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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공난계김선생제단비(文忠公蘭溪金先生祭壇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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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이 비는 1894년(고종 31) 경상북도 김천에 건립된 문충공난계김선생제단비(文忠公蘭溪金先生祭壇碑)로 황난선(黃蘭善)이 비문을 지었다.
김득배(金得培 : 1312~1362년)의 본관은 상주이고, 호는 난계(蘭溪)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이 되고, 후에 공민왕이 되는 강릉대군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 1351년(공민왕 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부대언이 되었으나, 무고를 받아 파면되었다. 1357년(공민왕 7년) 서북면홍두왜적방어도지휘사, 추밀원직학사가 되었다. 1359년(공민왕 9년) 겨울에 홍건적 침입으로 의주·정주·인주 등이 함락되자, 서북면도지휘사로서 도원수 이암(李喦), 부원수 경천흥(慶千興)과 함께 방어하였다. 서경을 탈환하여 적을 압록강 밖으로 격퇴하였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수충보절정원공신에 책봉되고 정당문학에 올랐다. 1361년(공민왕 11년) 홍건적 20만이 다시 압록강을 건너와 삭주, 이성에 침입하자, 서북면도병마사가 되어 방어하였으나, 안주에서 대패하여 개경까지 함락되었다. 이듬해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20만의 군사를 이끌고,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의 지휘로 적 10여 만을 죽이고 개경을 수복하였다. 이때 정세운과 권력을 다투던 평장사(平章事) 김용(金鏞)의 위계로 정세운(鄭世雲)·안우(安祐)가 모살되자, 그도 체포되어 상주에서 효수(梟首)되었다. 그의 문생인 정몽주는 왕에게 청하여 그의 시신을 거두고 제문을 지어 억울한 죽음을 개탄하였다. 1392년(공양왕 4년)에 그의 누명이 벗겨지고, 자손도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현재 탁본은 김천문화원에 소장되어 있고, 탁본된 연대는 1980년대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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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泉의 金石文』
문충공 난계 김선생 제단비
예기(禮記)에 조(祧 : 조상을 제사지내는 사당)에서 제사를 받을 수 없는 조상은 단(壇)을 만든다고 하였으니 산소가 없어서 단을 만드는 것은 옛날의 예법이 아니다. 그러나 흠모의 정을 붙일 곳이 없어 단을 만들어 제사지내는 사람이 있으니 먼 조상을 추모하는 데에 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후하게 대접하는 것이 될 것이다. 대개 조상의 기(氣)는 즉 자손의 기이니 하나의 기(氣)를 가지고 서로 감응하는 정성을 쌓는다면 신령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니 장차 어느 곳에서든 제사지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사문(斯文:선비) 인식(仁植), 주식(周植)과 상사(上舍 : 진사) 창식(昌植)이 나에게 부탁하며 고하기를 “선조인 난계선생은 바로 고려의 충현(忠賢)입니다. 상산지(商山誌)에는 산소가 주(州)의 남쪽 십리지역에 있다고 실려 있는데 여러 번 전쟁을 겪어 아무리 헤아려보아도 알 길이 없습니다. 6세손 도사공(都事公)이 거주하던 금산군(金山郡) 여남내동(汝南內洞)에 가서 단을 설치하고 매년 제사를 지낸 것이 시행한지 수백 년입니다. 이제 그 옆에 비석을 세우고자 하여 이에 고려사본전(高麗史本傳)과 집안에 전해오는 옛 문적을 가지고 와서 감히 비석에 새길 글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작위도 없고 문장도 없다고 두번 세번 사양하였으나 할수 없어서 마침내 가져온 것을 살펴보고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선생의 휘(諱)는 득배(得培)요, 자는 국자(國滋), 호는 난계(國滋)이다. 상산김씨(商山金氏)는 계보가 신라 경순왕(敬順王)에게서 나와 고려의 보윤(甫尹) 휘 수(需)가 시조가 되었다. 휘 일(鎰)에 이르러 관직은 찬성사(贊成事)를 지내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며 휘 록(祿)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상성군(商城君)에 봉해졌으니 선생의 조부와 부친이다. 어머니는 연창군부인(延昌郡婦人) 박씨이니 영서령(盈署令) 영(瑛)의 따님이다. 선생은 충선왕(忠宣王) 임자년(1312)에 출생하여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시묘 3년을 하였는데 두 동생 득제(得齊), 선치(先致)와 함께 어머니를 독실한 효성으로 모셨다. 문을 닫고 학업에 힘써 1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전객부령(典客副令), 우부대언(右副代言), 정당문학(正堂文學), 추밀원학사(樞密院學士)를 지내고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가 되었다. 이 때에 홍건적(紅巾賊)의 난리가 있었는데 나라 안에서 선생이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 대의(大義)를 앞장서 외치고 이방실(李芳實), 안우(安祐)등 두 원수와 함께 날뛰는 적들을 소탕하니 나라가 이에 힘입어 안전하였다. 서경윤상만호(西京尹上萬戶)에 임명되고 수충보절정원공신(輸忠保節定遠功臣)의 호를 하사받았으며 상락군에 봉해져 화상이 벽상에 그려지게 되었다.
