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용어명 | 탄금대토성(忠州彈琴臺土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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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 산1-1번지 일원의 탄금대 동북쪽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하는 토성이다. 토성이 위치하고 있는 탄금대는 동북쪽에서 흘러오는 남한강과 남한강 최대 지류인 달천이 합류하는 바로 동쪽으로 대문산(大門山) 또는 견문산(犬門山)이라 불리는 낮은 구릉이다. 현재는 충주시와 연결되어 있으나 남한강에서 충주천과 달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연결되던 샛강이 매립되기 전까지는 독립된 섬이었다. 토성은 탄금대의 동북쪽 가장 높은 지점에서 서향으로 낮아지는 사면를 둘러싼 토루이다. 평면 형태는 동서로 기다란 불규칙한 말각장방형 혹은 타원형이다. 전체 둘레는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북쪽 구간을 포함하여 약 415∼420m이며, 인위적인 토루가 축조된 구간은 234m이다. 성벽은 사찰·비각·묘지 및 탄금대 일대가 공원으로 조성되면서 원상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탄금대토성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토성은 지금까지 조사된 바 없는 일명 ‘석심토루(石心土壘)’로 축조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성벽의 중심토루는 중앙에서 내측방향으로 석축열이 계단상으로 축조되어 있다. 계단상을 이루는 석축렬은 성벽 내측 발굴 구덩에서 5단이 확인되었으며, 외측 발굴 구덩에서 가장 높은 지점의 석열을 중심으로 내측으로 3단, 외측으로 2단이 확인되었다. 내측발굴 구덩의 마지막 5번째 석렬의 높이가 외측의 중앙 가장 높은 지점의 석렬 또는 두 번째 석렬의 높이와 동일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어, 전체 석렬은 5∼6단으로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렬 사이의 간격은 일정하지 않으며, 외측 발굴 구덩의 가장 높은 석렬을 중심으로 다음 단까지의 간격은 내측이 넓고 외측이 좁은 양상이다. 내측과 대응되는 외측의 석렬이 모두 확인되지 않아 확언할 수는 없으나, 이 석렬은 외측 가장 높은 지점의 석렬을 중심으로 동일한 높이로 내측과 외측에 석렬을 놓은 후 이 석렬을 중심으로 성벽을 축조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석렬을 중심으로 갈색 사질토가 마치 석렬을 감싸는 듯하게 나타나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석렬을 중심으로 토층이 구분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심토루의 하부 너비는 680㎝이며, 하부에 석렬이 축조되어 있는 구간의 너비는 270∼290㎝이다. 석렬이 축조된 높이까지의 판축은 석렬을 중심으로 내·외측으로 약하게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석열의 위쪽으로는 암갈색 점질토와 적갈색 점질토를 이용하여 수평을 이루도록 판축하였다. 중심토루의 상부는 황갈색 사질토를 이용하여 중심토루와 내·외피토루 전체를 마치 피복한 듯한 토층양상이 확인되고 있다. 내피토루의 너비는 600㎝, 외피토루의 너비는 470㎝의 규모이다. 중심토루를 중심으로 각각 내·외측으로 경사를 이루도록 축조하고 있다. 외피토루 외측의 외황은 2개가 확인되었는데 토층 양상으로 볼 때 첫 번째 황은 1차 성벽 축조 시에, 두 번째 황은 첫 번째 황이 매몰된 후 성벽을 수축하면서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성벽에 대한 수축의 흔적은 성벽의 중심부를 기준으로 내측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1차 판축토루의 상면으로 강돌이 많이 섞인 황갈색 내지 적갈색 사질토를 이용하여 내측으로 경사지도록 성토하고 있으며, 이 성토면 상면에는 내측에 큰 강돌과 석재를 이용하여 상부를 피복하여 토축성벽의 붕괴를 방지하고 있다. 내측 성벽에 대한 성토와 함께 매몰된 첫 번째 외황의 외측으로 다시 외황을 조성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토축성벽은 목주를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한 후 성벽으로 축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탄금대토성에 대한 발굴조사에서는 성벽축조와 관련된 목주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향후 추가 조사에서 성벽축조를 위한 목주의 흔적이 확인될 가능성도 있으나 목주를 설치하지 않고 성벽을 축조하였을 가능성 또한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한편 성벽 내측 발굴 구덩의 동쪽 토층벽에서 1개의 목주흔이 확인되었다. 