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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고학사전(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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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명 가마터(窯址)
설명
가마터란 각종 토기, 도기, 자기, 벽돌, 기와 등을 넣고 고온에서 소성하였던 구조물을 말한다. 또한 목탄을 만들기 위한 시설물도 목탄가마 또는 탄요(炭窯)라 하여 그 범주에 넣는다. 
흔히 가마라 하면 연료를 연소시키는 방(燃燒室)과 소성될 토기가 야적되는 방(燒成室)이 분리되고 소성실이 밀폐 가능한 시설물이 되어야 한다. 이점이 연료와 토기를 함께 야적해 놓고 불을 지피는 한데가마(露天窯)와는 다르다. 철기시대에 처음 등장하는 회색토기의 제작을 위해서는 반드시 밀폐할 수 있는 가마시설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때부터 토기가마를 사용했을 것이다. 최초의 토기가마는 중국 제도기술이 요동과 한반도 서북지방을 거쳐 한반도 남부까지 확산되어 들어오는 것과 관련되리라고 추측되지만, 그 자세한 과정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신석기시대 앙소문화(仰昭文化) 조기(早期)부터 정비된 가마시설에서 토기를 제작하였다. 西安市 半坡村 유적에서 발견된 것 같은 토기가마를 수식만두요(竪式饅頭窯)라고 부르는데, 연료를 태우는 연소실이 소성실 바로 아래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가마는 서주(西周)시기까지 토기가마의 주류였는데, 발달된 가마형식에 비한다면 아무래도 열효율이 떨어지는 편이다. 
중국의 도자사 연구자들은 토기가마를 열기가 안내되는 방식과 가마의 평면형태 2가지의 기준에 의해 분류한다. 이중에도 불길의 안내방식이 중요한데, 신석기시대 토기가마처럼 불길이 바로 소성실로 올라가는 승염식(昇焰式)에서, 열기가 수평으로 전달되거나 굽이쳐 나가게 함으로서 가마 안에서 열기가 오래 머무를 수 있도록 한 평염식(平焰式)이나 도염식(倒焰式)으로 발전된다. 평면형에서는 만두요가 가장 이른 형식이고 전국시대 이후부터는 타원형의 원요(圓窯)나 긴 세장방형의 용요(龍窯)가 나타난다.
중국에서의 가마는 이미 앙소문화 때부터 알려져 있는데 수혈요(竪穴窯)는 서주시대(西周時代)에 보이고,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서면서 원요(圓窯)와 함께 등요(登窯)가 나타난다. 수혈요는 화당(火堂)이 요실(窯室) 바로 밑에 있으므로 요내(窯內)에 열기의 체류시간이 짧아서 고온소성이 불리하다. 원요는 화당-화구-요실이 수평으로 나란히 배치되고, 다만 요실이 한단 높게 만들어진다. 이 점이 요실의 면적을 넓힐 뿐만 아니라 요내의 열기가 빨리 나가 버리는 것을 막아주며 열효율을 좋게 만든다. 등요(登窯)는 긴 터널형이고 연소실-화당-요상이 일직선으로 배치된다. 요상(窯床)이 일정한 경사도를 갖고 있으며 요상 끝에 열기를 막는 일종의 담장을 두어 열기를 1번 굽이치게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가마를 크게 한데가마(露天窯)와 굴가마(登窯)로 나눈다. 신석기시대의 토기가마는 한데가마로 생각되나 아직 발굴된 자료가 없어 빗살무늬토기를 제작했던 시설물을 확인할 수 없다. 청동기시대 역시 한데가마를 사용했을 것으로 보며,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가마로 추정되는 유구가 있었으나 분명하지 않다.
한국에서 발견된 가마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철기시대에 속하는 김해 대성동(大成洞) 가마터인데, 이 토기가마는 구조가 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한반도에 최초로 전달된 가마의 구조가 어떠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철기시대 전기의 가마로는 광주 신창리 유적과 승주 대곡리 유적에서 각각 발견되었다. 신창리 유적의 가마는 굴가마는 아니지만 경사면이 완만한 개방요가 발견되었다. 대곡리 유적의 가마도 역시 완만한 경사도를 가진 가마이다. 그 뒤를 이은 가마가 진천 삼룡리 유적과 해남 군곡리 유적에서 발견된 가마들이다. 여기에서는 굴가마로서의 형태를 어느 정도 갖추게 된다. 진천 삼룡리 가마는 지하식과 반지하식으로 가마의 형태는 타원형이다. 
