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가) 개방한
남을진선생묘 및 신도비(南乙珍先生墓 및 神道碑)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 1유형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개관
이 비는 1841년(헌종 7) 경기도 양주에 건립된 남을진신도비(南乙珍神道碑)로 조인영(趙寅永)이 비문을 지었고, 송상래(宋祥來)가 글씨를 썼다.
남을진(南乙珍 : 1331~1393년)의 본관은 의령이다. 고려 공민왕 때 참지문 하부사로 성격이 강직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정몽주 길재 등과 교유가 있었다.
을번(乙蕃), 을진(乙珍), 을경(乙敬) 3형제가 있었는데, 이들은 조선조 들어 고려왕조에 반기를 들고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적극적인 참여파와 고려왕조에 대해 절개를 지킨 충절파의 두 갈래로 나눈다. 참여파는 정권에 참여하면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조선 초기와 중기에 걸쳐 정권의 중앙 무대로 진출 4색 당쟁에 관여하게 되었다.
반면에 충절파는 산속에 은거하면서 절개를 지켰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을진으로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양주의 사천으로 숨어 버렸다. 조선조 개국 후 태조의 간곡한 부름이 있었으나 남을진이 불응하자 그 지조는 누구도 꺾을 수 없다하여 후세에 충신의 절개를 권장하고자 을진이 거처하는 곳의 이름을 따서 사천백(沙川伯)에 봉했다. 그러나 남을진은 이 소식을 듣고 오히려 수모를 당했다고 통곡하고 머리를 풀고 상패리에 있는 감악산(紺嶽山)에 들어가 깊숙한 석굴에 숨어 죽을 때까지 사람을 보지 않으면서 고려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사후 그가 거처한 자리를 남선굴(南仙窟)이라 한다. 이에 비해 형 을번의 아들 남재(南在)와 남은(南誾)형제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조를 개국하는데 1등 공신이 됐다.
현재 탁본은 양주문화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80년대로 추정된다.
남을진 신도비(南乙珍 神道碑)
고려 정헌대부(靖憲大夫) 참지문하부사 겸 전의감사(叅知門下府事兼判典醫監司) 의령(宜寧) 남(南)공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 감춘추관사(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 조인영(趙寅永)이 글을 짓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지제교(丞政院左副承旨兼經筵叅賛官春秋館修撰▨▨▨敎) 송상래(宋祥來)가 글을 쓰고 전서(篆書)하다.
예로부터 왕조가 뒤바뀌는 시대에 두 성(姓)의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 사람은 실로 많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또한 신하로서의 떳떳한 도리다. 고려의 운명이 기울어져 가는 기미를 보고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물러났으며, 새로이 천명을 받아 임금이 될 사람에게는 홀로 고려에 대한 자신의 절개를 드러냈다. 촛불의 밝음에 의하지 않고서는 절개가 견고하여도 분변해 낼 수 없다. 이런 점이 바로 고려 정헌대부 참지문하부사(靖憲大夫叅知門下府事) 남을진(南乙珍)이 인륜의 도리를 다하고 의리에 극진하며 우뚝이 뛰어나서 백세의 모범이 되는 까닭이다.
공의 관향은 의령(宜寧)이고, 신라의 영의공(英毅公) 민(敏)이 시조이시다. 문하시중(門下侍中) 진용(鎭勇), 추밀부사(樞密副使) 군보(君甫), 풍저창사(豊儲倉使) 개저(盖胝)께서는 곧 공의 할아버지로부터 3대가 되신다. 아버지 천노(天老)께서는 영광군수(靈光郡守)를 지내셨고, 중랑장(中郎將) 함양(咸陽) 박종(朴琮)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셨다. 맏아들 을번(乙蕃)은 벼슬이 시중(侍中)이었고, 둘째아들이 곧 공이다. 을번(乙蕃)의 아들 충경공(忠景公) 재(在)와 강무공(剛武公) 은(誾)은 조선의 개국원신인데, 공(公)만은 의리를 지키고 절개를 굽히지 아니하셨다. 충경공(忠景公)의 후손 추강(秋江)선생 효온(孝溫)께서 “한 가문 속에서, 한 분은 고사리를 캐어 먹고, 또 한 분은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한 것이 이 때문이다.
