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용어명 | 나성(羅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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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내성과 외성을 모두 갖추고 있는 성곽의 바깥쪽에 있는 성[=외성(外城), 외곽(外廓)]이다. 한국의 경우 백제 사비도성, 고구려 장안성, 고려 개경도성, 청주성에 나성이 축조되어 있으며, 고려시대 몽고군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강화성에도 내성·중성·외성이 구비되어 있어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이에 대하여『고려사(高麗史)』를 살펴보면, 개경성에 나성이 축조되는 것은 현종 즉위년 3월에 논의가 시작되어 현종 20년 8월에 완성되기에 이르렀는데, 우왕 3년에 외성에 대한 수즙(修葺) 논의가 있으며 현종조에 외성이 축조되었다고 하고 있어, 나성과 외성을 같은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중국의 도식적인 외성 축조와는 달리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부정형으로 축조하였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조사가 이루어진 사비도성인 부소산성(扶蘇山城)과 외곽(外廓)으로 나성(羅城)을 축조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내성과 외곽을 갖춘 성곽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나성은 부소산성을 기점으로 하여 그 동쪽으로 뻗어내려 청마산성을 경유하여 석목리에 이르고 다시 능산리의 서쪽 산을 타고 내려 필서봉을 경유해 백마강에 이르는 동라성과 부소산의 서록에서 뻗어 내려 백마강과 평행하게 서남쪽으로 연결되는 서라성이 있다. 남쪽은 백마강에 면하고 있으므로 나성이 축조되지 않았다. 부여 나성의 구조는 호성석축(護城石築)이 수반된 토축성벽으로 규정할 수 있으나 그 축조방법은 부분에 따라 차이가 있다. 구릉지대에 구축된 나성의 구조는 성체는 판축 또는 판축에 준하는 기법으로 축조하고 외면은정방형 또는 3:2 정도의 장방형 석재로 기단석에서부터 조금씩 물려쌓아 층단식으로 마감하여 보강하였으니, 필서봉 북록의 낮은 구릉에서 조사된 바로는 성벽 전체의 높이는 4.9m, 기저부의 넓이는 약 16m, 호성석축의 높이는 2.5m이다. 이에 대하여 평지에서 조사된 나성의 구조는 성체가 흙으로 성토된 점에서 차이가 없었으나 내부의 구축방법에서 산성과는 계통을 달리하는 제방축조술이 응용된 것으로 보인다. 즉 평지 나성의 내부구조는 토층 사이사이에서 흑색탄화목층이 발견되었다. 이 탄화목층에는 직경이 5∼10㎝ 내외의 참나무와 같은 나무가지가 수평으로 배열되어 있었으며 이는 성체의 흙이 50㎝ 정도 두께로 성토되었을 때마다 반복적으로 깔아 놓았음을 확인하였다. 여기에는 연한 흑회색의 점질토가 사용되었다. 평지나성의 내부는 등성하기에 용이하게 경사면을 이루며 잡석과 점토로 피복하여 우수로 인한 훼손을 방지토록 하였는데, 기저부 너비는 22m에 달한다. 이 평지 나성 축조기법과 같이 식물탄화층을 활용한 유적은 김제 벽골제의 제방 발굴시에 발견된 예가 있으며, 또한 백제계 이주민들에 의하여 축조된 일본 후쿠오까현 다자이후[大宰府]유적의 거대한 미즈키[水城]에서도 이러한 탄화목층이 발견된 예가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고구려 장안성은 양원왕 8년(552)에 축조하여 평원왕 28년(586)에야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발견된‘각자성석(刻字城石)’을 보면 천도 이전까지 수십 년에 걸쳐 축조되었음을 볼 수 있다. 장안성은 북쪽으로부터 북성·내성·중성·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성벽의 총 둘레는 약 23㎞에 달한다. 장안성은 모란봉을 최북단으로 하고, 동·서·남에는 대동강과 보통강이 흐르고 있어 성의 외곽은 모두 산과 강으로 막혀있는 형상이다. 외성은 중성 남쪽의 백성 거주지역을 감싸면서 대동강과 보통강 기슭에 축조되어있으며 면적은 약 7,300,000㎡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외성은 석축 둘레 8,200척, 토축이 10,205척, 높이 32척으로 기록하고 있어, 토축이 더 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조사시 토축 내에서 석축성벽이 확인되고 있어, 조사자는 고려 태조 21년(938)에“서경에 나성을 쌓았다.”는『고려사』기록을 들어 이때 토축으로 수축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토성의 경우에는 성벽 가운데 자갈이 섞인 진흙과 황색토를 얇게 교차로 판축하여 성체를 구축하였는데, 1970년에 드러난 중성 남쪽 성벽의 단면은 자갈이 섞인 진흙과 황토를 수십 번 얇게 교차로 판축하여, 높이 5.5m, 기저부 폭 7m,상부 폭 5.6m 규모였다. 대동강 기슭의 일부 외성벽에서는 토성벽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성 밖 약 50m까지 강기슭에 조약돌과 진흙을 교차로 다지기도 하였다. 외성 성문으로는 북문인 선요문, 서문인 다경문, 남문인 거피문, 동문인 고리문이 있으며, 외성 내에는 방리제(坊里制)가 시행되었다. 고려 개경도성은 산악지대와 충적평야로 이루어진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원래 궁성·황성·나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후에 내성이 축조되어 모두 4개 구획으로 완성되었다. 나성은 현종 즉위년(1009)에 축조하기 시작하여 21년 후인 현종 20년(1029)에 완성되었다. 나성은 개성분지의 북쪽으로 높게 솟은 송악산계를 중심으로 남쪽의 용수산, 서쪽의 오송산, 동쪽의 부흥산,덕암봉 등 높고 낮은 여러 산들의 정상부를 이용하여 축조하고, 동남부에 있는 보정문에서 남쪽으로 450m 구간만이 평지상에 축조되어 있다. 성 밖으로는 예성강의 지류와 사천강의 지류들이 성을 감싸며 흐르고 있다. 총 연장 길이는 23㎞로『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성읍조」에 외성의 둘레가 60리로 기록되고 있어서 기록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나성의 석축부분은 송악산 정상부에서 서쪽의 눌리문(訥里門) 부근까지의 구간으로 길이 5.5㎞이며, 나머지 17.5㎞ 구간은 모두 토성벽이다. 