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용어명 | 비봉리유적(昌寧 飛鳳里遺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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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사적(지정명칭은 창녕 비봉리패총).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 44 일대로 창녕군의 남동쪽 끝자락에 위치한다. 창녕군은 전체적으로 북동쪽은 험준한 산맥이, 서남쪽은 낙동강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으로는 밀양시와 경상북도 청도군, 서로는 합천군과 의령군, 남으로는 창원시와 함안군, 북으로는 대구광역시 달성군과 접해 있다. 낙동강은 창녕군 남지읍 부근에서 지리산에서 발원한 남강과 합류한 뒤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흐른다. 창녕군의 지세는 서쪽과 남쪽의 경계를 이루는 낙동강과 깊은 관련성을 가지는데, 북동쪽의 천왕산(해발 619.2m)에서 열왕산(해발 662.5m)을 거쳐 영취산(해발 739.7m), 종암산(해발 546.0m), 덕암산(해발 544.5m)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북동부에 높이 솟아 있고, 서남쪽은 이 산맥에서 낙동강을 향해 길게 뻗어 내린 능선과 구릉이 분포하고 있다. 또, 능선 사이에는 청도천, 길곡천, 온정천, 계성천, 토평천 등의 작은 하천이 흘러 낙동강에 합류한다. 이러한 지세와 수계를 중심으로 창녕군은 두 개의 권역과 두 개의 소지역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먼저, 천왕산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창녕읍과 우포를 지나 낙동강에 합류하는 토평천을 중심으로 하는 권역이 있고, 다음으로 열왕산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하는 계성천을 중심으로 하는 권역이 있다. 토평천수계 권역과는 낮은 능선과 구릉이 경계를 이루지만, 뚜렷하게 구분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2개의 소지역으로는 길곡천을 중심으로 하는 길목면과 온정천을 중심으로 하는 부곡면이 있다. 비봉리 일대는 행정구역상 부곡면에 위치하고 있지만, 지형과 환경적인 측면에서 상기한 권역과 소지역에 해당하지 않고 청도천을 중심으로 하는 별도의 권역이라 할 수 있다. 청도천은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과 청도읍, 밀양시 청도면의 경계에 위치하는 화악산(해발 931.6m)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밀양시 청도면과 무안면을 지나 창녕군 부곡면과 밀양시 초동면의 경계를 이루면서 흘러 낙동강에 합류한다. 이 청도천수계 지역은 창녕군이나 밀양시의 다른 지역과 비교적 험준한 산맥을 경계로 구분되고, 하천을 따라 남북으로 좁고 긴 협곡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하류지역인 비봉리와 낙동강 사이에 이르러 비교적 넓은 평지가 형성된다. 청도천과 온정천 사이에는 월봉산(해발 401.2m)과 처녀봉(해발 446.2m)이 우뚝 솟아 있다. 유적은 월봉산에서 청도천을 향해 동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의 말단에 위치하며, 월봉산과 처녀봉 사이에 동서로 길게 형성된 계곡의 북측 입구에 해당한다. 유적의 서쪽으로는 계곡 안쪽에 자리한 비봉마을이 있고, 남쪽으로는 길이 0.65㎞, 최대폭 0.38㎞의 ‘비봉앞들’이 형성되어 있다. 청도천은 밀양시 무안면에서부터 폭 0.4㎞ 미만의 좁은 계곡을 따라 흐르다가 비봉리 부근에 이르러 폭 1㎞, 길이 2㎞ 가량의 넓은 평지인 ‘성암들’을 지나게 된다. 1916년에 제작된 지도에는 ‘비봉앞들’은 논으로, ‘성암들’은 습지로 나타나 있다. 이는 ‘비봉앞들’은 청도천 제방이 계곡의 입구를 막아 낙동강과 청도천의 역류를 막을 수 있었기 때문에 논으로 경작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성암들’은 낙동강과 청도천의 범람으로 경작이 불가능하였던 것을 말해준다. 