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용어명 자기 가마(磁器窯)
설명 청자, 분청사기, 백자와 같은 자기를 굽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물로 연료를 태우는 아궁이, 그릇을 재임하는 번조실, 연기가 배출되는 굴뚝 부분으로 구성된다. 번조실 좌측 혹은 우측면에는 가마로 출입할 수 있는 시설을 두기도 한다. 가마는 지상에 설치되며 고려 시대 초기에는 벽돌로 축조되었지만 이후 진흙이 사용되었다. 대체로 반원형의 터널 모양으로 약간 경사진 곳에 설치하여 땔나무가 잘 탈 수 있도록 아궁이에 비하여 굴뚝 부분이 높은데, 이러한 가마를 등요 혹은 오름 가마라고 부른다. 청자 가마에 비하여 분청사기나 백자 가마의 크기가 대체로 약간 크지만 시기나 지역에 따라 편차가 크다. 고려 초기에는 가마 내부에 아무런 구조물이 없었지만 조선 시대에는 불길을 갈라 고르게 퍼지게 해주는 원주圓柱 모양의 불 기둥이 등장하였다. 후기에는 점차 개수가 많아지거나 기둥의 위쪽을 벽처럼 막아 번조실을 몇 개의 작은 독립된 공간으로 분할하여 열효율을 높이는 구조로 변화되었다. 고려 시대 청자를 제작했던 가마터는 중부와 남부 지방에 수십 곳이 분포하지만, 한 지역에서 청자를 제작한 수량으로 보면 강진과 해남, 부안이 최대의 규모를 이룬다. 이 외에 가마는 각 지역의 청자 수요를 담당하는 소규모 제작지가 대부분이다. 강진 사당리에는 비색 청자와 상감 청자가 전성을 누리던 12~13세기의 가마가 집중되어 있다. 부안은 고려 중기에서 말기까지 운영되었으며, 현재 전하는 최고의 상감 청자 다수가 이곳에서 제작되었다. 해남은 화원면과 산이면 일대에서 일상에 필요한 단순한 종류의 조질 청자를 주로 만들었다. 청자 가마는 시기에 따라 재료, 크기, 구조에서 차이를 보이기도 하며 지역, 지형, 주변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다른 특징이 나타난다. 고려 초기에 청자를 제작한 경기도 용인 서리, 시흥 방산동, 여주 중암리, 황해도 배천 원산리 가마는 최대 길이 4,000cm 내외이다. 장방형 벽돌을 재료로 축조한 대형으로 밝혀졌다. 이 가마를 전축요塼築窯 혹은 벽돌 가마라고 부르는데, 중국 저장성浙江省 웨저우요越州窯와 동일한 재료 및 유사한 구조를 갖추고 있어서 웨저우요의 영향이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서남해안 지역에서는 진흙으로 만든 소형의 토축요土築窯 혹은 진흙 가마가 새롭게 축조되었고, 전축요를 대체하며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강진의 가마는 길이 1,000cm 정도로 전축요에 비하면 크기가 작아졌다. 축조와 이동 설치가 쉽고 불 조절이 용이하며 소량의 수요에도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토축요의 유행은 고려 말기에도 지속되었으며 가마의 설치 시기와 지역에 따라 길이가 2,000cm를 넘기도 하는 등 크기는 일정하지 않다. 청자의 전성기인 12~13세기 비색이나 화려한 상감 장식의 명품들이 모두 토축요에서 제작되었다. 연료는 나무이며 강진과 부안에서는 요도구인 갑발을 사용하기도 하였고, 서울, 용인, 인천, 대전, 진천, 음성, 양산, 부산, 해남 등 전국 지방의 청자 가마에서는 그릇만을 포개어 쌓거나 가마 바닥에 한 단으로 놓아 제작하였다. 굽바닥 3~4곳에 내화토耐火土를 받쳐 서로 달라붙는 것을 방지해 굽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강진과 부안 가마에서는 규석을 재료로 잘게 부수어 몇 조각을 정교하게 받쳤다. 가마 바닥에 원반圓盤 혹은 원주 모양의 도침을 깔아 그릇 바닥이 지저분해지는 것을 방지하고 가마 위쪽의 높은 온도를 최대한 활용하였다. 