 종류 등에서도 드러난다. 그런데 가야소국들이 전반적으로 유사한 문화를 지니게 된 것은 단순히 지리적인 근접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즉 가야소국들 사이에 이루어진 끊임없는 정치적?경제적 상호작용이 그러한 문화적 동질성을 나타나게 했고 수십 년 이상 유지시켰을 것이다. 개별 가야국의 문화적 특성 역시 고고학 자료를 통해 충분히 지적될 수 있다. 가야는 국에 따라 중심고분군의 입지가 다르고 덧널의 배치방법, 순장법 등에 차이가 있다. 물론 토기양식에 있어서도 4세기대 금관가야식토기가 있는가 하면, 5~6세기대 대가야식토기, 아라가야식토기, 소가야식토기 양식이 뚜렷이 구분된다. 또한 거시적으로 보아 교역 및 해상활동을 많이 한 해안의 문화와 내륙의 문화는 서로 대비되는 점이 있다. 가야하면 흔히 풍부한 철생산을 연상하게 되지만 사실 철생산이 풍부했던 소국과 그렇지 못했던 소국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이와 같이 가야문화는 전체적 관점에서 공통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는 한편 개별 가야소국마다 문화적 개성이 분명했다고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 가야문화도록(한국고대사연구회, 경상북도, 1998), 加耶文化史 硏究(權珠賢, 啓明大學校博士學位論文, 1998), 加耶史硏究(朱甫暾 外, 慶尙北道, 1995), 加耶聯盟史(金泰植, 一潮閣, 1993) |
구분 | 용어 |
사전명 | 한국고고학사전(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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