공은 신미년(충혜왕 1, 1331년)에 송경(松京 : 현 개성)의 좌경동(佐卿洞)에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세상일에 동조하지 않았다. 무신년(공민왕 17, 1368년)에 비로소 부름에 나아가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했다고 한다. 『고려사』에, 이해 4월 임자일에 왕께서 구재(九齋)에 행차하시어 이첨(李詹) 등 일곱 명에게 급제를 주셨다. 당시에 신돈(辛旽)은 원로대신 이제현(李齊賢)이 싫어서 참소하기를, “문하의 신료들이 유자(儒者)들의 해가 지극하다고 합니다.”하였다. 이때부터 지공거(知貢擧)가 인재를 등용하지 않고, 다만 친시(親試)를 거행하였다. 공께서 보셨다는 현량과(賢良科)는 아마도 그 시험일 것이다. 공께선 삼사(三司)를 지내셨는데, 갑자년(우왕 10, 1384년)에 어리석은 왕이 정치를 어지럽히고 자신마저 배척한다는 것을 아셨다. 집에 술과 안주를 차려놓고, 종족과 친구들에게 헤어지며 “차마 망한 나라의 대부가 되진 못하겠네, 차라리 산골로 들어가 들농사나 지으려네.” 하였다. 다음날로 벼슬을 버리고 처자를 이끌고 고향인 사천현(沙川縣) 봉황산(鳳凰山)으로 갔다.
왕 위에 오르시기 전에, 우리 태조와 공은 친분이 있었다. 왕 위에 오르신 후 충경공(忠景公)을 찾아가, 공께서 살고 계신 곳을 살펴보고 친히 쓰신 서찰까지 주시며 불러오도록 하였다. 공께서 “부자 형제지간이라도 뜻은 각각 다르다. 너는 신왕(新王)의 공신이나, 나는 망한 나라의 종일뿐이다. 이 마음을 바꿀 수는 없다.” 하였다. 충경공(忠景公)이 울면서 “주나라가 은나라의 어지러움을 안정시킬 때 10명의 신하는 모두 현명하였습니다. 어찌 의롭지 못하다 하겠습니까?” 하니, 공께서 몸을 돌리고 누우시면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여러 날을 어찌 살았는고?” 하셨다. 다시 할 말이 없자, 충경공(忠景公)은 하는 수 없이 돌아와 대신 조준(趙浚)에게 들은 대로 말하였다. 조준(趙浚)이 “남(南) 아무개는 죽음으로 반드시 자기의 뜻을 이루고자 할 것이다.” 하였다.
임금께서 탄식하시며 “이 사람의 충절을 드러내야 마땅할 것이다!”하시고는, 공께서 살고 계신 곳을 포함하여 사천백(沙川伯)에 봉하였다. 공께서 통곡하시며 “내가 산 속 깊이 들어가지 않아서 이런 꼴을 당하노라.”하셨다. 끝내 머리를 풀어헤친 채 감악산(紺嶽山) 석굴 로 들어가시어, 눈으로 하늘의 햇빛을 보지 않으시고 발로는 석굴 밖의 땅을 밟지 아니하셨다. 돌아가셨을 때, 3일 동안이나 흰 구름이 굴 주변을 맴돌았다. 시신을 거두어 굴 밖으로 나오니 큰 바람이 일어나 동굴 속의 서적을 조각조각 날려 보냈다. 후인들은 이 굴을 남선굴(南仙窟)이라 하였다.