또, ‘비봉앞들’은 계곡을 따라 형성된 평야로 청도천과 접한 부분이 해발 4m 내외로 낮고, 계곡안쪽으로 갈수록 높아진다. 이에 비해 ‘성암들’ 서편인 청도천변은 해발 4.7∼6m로 높고 청도천에서 멀어질수록 해발 3.5∼4.1m로 낮아진다. 이것은 ‘성암들’은 원래 청도천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자연제방과 배후습지였으나, 이후 경작지로 이용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봉앞들’ 역시 청도천 제방 축조 이전에는 청도천에 의해 형성된 자연제방 배후의 저지대를 중심으로 습지상태를 이루고 있었으며, 홍수 시 자주 범람하는 침수지역 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지리적인 특성과 지표 6m 아래까지 유구가 확인된 점 등을 고려해 본다면, 유적이 형성될 당시에는 청도천과 낙동강, 그리고 바다의 영향을 많이 받 았을 것이다. 유적주변은 제방공사와 경지정리를 통해 모두 논으로 개간되어 있으며, 마을진입로 공사 등으로 인해 여러 번의 지형변화가 있었다. 비봉리유적의 입지를 요약하자면, 월봉산에서 뻗은 능선자락으로 청도천과 낙동강이 만들어낸 넓은 습지를 향해 돌출되어 있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발굴지점은 육성퇴적물과 수성퇴적물이 만나는 경계지점에 해당한다. 현재까지 확인한 층위는 모두 45개 층으로 Ⅰpit의 산 쪽에서는 기저역층과 암반을 확인하였다. 확인된 층위는 각 층의 특성을 기준으로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가장 위에 해당하는 1층에서 10층까지로, 근대의 경작층과 청동기시대 이후의 호소성 퇴적층이다. 주로 실트(Silt)가 중심을 이루고 소량의 Pebble이나 Cobble급의 자갈이 포함되어 있다. 즐문토기나 청동제 숟가락 편 등이 수습되었지만, 유구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다음은 육성퇴적층인 11층에서 18층까지로, Pebble급, Cobble급의 자갈이 다량으로 포함된 역석 층이다. 유적의 배후에 위치하는 산지에서 흘러내린 토석류들에 의해 작은 선상지를 이룬다. 11∼16층은 무문토기와 즐문토기가 포함되어 있고, 17층과 18층에서는 즐문토기만 확인되었다. 14층·15층·17층에서 소토유구가 확인되며, 17층에서 야외노지가 확인되었다. 마지막으로 19층부터 아래로는 Silt와 Sand층이 두텁게 퇴적되어 있는 층으로 조용한 호수상태에서의 퇴적을 보인다. Ⅰpit 산 쪽에는 육성퇴적물이 많아 Granule입자가 함께 뒤섞여서 퇴적되어 있지만, 대부분은 Silt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모두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며, 야외노지·저장공·패층·부석층 등이 확인되었다. 저장공은 19층∼21층, 25층, 26층에서 확인되었다. 19∼21층은 층위상으로는 구분이 되지만, 후술할 황색산화층이 형성되어 있어 동일층으로 판단된다. 또 25층은 제1패층과 동일시기의 Silt+Granule층이다. 패층과 부석층은 25층, 31층, 34층, 39층, 41층에서 각각 확인되었다 . 25층은 패각과 부석이 확인된 층으로 Ⅱpit와 Ⅳpit 일부에서는 패각이 중심을 이루는 제 1패층과 부석에 패각이 포함된 제1부석층으로 구분이 가능하지만, 대부분은 구분이 불가능하다. 31층은 제2패층과 2부석층에 해당하며, 25층과 퇴적양상은 비슷하다. Ⅰpit의 산 쪽에서는 기저역층과 연결되어 있다. 34층은 제 3패층과 3부석층, 39층은 제 4패층과 4부석층, 41층은 제 5패층에 해당한다. 39층은 Ⅳpit 북쪽에서 기저역층과 연결된다. 기저역층은 Ⅰpit와 Ⅳpit 북편에서 확인되었는데, Pebble급의 할석들이 두텁게 층을 이루고 있다. 유구로는 소토유구 7기, 야외노지 6기, 저장공 17기, 소형수혈 2기, 추정 주거지 2기, 다섯 층의 패층과 부석층이 확인되었다. 소토유구는 14층, 16층, 17에서 각각 확인되었다. 크기는 다소 차이가 있으며, 평면형태는 대부분 원형 또는 타원형이며, 부정형도 있다. 