그러나 원삼국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진천 산수리(鎭川 山水里)의 가마를 보면, 타원형의 평면을 가진 원요에 속하고, 가마바닥이 경사져 올라가는 굴가마(登窯)의 일종이다. 불길의 안내방식에서 보면, 이 산수리 가마들은 연소실이 소성실과 일직선으로 배치되기는 하지만, 연소실에서 소성실로 이어지는 부분이 계단식으로 올라가게 하였기 때문에 완전한 평염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백제지역에서는 진천 산수리 가마와 비슷한 시기에 해당하는 전남 승주군(昇州郡) 대곡리(大谷里) 취락유적의 가마가 있고, 훨씬 늦은 시기에 속하는 고창 운곡리(雲谷里) 유적과 익산의 신용리(新龍里) 유적의 가마가 있다. 운곡리 가마는 평면형태가 원형에 가깝고, 가마 바닥은 완전 평면으로, 그 둘레에 도랑을 판 특이한 구조이다. 이에 비해 신용리 토기가마는 산수리 가마보다 훨씬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는데, 뒤에 설명할 경주 손곡동(蓀谷洞) 유적의 예와 거의 유사하다.
가야지역에서는 창녕 여초리(余草里)의 토기가마가 유명하다. 4세기 후반경으로 편년되는 여초리 유적의 가마는 기본형이 산수리와 같지만, 보다 세장하고 연소실이 소성실과 동일한 평면에 놓여지는 등 훨씬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여초리 가마보다 더 늦은 시기에 속하는 토기가마가 경주 손곡동 유적에서 다수 조사되었다. 손곡동의 토기가마들은 앞에 말한 익산 신용리 유적의 가마들과 거의 동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각각 신라와 백제의 영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속하는 두 유적의 가마 구조가 극히 유사하다는 점이 주목된다. 아무튼 이들 가마는 산수리?여초리 가마와 함께 기본형이 장타원형의 굴가마라는 점에서 동일한 계통에 포함된다. 산수리의 것보다는 더 길어지고 여초리의 것이 더 발전된 것이 분명한데, 손곡동과 신용리의 가마는 가마바닥(窯床)의 경사도가 일률적이지 않고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가면서 경사도가 훨씬 커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확실히 가마 안에 열기를 오래 체류시킴으로서 효율을 높이기 위한 배려라고 생각된다.
삼국시대 가마 중에서 특별한 예가 충남 부여 정암리(亭岩里) 가마이다. 이 가마는 백제시기에 기와를 굽던 가마인데, 가마의 구조가 중국 수당시대(隋唐時代)에 북방지역에서 유행하던 형식에 속하는 것이 흥미롭다. 한반도 남부지역의 삼국시대 가마는 모두 타원형의 평면형을 가진 굴가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가마의 구조는, 고분시대 일본으로 한국 남부지역의 도공들이 건너감으로써 그 지역에서 재현된다. 그래서 일본 고분시대(5세기 전반 경)로부터 헤이안시대(平安時代)까지 한국의 도질토기 계통인 스에키(須惠器)를 소성하던 가마의 기본 구조로 정착한다.
통일신라시대의 토기가마는 경주 망성리, 화산리, 덕산리, 서울 사당동, 부산 두구동, 충남 보령 진죽리, 전남 영암 구림리 등지에서 알려졌다. 그 중 발굴된 보령 진죽리(眞竹里) 유적과 영암 구림리(鳩林里) 유적의 토기가마는 삼국시대 말기의 가마와 비교해서 구조적인 차이를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이후 고려의 가마는 자기를 굽는다는 점에서 토기가마와는 격을 달리하며 구조적인 면에서 훨씬 진보한다. 우선 가마가 중국의 자기가마인 용요계통과 흡사한 세장방형의 대형가마로 발전하게 됨을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까지도 토기가마는 길이가 불과 10m 미만이었지만 초기 청자를 생산했던 소위 해무리굽 청자 가마의 경우, 용인 서리(西里) 유적에서 발굴된 것을 보면, 길이가 약 40m로 추정된다. 가마벽은 반듯한 세장방형으로 벽돌을 쌓아 만들었고 양질의 자기를 굽기 위해 갑발을 만들어 쓸 정도로 요업기술이 발전하였으며, 중?후기의 청자를 굽던 가마 중에는 가마의 길이가 80m를 넘는 것들이 있다. 
조선시대 들어와서도 가마는 청자가마의 기본구조를 계승하면서 발전하였다.
참고문헌
百濟時代의 窯址硏究(崔夢龍?崔秉鉉 編, 文化財硏究所, 1988), 新羅?加耶土器窯址(李殷昌, 曉星女子大學校博物館, 1982), 中國古陶瓷論文集(中國硅酸鹽學會 編, 文物出版社, 1982)
구분 용어
사전명 한국고고학사전(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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