남선굴(南仙窟) 위에 있는 동굴에 머리를 풀어헤친 모습을 새긴 조그만 돌상이 들어있는 상자가 있다고 한다. 이 일이 비록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실려 있지 않으나,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서하(西河) 임규(任奎)의 문집에는 실려 있다. 최간이(崔簡易)가 “고려시대 경학의 선비로는 포은(圃隱) 정공(鄭公)과 사천(沙川) 남공(南公), 야은(冶隱) 길공(吉公)이 으뜸이요, 절개를 끝끝내 지켜 후인들의 바탕이 된 사람도 이 세 분이 가장 두드러진다.” 하였으니, 진실로 믿을만한 글이다. 같은 시기 고려시대 안렴사(按廉使)를 지낸 조윤(趙胤)은 대신 준(浚)의 동생으로, 이름을 고쳐 견(狷)이라 하였다. 그분의 절개 또한 공과 같았기 때문에, 숙종(肅宗) 때, 마을의 선비들이 공에게 봉해준 사천(沙川) 경계에 사당을 짓고, 공과 함께 제사를 지냈다. 정조(正祖) 갑진년(정조 8, 1784년)에 정조(正祖)께서 사당의 이름을 정절(旌節)로 하라는 편액을 하사하셨다.
우리 조선이 개국한 다음 해인 계유년(태조 2, 1393년)에 공께서 돌아가시니 향년 63세셨다. 족보에는 나이가 70여 세라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묘는 사천(沙川) 남쪽 임간리(臨澗里) 서남향 언덕에 있다. 공의 아내 순창군부인(淳昌郡夫人) 임(林)씨도 합장했다. 세 아들 근(瑾) · 이(珥) · 규(珪)는 모두 벼슬을 했다. 후손들도 계속 벼슬을 하였으나, 어떤 사람은 현달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보잘 것 없었으므로 기록하지 않았다. 이제 비석을 세워 후세에 거듭 밝히노라.
윤흠(允欽) · 윤혁(允爀) · 윤태(允泰) · 윤일(允一)이 모두 효를 다한다는 일념으로 공의 무덤 아래 살고 있고, 큰 아들만 고향을 떠났다. 대개 공의 출처의 본말은 ~ 결자 ~없다. 비록 멀다고 하나, 공께서 종족과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셨을 때를 살펴보면, 임렴(林廉)의 옥사도 일어나지 않았고, 위화(威化)의 군대도 거사를 하지 않는 등, 아직 고려의 존망이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공만이 천명(天命)을 소상히 알고, 의연히 위험한 나라에서 빠져 나왔다. 그러나 공께서 저 산이 숫돌처럼 얇아지고 강이 띠처럼 가늘어질 때까지 고려와 함께 한다는 맹세를 쫓자, 태조께서 소택지까지 물색하시고, 환봉(沙川을 지칭하는 듯)을 개산(介山 : 介之推가 절개를 지키기 위해 어머니와 들어가 숨은 산)에 견주시며, 열 차례나 친히 서찰을 보내시는 등 특별한 예로 대우하였으나, 공도 죽기를 맹세코 스스로를 다스리며 자신이 지킬 바를 잃지 않았다. 어찌 촛불이 두루 비추고 돌이 단단하다고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맹자(孟子)께서 “백이(伯夷)는 주(紂)를 피하여 북해의 물가에 살았다.” 하셨고, 공자께선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자기의 몸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하셨다. 백이(伯夷) · 숙제(叔齊)와 더불어 공 같은 분을 그 위에 비교하여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명(銘)에,
저 험한 감악산(紺嶽山) 석굴 속에 홀로 머리카락 풀어헤친 어떤 이 있네.
아아, 나라가 기울어 가자, 벼슬을 버리고 왔네.
대답하는 자가 허둥지둥 이곳서 돌아가셨다고 하네.
조카는 응당 이 조정에 무성한 공을 세우길 바라.
손에는 임금의 서찰을 쥐고 온화한 말로 주나라가 은나라 혼란함을 다스렸다고 아뢰나,
서로 환봉(沙川을 지칭함)을 넘지 않네.
어찌 벼슬과 왕 위에 오르기 전의 친분으로 나의 뜻과 나의 지킴을 굽히랴.
내가 고사리를 캐니 은나라의 신령스러운 풍속이 진탕하고 신비한 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르네.
형상을 조각하니 모습이 너무나 흡사하고, 신주 앞에서 축을 읽어 우울함을 위로하네.
공의 밝은 빛에 하늘의 태양과 달이 빛을 잃을 정도네.
천년의 한 조각, 바로 남(南)공의 비명(碑銘)이로세.
숭정기원후 네 번째 신축년(헌종 7, 1841년) 7월 일에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