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황제릉과 대한제국 황제릉
중국 명청대 황제릉
조선왕릉의 조성과 가장 연관이 깊은 것은 중국의 명·청대 황제릉이다. 특히 명(明) 효릉(孝陵)은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릉을 건설하기 위해 참고한 능으로 알려져 있다.
효릉은 명나라의 시조 주원장(朱元璋)과 황후 마씨(馬氏)의 능으로, 명대 최초의 황제릉이다. 중국 강소성(江蘇省) 남경시(南京市) 종산(鐘山)에 자리 잡고 있다. 1381년 착공하여 2년 뒤인 1383년에 1차 완공되었다. 같은 해 대전(大殿)이 완공되었고, 1405년 태조 주원장이 병사한 뒤 매장되었다. 30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영락제(永樂帝) 때인 1405년에 완성되었으며, 태조 이후 명나라 황제들은 모두 이 능을 모방하여 황제릉을 건설하였다.
배치를 보면 중국 황제릉의 경우 조선왕릉 보다 능역의 규모, 석물 수량과 크기가 장대할 뿐 아니라 봉분이 겉으로 노출되지 않는다는 점, 중앙에 향전(享殿; 祭殿)이 있고 양옆에 배전(配殿)이 있다는 점, 황제가 묻힌 보정(寶頂) 앞에 방성명루(方城明樓; 아래층이 방성, 위층이 명루)를 두었다는 점 등에 차이가 있다.
명 효릉의 지상 건축물들은 이미 훼손되었지만, 지하의 유적은 아직도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고문헌에 따르면, 효릉의 담벽 길이는 22.5㎞였는데, 이는 당시 난징 성벽 길이의 3분의 2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였다고 한다.
베트남 황제릉(원조시대)
베트남은 오랜 왕조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가운데 왕릉 유적을 뚜렷하게 남긴 왕조는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엔 황조(阮朝, 1802~1945)이다. 응우엔 황조는 중국의 유교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은 국가로, 명·청대 확립된 능침제도에 영향을 받아 응우엔 황제릉의 구성요소에서 많은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다.
응우엔 황조 동안 조성된 황제릉은 총 7기이다. 초대 황제인 쟈롱황제(嘉隆, 재위 1802~1820)의 천수릉(天授陵), 제2대 민망황제(明命, 재위 1820~1841)의 효릉(孝陵), 티에우찌황제(紹治, 재위 1841-1847)의 창릉(昌陵), 뜨득황제(嗣德, 재위 1818-1883)의 겸릉(謙陵), 죽득(育德, 재위 1883)의 안릉(安陵), 동카인황제(同慶, 재위 1885~1889)의 사릉(思陵), 카이딘황제(啓定, 재위 1923~1925)의 능이 그것이다. 앞의 6기 황제릉이 베트남 전통 황제릉제도로 조성된 것이라면 마지막 카이딘 황제릉은 프랑스 유럽양식이 반영된 색다른 건축물로 지어진 것이 차이점이다.
응후엔 황제릉은 능의 입구나 보성의 전면 등에 호수와 조경식물을 배치하였다는 특징을 지닌다. 황제릉의 가장 바깥쪽에는 홍문이 있고, 홍문을 들어서면 제정(祭庭)이라는 넓은 마당이 있으며, 마당 양쪽에 석인상과 동물형 석상이 배치되어 있다. 마당을 지나면 비정(碑亭)과 침전(寢殿)이 있으며, 가장 안쪽에 황제가 묻힌 보성(寶城)이 자리한다. 보성은 석실(石室)과 분구(墳丘)를 혼합하여 조성되었는데, 특히 분구의 조영은 중국 황제릉제도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일본 천황릉
일본 천황의 묘는 미사사기(陵)이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천황릉(天皇陵), 어릉(御陵)으로 불리기도 한다. 일본 황실제도를 규정한 『황실전범(皇室典範)』에 의하면, 천황·황후·태황태후 및 황태후를 장례지낸 곳을 능(陵), 그 밖의 황족을 장사지낸 곳을 묘(墓)로 규정하였다. 초대 신무(神武) 천황에서 제124대 소화(昭和) 천황에 이르기까지 124곳의 천황릉을 비롯해 능에 준하는 것과 묘를 합하면 그 수량을 전국적으로 896곳에 이르며, 이들은 모두 궁내청(宮內廳) 서릉부(書陵部)가 관리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황릉은 인덕(仁德)천황릉이다. 분구의 길이 486m의 전방후원분으로, 3주의 해자를 가지고 있고 본릉(本陵)의 규모가 46m의 면적을 가진 최대의 황릉이다. 일본의 천황릉은 4세기에서 19세기까지 폭넓은 시기에 분포하고 있으며, 1867년 효명(孝明)천황릉 때부터 대규모 산릉(山陵)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천황릉은 7세기를 전후로 급격하게 변모하기 시작해서 규모도 축소되고 반구형에서 단순한 분묘 형태로 바뀌게 된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천황릉은 반원형의 봉분과 그 앞에 간간한 제단이 설치된 모습이며, 별도의 제사용 시설이나 조각물 등은 배열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국이나 조선, 베트남 등 동아시아 황릉과 차이를 보인다.
대한제국 황제릉(홍릉과 유릉)
홍릉(洪陵)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의 황제릉 제도의 일부와 기존의 조선왕릉 제도를 결합하여 조성하였다. 능침에 배열되었던 문무석인상과 석수 석물을 신도(神道) 양쪽으로 일렬로 배치하였고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의 침전을 세웠다. 능침 주위에 배치되었던 석수들은 침전 앞, 향로·어로의 좌우에 그 종류를 더하여 나란히 세워져 있다.
능침은 병풍석으로 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능침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는 세우지 않고 혼유석 1좌, 그 양 옆으로 망주석 1쌍을 세우고 그 앞으로 사각장명등을 설치하였다. 석물의 배치는 홍살문과 침전 사이에 문석인, 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의 순으로 대칭적으로 세웠다. 향로(香路)·어로(御路)는 어로와 향로의 두 단으로 구분되어 있던 조선왕릉에 비해 향로 양 옆에 황제가 지나가는 어로와 세자가 지나가는 예로(睿路)를 설치하였다. 이밖에 재실, 수복방, 수라간, 비각, 예감, 어정 등은 조선왕릉의 구성과 유사하다. 침전 앞에 지당(池塘)이 별도 있고 진입부의 낮은 지역에 원형의 연못인 연지(蓮池)가 마련되어 있는 것은 대한제국 황제릉의 특징이다. 곧 대한제국 황제릉은 중국 황제릉제도의 일방적인 수용이 아니라 한국인 고유의 인식과 전통을 혼합한 결과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황제릉!! 동아시아 황제릉의 역사와 구한말 국내외 정세 속에서 대한제국 황제릉 홍릉과 유릉이 갖는 숨은 의미를 새롭게 살펴보자.
참고문헌
장경희, 『고려왕릉』, 예맥, 2008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Ⅰ』, 2009
- 미술문화유산연구실
- 문의 : 042-860-91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