목주흔의 성격은 명확하지 않으나, 토층 양상으로 볼 때 성벽 판축과 관련된 목주의 흔적일 가능성도 있으나 1차 성벽을 축조한 후 성벽의 상면에 목책을 설치한 흔적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성내 평탄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주거지 3기와 저수시설 1기가 확인되었다. 주거지는 말각장방형으로 내부에서 송풍관편과 슬래그 등이 수습되고 있어 제련시설과 관련된 공방지로 추정된다. 저수시설의 평면 형태는 부정타원형 또는 말각장방형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중앙부가 가장 깊은 바가지 모양이다. 서쪽 벽 상부가 일부 훼손된 상태이나 전체적으로 잘 남아 있다. 규모는 500×530㎝로 중앙부의 깊이는 60㎝이다. 벽체는 갈색 점질토 내지 뻘을 이용하여 저수시설의 중심부를 향하여 사선방향으로 다짐하였으며, 바닥면은 짙은 회흑색 뻘을 이용하여 다짐한 후 다짐층상면은 강돌을 이용하여 부석(敷石)하였다. 강돌로 부석된 층위에는 밝은 회백색 뻘이 침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장기간 물을 저장하였던 시설로 추정된다. 매몰층에서 40매의 철정(鐵釘)이 수습되었다. 이 밖에 토성 내에서 수습되는 유물은 대부분 토기편들로서 모두 백제토기로 분류되는 것들이다. 대부분 작은 편으로 기종은 호류·대옹류·발형토기류·장란형토기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기종 구성의 특징은 뚜껑류, 삼족기, 고배, 기대 등 특수한 제의와 관련된 기종이 전혀 보이지 않고 호와 옹류 등 일상생활용 기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토기가 수습되는 곳은 크게 성벽 판축토 내부와, 주거지, 저수시설 매몰층, 표토 교란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출토지점에 따른 유물의 양상은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탄금대토성의 경영시기와 성격은 출토유물의 편년과 유구의 성격을 통하여 판단할 수 있다. 성내는 물론 성벽 판축토 내부에서 수습되는 유물은 백제토기 일색이며, 이후 충주지역에 진출한 고구려와 신라 토기는 전혀 수습되지 않고 있다. 이는 탄금대토성이 백제 또는 백제의 통제를 받는 지방세력에 의해 축조되고 경영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고구려와 신라가 충주지역에 진출한 시기에는 이미 폐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출토 유물 중 기형이 복원되는 토기들이 대체로 4세기 중반에서 4세기 말로 편년되고 있고, 장미산성 등에서 수습되고 있는 조족문토기가 전혀 출토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경영시기는 대체로 4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토성의 성격은 성내의 유구를 통해서 그 일단을 추정할 수 있다. 즉, 성내에서 조사된 주거지 중 2호 주거지는 북벽과 서벽을 따라 소토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고, 주거지 내부에서 용해로 또는 단야로와 관련된 송풍관편과 슬래그가 함께 수습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제련로에서 생산된 철을 2차 가공하는 공방시설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인접하고 있는 저수시설의 매몰층에서 수습된 철정으로도 확인된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탄금대토성은 4세기 중후반에 탄금대를 중심으로 분포하던 철 생산 세력에 의해 축조되고 경영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조순흠) |
참고문헌 | 탄금대 지표조사 보고서(충주공업전문대학박물관, 1991), 충주 탄금대(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2002), 충주 칠금동 400-1번지내 문화유적시·발굴조사 약보고서(중원문화재연구원, 2006), 충주 탄금대 토성 발굴조사 약보고서(중원문화재연구원, 2007) |
구분 | 용어 |
사전명 |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성곽봉수편) - (성곽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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