소토유구의 내부는 붉은색 또는 황색계의 점토로 목탄과 소토를 포함하고 있으며, 색에 의해 두 층으로 구분되는 것도 있다. 하지만, 소토유구는 굴착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불을 피우면서 토양이 불을 받아 산화되어 구분되어진 것이다. 따라서 소토유구 내 구분되는 토층은 불을 받은 정도에 따른 차이로 판단된다. 소토유구에서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하지만, 1호소토유구에서 서쪽으로 50㎝ 가량 떨어져 어망추 두 점이 확인되었는데, 청동기시대 토기와 공반되어 출토되는 어망추(14층)와 동일한 형태이다. 각 층위에서 출토된 유물의 양상을 고려해 볼 때, 14층과 15층에서 확인된 소토유구는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17층에서 확인된 6호, 7호 소토유구는 신석기시대의 것이다. 야외노지는 모두 6기가 확인되었는데, 1호는 23층, 나머지는 17층을 파고 만들어졌다. 17층은 주로 Granule 입자와 Pebble, Cobble 급의 자갈이 다량 포함된 층이다. 남서에서 동북방향으로 호선을 이루는 등고선과 나란하게 배치되어 있다. 야외노지는 수혈의 깊이와 목탄의 유무에 따라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형태로 구분된다. ‘가’형: 수혈의 단면은 U자상을 이루며, 내부에는 할석들이 2벌 또는 3벌 정도 깔려 있다. 할석 사이나 수혈 바닥을 따라 목탄이 확인된다. 1호∼4호 야외노지가 이에 해당한다. ‘나’형: 수혈을 파지 않고 집석한 것으로 할석은 1벌 깔려 있다. 목탄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5호와 6호 야외노지가 이에 해당한다. 저장공은 모두 18기가 확인되었다. 이 중 2기(14, 15호)는 25층을, 1기(17호)는 26층을 굴착하여 만들었다. 나머지 15기는 황색산화층(19층∼21층)에서 확인되었으며, 가장 남쪽의 1호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는 16호까지 남서∼북동방향으로 등고선의 방향과 나란히 열을 이루며 분포하고 있다. 저장공은 크기와 형태를 기준으로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하였다. 먼저 규모에 있어 직경 100㎝를 기준으로 그 이상인 것과 미만인 것이 있다. 그리고 수혈을 아래로 갈수록 넓게 굴착한 것으로, 단면의 형태가 소위 플라스크형을 이루는 것과 단면이 수직 또는 ‘U’자상을 이루는 것이 있다. 저장공의 용도는 탄닌 제거시설 또는 단기간의 저장공간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12호저장공에서 갈돌과 갈판, 11호 저장공에서는 파쇄된 도토리 껍질이 다량 확인되어 이러한 기능 이외에 가공공간으로서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외에 Ⅱpit 중앙, 10호 저장공에서 남동으로 200㎝ 떨어져 위치하는 소형 수혈이 있다. 평면형태는 원형이며, 단면은 ‘U’자상이다. 24층을 굴착하여 만들었는데, 주변에서 확인된 저장공에 비해 소형이며, 내부에서는 소량의 도토리가 확인되었다. 다른 저장공과 크기, 구조, 내부 상태에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저장공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주거지로 추정되는 유구 2기도 확인되었는데 2중 1기는 불에 탄 주거지로 압인문토기가 출토되어 남해안 신석기시대 전기(기원전 3000년경)의 것으로 판단된다. 비봉리유적의 발굴성과와 의의를 요약하면, 첫째 처음으로 조사된 신석기시대 저습지유적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조사된 신석기시대의 저습지유적으로서 해수면 변동에 의해 습지화된 환경에서 나무, 풀을 위시한 유기물(동물 뼈, 식물유체, 씨앗류 등)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어 지금까지 토기, 석기 중심의 신석기문화 연구에서 유기물을 통한 생업이나 생태계 연구와 복원을 추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둘째, 신석기시대의 해수면 변동을 알려주는 자료라는 점이다. 