김용(金鏞)이라는 간신이 있었는데 공로 있는 사람들을 시기하여 은밀하게 왕의 명령을 칭탁하여 총병관 정세운(鄭世雲)을 죽이고 아울러 공도 함께 해를 입었으니 바로 공민왕(恭愍王) 임인년(1362년)이요, 향년 51세였다.
포은(圃隱) 정선생(정몽주)은 선생의 문인으로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냈는데 제문에 이르기를 “태산같은 공로를 오히려 칼날 아래 피흘리고 죽게 하였으니 나는 아노라, 충성된 혼과 용맹한 넋이 구천에서 눈물을 삼키고 있으리라.”라고 말하였으니 이로써 선생의 원통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문충(文忠)의 시호를 추증하시고 마전군(麻田郡)의 숭의전(崇義殿)에 배향하였다. 우복(愚伏:정경세)과 창석(蒼石:이준) 등 여러 선생이 또 상주의 옥성서원(玉成書院)에 제향을 하였고 그 봉안문(奉安文)과 사당기(祠堂記)에 선생의 충성과 위대한 업적이 남김없이 드높여졌으니 후세 사람이 어찌 감히 한마디라도 더할 것인가?
선생의 부인은 서흥군부인(瑞興郡婦人) 김씨로 판도판서(版圖判書) 세구(世丘)의 따님인데 아들을 낳지 못하고 동생인 낙성군(洛城君) 선치(先致)의 제4자 대호군(大護軍) 승귀(承貴)를 후사로 삼았다. 5녀가 있으니 사위는 정윤윤(鄭允玧), 지군사(知郡事) 송천(宋蒨), 문학 조운흘(趙云仡), 지추(知樞) 김영화(金永和), 총재(冢宰)유휘종(柳暉宗)이다. 호군의 아들은 판서 상온(尙溫)이며 그 아들은 현령 수영(壽永)이고 그 아들은 참봉 한석(漢碩)이다. 한석은 아들이 둘이니 호(琥)는 전력부위(展力副尉)이고 헌(瓛)은 훈도(訓導)를 지냈다. 부위는 아들이 둘인데 도사 정필(丁畢)이 바로 단을 세운 사람이고 정각(丁角)은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도사의 두 아들은 찰방(察訪) 굉(宏)과 시정(寺正) 용(容)이며 찰방의 아들은 계공랑(啓功郞) 진태(晋兌)이고 시정의 두 아들은 진사 진추(晋秋)와 현감 진려(晋勵)이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명(銘)하노라.
아름답구나, 선생이여! 효성스러우며 또 충성하였네. 문인으로 일어나 무공을 떨치셨네.
영웅의 풍모 엄숙하여 온 나라에 뻗혔는데 우뚝한 공훈과 성대한 업적이 도리어 간사한 흉계에 걸렸네.
포은선생의 제문은 천지에 다하였는데 모래먼지속의 오랜 세월 지나니 무덤마저 잃었구나.
후손들 이를 슬퍼하여 단을 쌓고 숭모하니 어찌 고향에 자손들이 번창하지 않으리.
물처럼 넓고 크게 넘쳐흘러 신령의 기운이 통하니 이에 제향이 끝없이 이어지리라.
푸른 산 돌아보니 흰 구름 걸려있는데 뜻있는 선비 천년토록 아직 남은 빛이 있구나.
고종 31년(고종 31, 1894년) 12월 일
후학 장수(長水) 황난선(黃蘭善)은 삼가 기록한다.
문충공난계김선생제단비(文忠公蘭溪金先生祭壇碑)
예기(禮記)에 조(祧 : 조상을 제사지내는 사당)에서 제사를 받을 수 없는 조상은 단(壇)을 만든다고 하였으니 산소가 없어서 단을 만드는 것은 옛날의 예법이 아니다. 그러나 흠모의 정을 붙일 곳이 없어 단을 만들어 제사지내는 사람이 있으니 먼 조상을 추모하는 데에 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후하게 대접하는 것이 될 것이다. 대개 조상의 기(氣)는 즉 자손의 기이니 하나의 기(氣)를 가지고 서로 감응하는 정성을 쌓는다면 신령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니 장차 어느 곳에서든 제사지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사문(斯文 : 선비) 인식(仁植), 주식(周植)과 상사(上舍 : 진사) 창식(昌植)이 나에게 부탁하며 고하기를 “선조인 난계선생은 바로 고려의 충현(忠賢)입니다. 상산지(商山誌)에는 산소가 주(州)의 남쪽 십리지역에 있다고 실려 있는데 여러 번 전쟁을 겪어 아무리 헤아려보아도 알 길이 없습니다. 6세손 도사공(都事公)이 거주하던 금산군(金山郡) 여남내동(汝南內洞)에 가서 단을 설치하고 매년 제사를 지낸 것이 시행한지 수백 년입니다. 이제 그 옆에 비석을 세우고자 하여 이에 고려사본전(高麗史本傳)과 집안에 전해오는 옛 문적을 가지고 와서 감히 비석에 새길 글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작위도 없고 문장도 없다고 두 번 세 번 사양하였으나 할 수 없어서 마침내 가져온 것을 살펴보고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선생의 휘(諱)는 득배(得培)요, 자는 국자(國滋), 호는 난계(國滋)이다. 