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용어명 | 남경 유적(平壤 南京 遺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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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평양시 삼석 구역 호남리(湖南里) 남경 부락에 있는 선사시대 유적으로 1979~1981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 발굴하였다. 유적은 남경부락 앞 벌판, 대동강 오른쪽 기슭에 있다. 유적이 있는 곳에서 강을 따라 내려가면 대동강의 지류인 남강이 북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삼각주가 이루어져 있고 남강 건너편에 금탄리(金灘里) 유적이 있다. 지표조사에서 유적분포 범위는 50,000㎡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경 유적은 신석기시대 문화층으로부터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무덤 및 역사시대에 걸친 문화층들이 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 집자리(住居址)는 12?17?31?32?37호 등 5기가 조사되었다. 집자리의 평면형태는 2가지로 나타나는데, 12?17?32호 집자리는 방형(方形)이며 31?37호 집자리는 장타원형 또는 말각장방형(抹角長方形)이다. 집자리 바닥에는 진흙을 바르고 다졌으며 내부 중앙을 파고 주위에 돌을 둘러 화덕(爐)을 만들었다. 31호 집자리는 바닥이 아래?위로 단이 져 있어 주목되는데, 아랫단은 윗단에서 1.6m 정도 깊은 곳에 있으며 화덕은 아랫단의 가운데를 파고 설치하였다. 윗단에서는 각종 토기와 그물추(漁網錘) 2,000여 개, 갈돌(石棒), 갈판(石) 등이 나왔다. 아랫단에서는 그물추 600여 개, 갈돌 10여 개, 좁쌀 1되, 도토리알, 뼈 부스러기, 석기를 비롯하여 다수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이렇게 집의 규모가 평균이상이며 내부에 다시 움이 있어 집이 상?하 2단으로 나뉘는 경우는 가까운 금탄리(金灘里) 11호 집자리나 암사동(岩寺洞) 6호 집자리에서도 확인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공공건물, 창고 또는 마을회관 등으로 여겨지며 서해안지방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신석기문화의 한 특징으로 보인다. 신석기시대 집자리에서는 간석기(磨製石器)로서 도끼(斧), 자귀(手斧), 대패날, 슴베없는 활촉(無莖式石鏃), 돌칼(石刀), 갈돌, 갈판, 숫돌(砥石) 등이 출토되었다. 그밖에 그물추, 발화석, 무늬새기개도 나왔다. 그물추에는 각각의 크기에 따라 다른 굵기의 실이 묶였던 흔적이 남아있다. 토기의 출토량은 매우 많아 31호 집자리에서만 형태를 추측할 수 있는 것이 94개체나 나왔다. 토기 가운데 민그릇(無文土器)이 약 25% 정도를 차지하는데 기형상으로 단지(壺), 바리(鉢), 잔, 컵 등 작은 그릇들이 많으며 바탕흙(胎土)에는 주로 모래가 섞여 있다. 특히 무늬 없는 단지류는 금탄리에서 나온 것과 같은 형태로, 여기에 뾰족한 밑굽과 입술을 덧대면 서북지방의 팽이형토기(角形土器)로 보인다는 점에서 팽이형토기의 자생론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무늬토기(有文土器)에는 모래와 활석(滑石)을 섞은 것이 많으며 문양은 크게 생선뼈무늬(魚骨文)와 짧은 가로금무늬(短斜線文)로 대별된다. 어골문의 경우 그릇 전면에 걸쳐 시문되어 있다. 이 토기들은 대개 ??독(甕)??으로 분류될 만큼 대형인데, 크기는 56×70×84㎝로 14㎝의 배수로 커지고 있다고 분석되었다. 덧무늬(隆起文) 목단지 1점과 번개무늬(雷文)가 있는 목단지 1점은 중국 동북지방의 郭家村 유적에서 나온 것과 거의 같다. 세로방향으로 고리손잡이가 붙은 토기도 있다. 보고자들은 이곳의 연대를 2기로 나누어 바탕흙에 활석을 섞어 만든 토기들이 나오는 12?17?37호 집자리를 ??남경 1기(南京 1期)??로, 바탕흙에 모래만 섞어 쓰는 31?32호 집자리의 토기 및 유물들을 ??남경 2기(南京 2期)??로 나누었다. 이는 신석기 후기에서 청동기시대로 가면서 토기 바탕흙의 비짐이 모래 위주로 단일해진다는 최근의 주장에 기초한 것으로 보이나 집자리의 평면형태가 뒤섞여있다는 점에서 재고의 여지도 있다. 남경 1기는 궁산문화 4기, 남경 2기는 금탄리 2기이자 궁산문화 4기의 더 늦은 시기로 보고있다. 남경유적 1기와 2기의 절대연대는 각각 B.C. 3000년기의 전반과 후반에 편년되고 있다. 청동기시대 문화층에서는 집자리 22기가 드러났다. 집자리들은 서로 중복되어 있고, 출토 유물과 집자리 구조 등에 따라 3시기로 나뉜다. 청동기시대 1기에 해당하는 집자리는 7 기(6?7?9?30?33?34?36호)가 나왔다. 동~서 방향을 장축으로 하는 긴네모꼴 평면구조를 이루고 크기는 작은 편이다. 1기의 집자리들은 기둥구멍(柱孔)이 없으며, 네 벽체가 경사진것과 수직인 것이 있다. 집자리의 바닥은 진흙과 불로 다졌으며 모두 화재의 흔적이 관찰된다. 팽이형토기가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2기의 집자리는 8기(3?4?5?10?11?18?19?20호)로 남~북 방향으로 길게 놓여 있다. 2기에 해당하는 집자리는 집자리 중앙에 기둥구멍이 없고 네 벽을 따라 통나무를 벽체 골조로 촘촘히 세우거나 집자리 중앙에 장축을 따라 기둥구멍을 3개 두고 벽가에 가는 통나무를 세웠다. 팽이형토기와 함께 미송리형토기(美松里型土器)를 특징으로 한다. 3기에 속하는 것은 6기(1?2?8?13?14?15호)가 있는데 남~북을 장축으로 하는 것은 2기의 것과 같으나 집자리의 규모가 커졌다. 팽이형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생산 도구로는 반달돌칼(半月形石刀), 갈돌 등 농경과 관련된 도구들이 출토되며, 1기의 36호 집자리에서 오곡의 낱알이 나오고, 2기의 11호 집자리에서 기장이 나온 것을 보면 농사짓기가 활발했던 사실을 증명해준다. 돌화살촉(石鏃)과 그물추(漁網錘) 등 수렵, 어로와 관련된 유물들도 나온다. 남경 유적을 발굴하여 드러난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지역에서 농경이 본격화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좁쌀이 직접 출토되었다는 점, 저장용으로 쓰였을 대형의 독들이 10여 개나 나오는데 지름이 84㎝나 되는 것도 있다는 점, 벌채를 하는데 주로 쓰이는 간석기 종류가 발달하였다는 점, 이어지는 청동기시대의 문화층에서 오곡이 출토되고 있다는 점 등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물추의 실감 흔적은 이미 실잣기도 성행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남경 유적은 청동기시대의 36호 집자리와 거기에서 나온 오곡(벼, 수수, 기장, 조, 콩) 때문에 널리 알려졌으며, 이 집자리의 연대는 북한 최초로 자체 측정된 방사성탄소연대로 B.C. 992±172, 1024±70년이 나왔다. |
참고문헌 | 북한의 선사고고학 3-청동기 시대와 문화(장호수, 백산문화, 1992), 남경유적에 관한 연구(김용간?석광준,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4) |
구분 | 유적 |
사전명 | 한국고고학사전(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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