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용어명 영광읍성(靈光邑城)
설명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백학리에 위치한다. 영광읍성은 고려시대의 우산성(牛山城)과 조선시대의 성산성(城山城)으로 구분된다. 우산성은 읍의 남쪽 우산공원(牛山公園) 뒷 편에 축성한 것으로 그 규모나 축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지금도 고성터에는 크고 작은 성돌과 기와편 등이 출토되고 있으며 ‘고성재’라고 불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성산성도 시가지 개발로 인해 거의 대부분 파괴되고 지금은 영광주차장 안에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문헌기록을 보면 『세종실록(世宗實錄)』중 세종 3년조에 공사를 시작하여, 세종 5년 계묘조에 영광읍성을 완공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세종실록』지리지 전라도 나주목 영광군조에 “읍은 석성으로 둘레가 547보이다.”라고 하여 ‘우와산고읍성’을 기록하고 있다. 문종 1년(1451) 8월 기사를 보면, 의정부에서 병조의 정문(呈文)에 의하여 아뢰기를, “충청·전라·경상도도체찰사(忠淸全羅慶尙道都體察使) 정분(鄭?)의 계본(啓本)안에 전라도 각 고을의 성자(城子)를 순행하며 심찰하니 애당초 법에 의해 쌓지 않아서 모두가 규식(規式)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서 그대로 둘 각 고을과, 물려서 쌓아야 할 각 고을과, 또 모름지기 개축을 요하는 각 고을을 마감(磨勘)하여 삼가 갖추어 보고합니다. 개축하여야 할 곳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광군읍성(靈光郡邑城, 우와산읍성)은 주위가 2,712척, 높이가 10척이고 여장(女墻)의 높이는 1척 6촌이며 적대(敵臺)가 2개소, 3개소의 문 중에 2개의 문은 옹성이 없고, 여장이 462, 성안에 샘이 6개소가 있으며 해자는 아직 파지 않았습니다…….”라는 기사가 보이고 있다. 단종 즉위년(1452)에 “영광의 축성군은 그 수를 줄이도록 하고, 유포의 석보 수축은 정지하도록 하다.”는 내용이 보이고 있는데,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이제 듣건대 여러 고을의 축성의 역사(役事)를 파하였다고 하지만, 아직 파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금년에 밀·보리와 올곡[早穀]·늦곡[晩穀]이 모두 여물지 못하여 백성의 생활이 가히 걱정스럽습니다. 변읍(邊邑)의 성참(城塹) 적대(敵臺)의 수축 및 유포의 석보(石堡)와 영광·함흥의 읍성(邑城) 역사를, 청컨대 모두 정지하소서.”하니 여러 대신에게 의논하고 병조에 전지 하기를, “영광의축성군(築城軍)은 본도 관찰사로 하여금 적당히 그 수를 감하게 하고, 유포의 석보 수축은 우선 이를 정지함이 옳다.”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영광군 궁실조를 보면 다음의 기록이 보인다. 객관 신숙주의 기문에, “군이 여러 번 왜구의 난을 당하여 공관이 쓸쓸하다. 예전에는 읍의 남쪽 산기슭에 있었다는데 그 산수가 등지어 가고 지리가 불순한데, 더욱이 성보(城堡; 망보는 작은 성)는 낮고 무너지고 공관은 비좁기 때문에, 단종 즉위년(1452)에 읍 사람들이 사유를 조정에 아뢰어 성을 우와산(牛臥山)의 동쪽으로 옮기니, 험준하고 견고하며 넓고 평탄하며 주위가 넓게 트여서, 안에 관사와 창고, 미곡창고를 세울 만했다. 그해 가을부터 짓기 시작했는데, 이(李)·정(鄭) 두 군수를 겪었어도 오히려 진척이 없었다. 세조 2년(1456) 봄에 이르러 지금 군수 여흥(驪興) 민효원(閔孝源) 공이 뒤를 이어 군수가 되어 앞 사람이 아직 세우지 못한 것을 세우고 앞 사람이 끝내지 못한 것을 끝내어, 문과 창을 내고 단청을 환하게 하니, (영광)군 사람들이 모두 경축하였다.”하였다. 