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용어명 목간(木簡)
설명 문자를 기록하기 위해 만든 목제품을 말한다. 고대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종이가 보편화되기 이전에 가장 널리 사용된 서사(書寫) 재료이다. 나무를 서사 재료로 사용하는 방식은 고대 중국에서 최초로 기원하였는데, 이것이 한반도를 경유해 일본 열도까지 전파되었다. 현재 중국학계에서는 이러한 서사 재료를 간독(簡牘)이라고 부르며 한국과 일본학계에서는 목간(木簡)이라고 부르고 있다. 목간보다 종이가 혁신적인 서사 재료이지만, 종이는 내구성이 약해 오늘날까지 보존된 고대의 종이는 극히 적다. 물론 목간도 특수한 조건하에서만 보존된다. 극히 건조한 지역이거나, 그 반대로 산소가 차단되어 목재의 부식이 지연된 매우 습한 유적, 예를 들어 우물, 연못, 저수지, 배수로 등에서 주로 출토된다. 금석문은 재료의 성격상 오랫동안 기억되고 전승되기를 기대하면서 어렵게 문자를 각인한 것이기 때문에 그 기록 내용이 특수하다. 이른바 정치적, 종교적 기념비가 대부분이다. 또한 금석은 무겁기 때문에 정보 전달력이 공간적으로 매우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목간은 재질이 나무여서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또 가벼워서 이동이 가능한 서사 재료이기 때문에 목간에 기록될 내용은 앞서와 같은 재료적 제약을 크게 받지 않는다. 이로 인해 목간에는 개인의 간단한 글자 연습에서부터 국가의 복잡한 행정 문서에 이르기까지 고대 사회의 각종 기록물이 모두 확인된다. 더욱이 목간의 묵서는 당대인의 육필이며, 그 내용이나 형태, 출토지 등을 통해 목간의 제작과 폐기에 이르는 목간의 일생을 추적할 수 있기 때문에 기록 내용 외에 문자 생활 전반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한국 고대 목간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안압지에서 1975년에 처음으로 발굴되었다. 이후 전국 각지의 유적에서 출토 사례가 증가해 현재 묵서(墨書)가 있는 목간만 해도 250여 점에 이른다. 6세기 이후의 고대 목간은 현재 전국 각지에서 발굴되어 그 출토 예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백제는 능산리를 비롯해, 관북리, 쌍북리, 궁남지 등 백제의 마지막 도성이었던 부여에서 50여 점 이상이 출토되었다. 한편 현재 발굴된 한국 고대 목간의 거의 대부분은 신라 목간이다. 경주의 안압지, 월성해자와 같은 신라의 도성 유적을 비롯해 하남 이성산성, 함안 성산산성 등 지방의 관아 유적에서도 목간이 발굴되었다. 신라 목간은 백제 목간에 비해 출토 점수도 많고, 목간출토 유적이 시대별로, 또 지역별로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이로 인해 신라 목간 문화의 변천 과정이나 목간 제작 및 서사 방식에 나타나는 지역별 차이까지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 신라 목간 출토 점수는 더욱 증가하리라 생각되며, 그에 비례하여 신라사 연구도 더욱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삼국 중에서도 신라는 한자 문화권의 가장 변방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신라에서조차도 영일 냉수리비로 알 수 있듯이, 이미 6세기 초에 한자를 사용해 왕명과 사법 판결 등을 문서 형식으로 전달하고 보존하는 초보적인 문서 행정을 시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종이 보급이 일반화되기 이전에도 이미 편철간이나 목간을 활용한 문서행정이 일정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목간 문화가 건너간 일본에는 현재 목간 출토 점수가 무려 30만 점을 상회함에도, 다면 목간의 출토 예는 극히 희귀하다. 원주형 목간은 발견된 사례가 극히 드물다. 따라서 다면 목간과 원주형 목간은 한국 고대 목간 문화를 대표하는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월성해자와 안압지 목간의 대비로 본다면 특히 6~7세기 한국 고대의 중기 목간 문화를 상징하는 유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김병준)
참고문헌 고대의 목간 그리고 산성(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국립부여박물관,2009), 한국목간자전(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1)
구분 용어
사전명 한국고고학 전문사전(고분유물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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