조선 시대 15~16세기에 운영된 분청사기 가마는 인천 강화, 경기도 가평·광주·안성·양주·여주·연천·용인, 충청북도 괴산·보은·영동·옥천·진천·충주, 충청남도 공주·대덕·대전·보령·부여·서산·아산·예산·연기·천안·청양, 전라북도 고창·김제·부안·완주·임실·진안, 전라남도 강진·고흥·광산·광주·곡성·나주·담양·무안·영광·영암·장성·장흥·함평·화순·해남, 경상북도 경산·경주·고령·문경·상주·예천·의성·청도·칠곡, 경상남도 광산·김해·밀양·부산·산청·양산·울산·울주·진주·진해·통영·하동, 강원도는 강릉·철원·횡성 등에서 확인되며, 이 외에도 수많은 곳에 산재한다. 대체로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 중부와 남부 지방에 집중되어 있고, 북부 지방에는 그 수가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마 분포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세종실록지리지』이다. 이 책은 1424~1432년 사이 전국의 가마를 조사한 것으로 당시 자기소 139개소와 도기소 185개소 등 324개의 도자소가 기록되어 있다. 자기소, 도기소가 적혀 있는 토산 조에는 전국 도자소의 위치를 동서남북으로 구분하여 표기하였고, 각 지역에서 생산되는 도자기를 상품, 중품, 하품으로 나누어 기록하여 가마의 분포와 위치, 숫자, 품질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지리지에는 경기도 34개소를 비롯하여, 충청도 61개소, 경상도 71개소, 전라도 71개소, 강원도 14개소, 황해도 29개소, 평안도 24개소, 함길도 20개소가 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지금의 분청사기 가마터 분포와도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가마터 발굴은 1963년 한국 학자들이 전라도 광주 가마터를 비로소 발굴하였고 본격적인 학술 발굴은 1990년대부터 진행되었으며, 조사 결과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가마의 구조와 규모는 유사하기도 하지만 운영 시기 혹은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분청사기 가마도 진흙으로 축조되었는데, 보령 평라리 15세기 가마는 길이 3,100cm, 너비 110~120cm로 확인되어 고려 시대의 가마와는 크기에 차이가 있다. 16세기 전반까지 운영된 공주 학봉리 가마도 길이 1,900~4,200cm, 너비 100~230cm로 길이가 길어지고 너비가 넓어지는 등 대형화되었다. 16세기 천안 양곡리 가마 역시 길이 1,830~2,050cm, 너비 130~180cm로 확인되어 시간이 흐르며 가마의 너비가 넓어지는 등 변화되는 현상이 뚜렷하다. 가마의 길이와 너비는 일정하지 않지만 전체의 모습은 길이가 길고 너비가 좁은 등요였다. 특히, 너비는 가마의 앞쪽보다 뒤쪽에서 약간 더 넓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불길이 원활하고 신속하게 빠져나가 온도를 올리기에 유리하도록 개선된 것이다. 바닥에 굵은 모래를 얇게 깔아 그릇이 지저분해지는 것을 방지하였고, 땔나무의 재티가 그릇에 붙어 지저분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갑발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그릇을 포개어 쌓아 구웠다. 조선의 백자 가마 역시 경기도를 비롯하여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중부와 남부 지역 곳곳에 분포한다. 