그리고 북성문과 북창문(北昌門), 북창문과 눌리문 사이의 성벽은 발어참성(勃禦塹城)의 성벽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다. 송악산 정상부의 경사가 급한 북성문과 북창문 사이 200m 구간은 협축공법으로 석축성벽을 축조하였으며, 이 구간의 잔존 높이는 3∼4m, 기저부 너비 6m, 상면 너비 5m이다. 그러나 눌리문 부근의 성벽은 발어참성 토성 외벽을 삭토하고 정연한 화강암 석재로면석만을 쌓고 토성벽과의 공간은 1∼1.5m 너비로 석비래와 석회를 혼합하여 다져 내탁하였다. 토성은 기저부를 석재로 계단상으로 조성하거 나, 내외벽은 석재로 쌓고 내부 성심은 흙으로 채운 후 상부를 석비래와 진흙을 교차하여 판축공법으로 구축하였다.『고려사』에는 나성의 둘레 29,700보, 나각(羅閣) 13,000간, 나성문이 25개소실려 있으며, 성내에는 5부 방리(坊里)가 구획되었다. 강화성은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읍성이다. 외성은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는데 몽고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강화외성은 고려 23대 고종이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뒤 고종 20년(1233)에서 고종 24년(1237) 사이에 흙으로 축조한 토성이다. 이 토성은 조선시대 숙종 4년(1678)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동·북·서쪽에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강화외성은 강화도 해안 대부분을 에워싸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조선시대의 강화외성은 국왕의 피난처인 도성(都城)의 외성(外城)으로 광해군 10년(1618)에 보수하였으며, 숙종 16년(1690)에“승천보(昇天堡)부터 초지수(草芝水)까지는 매우 좁아서 건너기 쉽고 또 물길이 전보다 크게 바뀌어 다 배를 댈 수 있으므로 이것은 반드시 다투는 곳이 될 것이니 먼저 이곳을 쌓는 것이 좋은 계책이다.”라고 하여, 현재 강화군 송해면 숭뢰리 빙현돈대와 소우돈대의 중간지점에서 길상면 초지리 초지진까지 고쳐 쌓을 것을 논의하고, 영조 18년(1742) 10월에 강화유수 김시혁의 건의에 의하여 벽돌을 구워 고려시대 토성 상부에 다시 강화외성을 축조하여 영조 20년 7월에 공사를 마치게되니 약 24㎞에 달하는 전축성(塼築城)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외성의 높이는 20척, 너비는 5척이며, 6개의 문루와암문 6개소, 수문 17개소를 설치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태조 13년(930)에 청주에 나성을축조하고 있는데, 이는 태조 11년(928)에 보은 삼년산성의 후백제군을 치다가 실패하고 청주로 행차하였고, 후백제군이 청주를 공 격하자 아산에 있던 유금필장군이 와서 구원한 사실이 있는데, 이때 나성을 축조하여 방어력을 높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대동지지(大東地志)』청주 연혁조에 의하면, 본래 백제 상당(上黨)현으로 신라신문왕 5년초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으며, 경덕왕16년에 서원경(西原京)으로 고쳤다고 하고, 같은 책 성지조에는 신라 신문왕 9년에 서원경성을 축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볼 때, 태조 왕건은 통일신라시대 서원경성에 머무르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고려 후기에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1362년 8월 공민왕이 청주에 이동하여 다음해 2월 4일 청주를 떠날 때까지 7개월간 임시 수도가 된 사실이 있는데, 이때 무지개가 동쪽에서 솟아 왕궁의 양쪽에 걸쳤는데 청주 내성을 넘지 않았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내성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이를 볼 때 청주성은 내성과 나성이 구비된 성곽으로 행궁이 시설된 행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청주목 산천조에는 청주의 진산을 당이산(唐??山)이라 하고 토성터가 있다고 하였는데, 고적조에서는 산성이라 하여 주의 치소에서 동쪽 2리에 있고 토축이며, 둘레가 5,022척으로, 4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폐성되었다고 하여 조선 전기에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토축산성의 둘레 5,022척은 현재 당산이라 불리우는 당이산성의 규모로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규모로, 와우산의 내성과 당산을 둘러싼 외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와우산성은 조사결과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되며, 내성은 다시 3개로 구획되어 있어 고구려 장안성과 유사한 평면구조를 하고 있다. 그리하여, 태조 13년에 나성을 축조한 청주성은 내성인 와우산성과 당이산성 및 평지를 포용하고 축조된 나성으로 구비되어 있었다고 하겠다.(차용걸) |
참고문헌 | 고구려 평양성(장안성)의 성벽 축조형식과 시설물의 배치상태(최희림, 고고민속 67-3, 1967), 서원경의 위치와 구조(차용걸, 호서문화연구 11집,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1993), 부여 나성(국립부여박물관, 2003), 사비도성(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 2003), 백제산성의 이해(심정보, 주류성, 2004), 백제도성(이형구, 주류성, 2004), 고려의 성곽(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진인진, 2009), 청주 와우산(국립청주박물관·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2010) |
구분 | 용어 |
사전명 |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성곽봉수편) - (성곽편) |
만족도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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