상산김씨(商山金氏)는 계보가 신라 경순왕(敬順王)에게서 나와 고려의 보윤(甫尹) 휘 수(需)가 시조가 되었다. 휘 일(鎰)에 이르러 관직은 찬성사(贊成事)를 지내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며 휘 록(祿)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상성군(商城君)에 봉해졌으니 선생의 조부와 부친이다. 어머니는 연창군부인(延昌郡婦人) 박씨이니 영서령(盈署令) 영(瑛)의 따님이다. 선생은 충선왕(忠宣王) 임자년(1312)에 출생하여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시묘 3년을 하였는데 두 동생 득제(得齊), 선치(先致)와 함께 어머니를 독실한 효성으로 모셨다. 문을 닫고 학업에 힘써 1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전객부령(典客副令), 우부대언(右副代言), 정당문학(正堂文學), 추밀원학사(樞密院學士)를 지내고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가 되었다. 이 때에 홍건적(紅巾賊)의 난리가 있었는데 나라 안에서 선생이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 대의(大義)를 앞장서 외치고 이방실(李芳實), 안우(安祐)등 두 원수와 함께 날뛰는 적들을 소탕하니 나라가 이에 힘입어 안전하였다. 서경윤상만호(西京尹上萬戶)에 임명되고 수충보절정원공신(輸忠保節定遠功臣)의 호를 하사받았으며 상락군에 봉해져 화상이 벽상에 그려지게 되었다.
김용(金鏞)이라는 간신이 있었는데 공로 있는 사람들을 시기하여 은밀하게 왕의 명령을 칭탁하여 총병관 정세운(鄭世雲)을 죽이고 아울러 공도 함께 해를 입었으니 바로 공민왕(恭愍王) 임인년(1362년)이요, 향년 51세였다.
포은(圃隱) 정선생(정몽주)은 선생의 문인으로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냈는데 제문에 이르기를 “태산같은 공로를 오히려 칼날 아래 피흘리고 죽게 하였으니 나는 아노라, 충성된 혼과 용맹한 넋이 구천에서 눈물을 삼키고 있으리라.”라고 말하였으니 이로써 선생의 원통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문충(文忠)의 시호를 추증하시고 마전군(麻田郡)의 숭의전(崇義殿)에 배향하였다. 우복(愚伏 : 정경세)과 창석(蒼石 : 이준)등 여러 선생이 또 상주의 옥성서원(玉成書院)에 제향을 하였고 그 봉안문(奉安文)과 사당기(祠堂記)에 선생의 충성과 위대한 업적이 남김없이 드높여졌으니 후세 사람이 어찌 감히 한마디라도 더할 것인가?
선생의 부인은 서흥군부인(瑞興郡婦人) 김씨로 판도판서(版圖判書) 세구(世丘)의 따님인데 아들을 낳지 못하고 동생인 낙성군(洛城君) 선치(先致)의 제4자 대호군(大護軍) 승귀(承貴)를 후사로 삼았다. 5녀가 있으니 사위는 정윤윤(鄭允玧), 지군사(知郡事) 송천(宋蒨), 문학 조운흘(趙云仡), 지추(知樞) 김영화(金永和), 총재(冢宰)유휘종(柳暉宗)이다. 호군의 아들은 판서 상온(尙溫)이며 그 아들은 현령 수영(壽永)이고 그 아들은 참봉 한석(漢碩)이다. 한석은 아들이 둘이니 호(琥)는 전력부위(展力副尉)이고 헌(瓛)은 훈도(訓導)를 지냈다. 부위는 아들이 둘인데 도사 정필(丁畢)이 바로 단을 세운 사람이고 정각(丁角)은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도사의 두 아들은 찰방(察訪) 굉(宏)과 시정(寺正) 용(容)이며 찰방의 아들은 계공랑(啓功郞) 진태(晋兌)이고 시정의 두 아들은 진사 진추(晋秋)와 현감 진려(晋勵)이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명(銘)하노라.
아름답구나, 선생이여! 효성스러우며 또 충성하였네. 문인으로 일어나 무공을 떨치셨네.
영웅의 풍모 엄숙하여 온 나라에 뻗혔는데 우뚝한 공훈과 성대한 업적이 도리어 간사한 흉계에 걸렸네.
포은선생의 제문은 천지에 다하였는데 모래먼지속의 오랜 세월 지나니 무덤마저 잃었구나.
후손들 이를 슬퍼하여 단을 쌓고 숭모하니 어찌 고향에 자손들이 번창하지 않으리.
물처럼 넓고 크게 넘쳐흘러 신령의 기운이 통하니 이에 제향이 끝없이 이어지리라.
푸른 산 돌아보니 흰 구름 걸려있는데 뜻있는 선비 천년토록 아직 남은 빛이 있구나.
지금 임금(고종) 31년(고종 31, 1894년) 12월 일
후학 장수(長水) 황난선(黃蘭善)은 삼가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