군포, 산본, 안성, 용인, 원주, 양구, 충주, 보령, 대전, 영동, 승주, 장성, 곡성, 부여, 무안, 순천, 영암, 나주, 보성, 남원, 장흥, 안동, 산청, 경산, 하동, 사천, 울산, 문경 등 곳곳에서 가마터가 발굴되었으며, 서유구徐有榘(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도 광주, 양근, 죽산, 안성, 청주, 천안, 목천, 영동, 전의, 정산, 연기, 덕산, 남포, 예산, 임실, 곡성, 순천, 광주, 함평, 고창, 능주, 전주, 금구, 흥덕, 부안, 나주, 남평, 군위, 성주, 의흥, 하동, 양구, 서흥, 봉산, 안악, 평양, 선천 등에서 자기를 제작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전국 각지에서 백자 가마가 운영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곳이 경기도 광주에 설치된 관요官窯이다. 사옹원司饔院의 사기 제조장沙器製造場인 관요를 설치하고 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 왕실용과 관청용 백자의 제작을 관리하고 감독하였다. 제작지인 광주에 작업을 감독하는 관리를 파견하고 관청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사옹원의 분관인 분원分院이다. 관요는 1466~1467년 사이에 설치되었으며 사옹원 소속의 사기장沙器匠 380명이 백자를 제작하였다. 사기장은 호戶와 봉족奉足을 합하여 1,140명이 정원으로 분삼번입역제分三番入役制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해마다 핑계를 대고 도망하여 17세기 전반에는 821명으로 줄었고 19세기 후반에는 총인원이 552명으로 감소하는 등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수가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 말기 분원의 인적 구성은 감관監官을 비롯하여 원역員役, 사령使令이 27명, 자기의 제작에 관계되는 장인은 변수邊首, 조기장造器匠, 마조 장磨造匠, 건화장乾火匠, 수비장水飛匠, 연장鍊匠, 참역站役, 화장火匠, 조역助役, 부호수釜戶首, 감화장監火匠, 화청장畵靑匠, 연정鍊正, 착수장着水匠, 파기장破器匠 등 108명, 기타 잡역으로는 공사군工沙軍, 운회군運灰軍, 허벌장許伐匠, 부회군浮灰軍, 수토재군水土載軍, 수토감관水土監官, 수세고군收稅庫軍, 노복군路卜軍, 진상결복군進上結卜軍, 감고監考 등 417명이 있었으며, 총인원 552명의 거대한 조직이지만 작업만큼은 고도로 분화되어 있었다. 관요 백자의 제작은 봄부터 가을까지 지속되었으며 사옹원 소속의 종8품從八品 봉사奉仕를 분원으로 파견하여 사기장과 백자의 제작을 관리하였는데, 이를 번조관燔造官 혹은 분원낭청分院郞廳이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제작하던 자기의 수량은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19세기 후반에 편찬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 특별한 행사나 목적에 의해 추가되는 별번別燔의 제작량을 제외하고 일상적인 경우 1,327죽(竹, 1죽은 10개), 즉 13,270개를 만들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재료인 백토白土는 사현沙峴, 양근楊根, 양구楊口, 봉산鳳山, 진주, 선천, 충주, 경주, 하동, 곤양, 광주廣州 등 전국 여러 곳에서 가져다 사용하였다. 관요는 연료인 땔나무의 조달을 위하여 10년 정도를 주기로 광주 내의 수목이 무성한 곳을 찾아 이전하였으나, 1752년부터는 현재의 남종면 분원리分院里에 가마를 고정시켜 나무를 운반해 사용하였다. 관요는 이설 주기인 10년을 기준으로 8개 정도의 가마가 동시에 운영되었는데, 이 중에는 왕실용의 질 좋은 백자를 갑발에 넣어 굽던 소수, 즉 갑기 번조요(匣器燔造窯, 줄여서 갑번요 匣燔窯)와 관청 등에서 사용할 상대적으로 질이 좋지 못한 백자를 다량 제작하던 여러 개의 가마, 즉 상번常燔으로 조질粗質의 관청용 일상 용기를 다량 제작했다는 의미의 상기 번조요(常器燔造窯, 줄여서 상번요 常燔窯)로 나뉜다. 