규조분석 결과와 저장공의 위치 등을 통하여 후빙기(Holocene)의 어느 시점, 적어도 신석기시대의 이른 시기에는 낙동강 중, 하류 혹은 그 지류역(현재의 창녕, 밀양지역)까지 바닷물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신석기시대 생계방식의 일면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다양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시기를 달리하는 도토리 저장시설은 등고선 방향과 나란하게 열을 이루고 만들어져 있다. 이 구덩이들은 저장 공간으로서의 기능 외에도 도토리의 탄닌 제거시설 내지 함께 출토된 갈돌과 갈판의 존재에서 볼 때 가공 공간으로서의 기능도 상정할 수 있다. 또 신석기시대의 생계방식 중에서 채집(도토리, 가래, 솔방울, 조개), 어로(바다생물, 잉어), 사냥(사슴·멧돼지), 가축사육(개)의 구체적인 증거물이 확인되었다. 또한 탄화유기물, 토기 내면에 부착된 양파류의 탄화물 등 조리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음식물 자료를 확보하였다. 따라서 신석기시대의 식료획득, 저장(저장공), 가공(갈판과 갈돌), 조리(탄화물)의 모든 과정과 당시의 먹을거리를 구체화 할 수 있는 자료를 획득하였다. 넷째, 신석기시대 연구의 새로운 자료를 확보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최고 혹은 최초로 밝혀진 유물이 많이 출토 되었다. 망태기, 목기, 화석화된 똥[糞石], 동물그림이 있는 토기, 통나무배[木舟]가 그것이다. 망태기는 두 가닥의 날줄로 씨줄을 꼬는 ‘꼬아뜨기기법’으로 만든 것으로 신석기시대의 편물기술을 알려주는 최초의 자료이다. 비록 일부만 남아 있지만, 일본의 산나이마루야마[三內丸山〕유적에서 출토된 망태기와 비견될만하다. 검형목제품(劍形木製品)은 신부(身部)만 잔존하고 있으며, 전면을 잘 다듬은 것으로 등날이 나 있는데 저장공에 사용되는 시설물일 가능성도 있다. 똥 화석은 시대를 불문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출토되는 자료이다. 신석기시대 조기(기원전 4000년 이전)에 해당하는 동물그림은 형태가 물고기에 가까우나 등 부분에 돌기가 나 있고, 2개의 다리가 표현되어 있어 멧돼지로도 보인다. 머리 쪽에는 눈 또는 코를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 두 점이 찍혀 있고, 몸체에는 얕은 문살무늬가 채워져 있다. 부산 동삼동패총에서 출토된 사슴그림과 함께 신석기시대의 구체적인 동물그림 자료이다. 통나무로 만든 배는 소나무를 단면 ‘U’자상으로 파내 만들었는데, 신석기시대의 배로는 최초의 것으로 약 8000년 전의 것이다. 이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배로 알려진 도리하마[鳥浜] 1호나 이키리키[伊木力]유적 출토품보다도 약 2000년 이상 오래된 것이다. 다섯째, 신석기시대의 표준유적으로서의 위치를 갖는다는 점이다. 모두 10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으며, 신석기시대 조기와 전기의 각 문화층 사이에는 상대적 서열을 분명하게 구분해 주는 간층이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층위의 역전’ 현상으로 시기를 달리하는 문화층이 혼재되어 편년에 어려움을 겪었던 다른 패총유적의 편년을 재검토하고, 남해안 일대 신석기시대 유적편년의 새로운 기준이 된다. 그 밖에 비봉리유적의 발견과 발굴은 낙동강 중, 하류역 패총유적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발굴조사 후 비봉리 일대의 지표조사를 통하여 8개소의 패총유적을 새롭게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임학종) |
참고문헌 | 비봉리(국립김해박물관, 2008) |
구분 | 유적 |
사전명 |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
만족도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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