세조 2년 병자(1456)/12월/25일(경신)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경상도(慶尙道)의김해(金海)·고성(固城)·곤양(昆陽)·하동(河東), 전라도의 낙안(樂安)·보성(寶城)-잉구대상-·장흥(長興)-개축대상-·해남(海南)·함평(咸平)·영광(靈光)-개축대상-, 충청도(忠淸道)의 서천(舒川) 등 여러 읍(邑)은 모두 바다와 접하여 방어(防禦)가 가장 긴급합니다. 이미 읍성(邑城)을 쌓았으나 지킬 군사가 없으니, 여러 읍의 수령으로 하여금 점차로 경내의 일 없는 사람[閑役人]을 찾아내어 기병·보병으로 삼아서 수를 갖추어 도절제사(都節制使)에게 보고하여 계문(啓聞)하고, 번(番)을 나누어 방어하여 위로하여 안심하게 하고 완휼(完恤)하게 하소서. 또 김해는 부산포·제포(薺浦) 사이에 있어서 그 형세가 더욱 긴급하니, 본읍군사의 웅천(熊川) 석보(石堡)를 지키는 자 1백 50명을 뽑아서 본 읍에 붙이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영광군 성곽조에도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4백 69척, 높이가 6척이고, 안에는 9군데의 샘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읍성의 동문은 빈양루(賓暘樓)라 하여 현 영광여자중학교(靈光女子中學校) 자리에 있었고, 서문은 정서문(靜西門)이라 했으며 영광군 농촌지도소 뒤에 있었고, 남문은 진남루(鎭南樓)라 했으며 영광우체국 앞에 있었고,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 했으며 영광읍 무령리 북문재 구도로에 있었다. 아사는 근민당(近民堂), 내아(內衙), 운금정(雲錦亭), 객사(客舍)가 있었다. 근민당은 고을원이 집무하는 동헌을 말하며 현 원불교 자리에 있었고, 내아(內衙)는 내동헌, 지방관청 안채 관사를 말하는데 현 읍사무소 자리에 있었으며, 운금정은 군수 집무실과 영빈관으로 사용하였는데 전 군청 구내식당 자리에 있었으며, 객사는 전패(殿牌)와 궐패를 봉안하고 원이나 관헌 그리고 군민들이 망하례(望賀禮), 망곡례(望哭禮)를 드리기도 하고 영빈관으로 쓰였던 공청(公廳)으로 현 영광초등학교 자리에 있었으며, 향사당(鄕社堂)은 좌수(左首), 군유림(郡儒林) 대표로서 현 자문위원 행정처로 현 군수관사 자리에 있었다. 장청(將廳)은 수교[首校; 현 사법관(司法官)], 좌우병방[左右兵房: 도정장교(道政將校)]의 봉공청(奉公廳)은 호장(戶長)이 호적재무(戶籍財務)의 집무를 하는 곳으로 현 군청내에 있었다. 형청(刑廳)은 형방의 봉무청(奉務廳)으로 현 경찰서에 있었고, 노반청(奴班廳)은 노녀(奴女)의 가무연습소로서 구 경찰서장 관사에 있었으며, 장방청(長房廳)은 사령들이 집무하는 곳으로 죄수를 가두어 두는 유치장과 같은 관청으로 구 협동인쇄소 자리에 있었고, 봉공청(奉公廳)은 원님의 음식을 만드는 곳으로 전 경찰서 자리에 있었으며, 작청(作廳)은 사언(史彦)의 봉공청(奉公廳)으로 현경찰서 자리에 있었고, 사창(社倉)은 사환미(社還米)를 보관하는 창고로서 현 등기소 자리에 있었는데, 영광에는 20,000석을 비축했다. 훈련청(訓鍊廳)은 천총[千總:군사 천명(千名)을 통솔하는 사람]이 집무하는 곳으로 현 경찰서 자리에 있었고, 서청(書廳)은 세금을 부과 징수하는 곳으로 현 창문사 자리에 있었으며 문루는 군수가 군민에게 유세하는 누각으로 현 군청 정문에 있었다. 호장청(戶長廳)은 호적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현 군수관사 북편에 있었는데 지금 유적으로는 정주 운수사에 있는 성의 일부와 경찰서 뒤 공중샘으로 쓰고 있는 객사샘 하나만이 남아 있다.(김세종)
참고문헌 조선성곽일람-강원도·전라남북도·제주도편-(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 조선학보』107집, 1983), 영광군문화유적학술조사(전남대학교박물관, 1992), 문화유적분포지도-전남 영광군-(목포대학교박물관, 2004)
구분 용어
사전명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성곽봉수편) - (성곽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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