가마는 10~40° 정도의 낮은 구릉이나 가파른 경사면에 앞이 낮고 뒤가 높게 축조되었으며, 천장이나 외면이 남지 않아 구체적인 외형은 확인되지 않는다. 크기는 대체로 길이 1,000~3,000cm로 차이가 있고, 너비는 110~600cm로 운영 시기에 따라 변화되기도 하며 가마의 아래쪽과 위쪽의 편차를 크게 하여 불길이 원활하게 빠져나갈 수 있게 하였다. 번조실은 몇 개로 세분되고 좌우측에 출입구가 설치된 연실連室이며, 맨 마지막 공간은 초벌용 칸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아궁이는 너비에 비하여 길이가 길며, 연기가 빠져나가는 배연구는 4~5개 정도가 많지만 일정하지 않다. 조선 시대의 가마는 진흙을 재료로 축조하며 아궁이와 굴뚝 부분에 석재를 혼용하기도 하였다. 가마 내부에 불길을 분산시켜 효율적으로 사용하고자 불 기둥을 두었으며 점차 개수가 늘어가는 현상을 보인다. 번조실 사이에 격벽을 두어 열효율을 높였고, 내벽에 백토를 얇게 덧대어 바르거나 칠하여 내구성을 높이며 잡물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바닥에는 입자가 작은 모래를 깔아 갑발이나 그릇 받침의 수평을 유지하기도 하였는데, 갑발은 원통형으로 높이 10~20cm, 직경 20~30cm, 두께 1~2cm가 주류를 이룬다. 고려 시대에는 갑발을 차곡차곡 포개어 쌓아 청자를 구웠으나, 조선 시대에는 바닥에 한 단으로 늘어놓은 후 위에 점토로 만든 뾰족한 삿갓 모양의 뚜껑을 씌웠다. 받침류는 높이 1~3cm, 직경 8~13cm 정도의 원반형과 바닥의 높이를 비스듬하게 다듬은 경사진 받침도 다수이다. 원반형은 갑발의 안 바닥이나 가마 바닥에 놓고 그릇을 올려놓는 경우에 사용하였으며 주로 조선 전기의 가마에서 발견되고, 경사진 받침은 바닥 경사면의 기울기를 가마의 경사와 일치시켜 작업을 편리하게 변화시킨 것으로 조선 중기와 후기 일부 가마터에서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높이 5~15cm, 직경 7~10cm의 원통형과 속이 빈 원통 모양의 윗면을 톱니처럼 깎아 뚜껑 제작에 사용된 예도 출토된다. 조선 후기 가마에서는 고리형이나 굽이 높은 접시 모양의 받침도 발견된다. 고려 초기에 중국 웨저우요의 영향으로 축조, 운영된 대형 의 전축요를 제외하면, 토축요가 대세를 이루어 꾸준히 변화를 거듭하였다. 일련의 변화는 효율을 높이고 제작량을 늘리려는 지속적인 시도에 의하여 새로운 발전을 이룩하였다. 고려 시대 청자 가마를 토대로 조선 시대 분청사기와 백자 가마가 설치되었고, 자기의 질과 수요에 맞추어 갑번 혹은 상번의 번조 방법이나 갑발과 같은 요도구를 선택적으로 사용하였다. 청자, 분청사기, 백자 가마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거치며 개선되고 발전된 자기 가마이다. (전승창)
참고문헌 도요지발굴성과 20년(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2001), 분청사기 명품전(호암미술관, 2001), 한국 도자기 가마터 연구(강경숙, 시공아트, 2005), 계룡산 분청사기(국립중앙박물관, 2007),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국사편찬위원회, 경인문화사, 2010), 강진청자의 교류와 소통(강진청자박물관, 2012), 천하제일 비색청자(국립중앙박물관, 2012), 한국도자사전(김윤정 외, 경인문화사, 2015)
구분 용어
사전명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생산유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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