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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신도비(南在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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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는 1832년(순조 32) 경기도 남양주에 건립된 남재신도비(南在神道碑)로 후손인 남구만(南九萬)이 비문을 지었고, 남공철(南公轍)이 글씨를 썼다.
남재(南在, 1351~1419년)의 본관은 의령이고, 자는 경지(敬之)이며. 호는 구정(龜亭)이다. 동생 남은(南誾)과 함께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개국에 공을 세웠다. 1392년(태조 1) 포상을 피하여 은거하였으나 태조에게 처소가 알려져 재(在)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어, 중추원학사 겸 대사헌이 되었다. 이후 중추원판사, 문하부참찬사가 되었으며, 1396년(태조 5) 도병마사(都兵馬使)로서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였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동생 남은이 살해됨과 동시에 잠시 유배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나와, 1400년(정종 2) 세자사부, 경상도도관찰사, 의정부찬성사, 우의정에 올랐으며, 1416년(태종 16)에 영의정에 올랐다.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저서에는 『구정유고』가 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현재 탁본은 양주문화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80년대로 추정된다.
남재신도비
유명조선국 순충분의동덕 개국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춘추관서운관 사수문전대제학 세사자의령부원군 증시충경남공신도비명병서
10대손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치사 남조하 구만은 짓다.
15대손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 세자사 공철은 쓰다.
15대손 자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 오위도총부총관 이익은 전을 쓰다.
우리 남씨는 영의공 민께서 적을 내려받은 후로 고관이 줄을 이었고 고려 중엽에 이르러 추밀원직부사 군보께서 의령으로 본관을 옮기시어 풍저창부사 익지를 낳으시고 이 분이 영광군사 천로를, 또 이 분이 검교문하시중 경열공 을번을 낳으시니 이 분이 아버지이시고 어머니는 학림최씨 참의 강의 따님이시다.
공은 충정왕 3년 신묘년에 출생하시니 처음 이름은 겸이시다. 신해년에 이색이 지공거로 있을 때 중간진사 5위로 합격하시고 지낸 벼슬은 알 수 없다. 고려 말 극히 어려운 때를 맞아 태조가 장차 일어날 때 공의 뜻이 경제에 있어 건국에 합류했다가 선위할 때 공을 사양하고 상을 피할 뜻으로 먼 시골에 숨었더니 태조가 천명을 받음에 공을 심히 생각하고 물색하여 찾아내고 재라고 이름을 내리시니 그 살아있음을 기뻐함이요 스스로 자를 경지라고 하니 임금의 사명을 공경하는 뜻이다.
개국훈1등공신에 책정되고 중추원학사 겸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고 의성군에 봉해져서 창업 초에 급한 일 11가지를 임금에게 소진하고 2년 6월에 주문사로 차출되어 명경에 갈 때 상이 공의 아우 지를 보내어 의복과 술을 내리셨다. 9월에 경사로 돌아왔다. 명경에서 황제가 후히 대접하고, “그대 나라는 길이 머니 이제부터 3년에 한 번씩만 하라.”고 하였다. 3년 갑술에 황제가 본국의 글이 거만하다고 책하는지라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변명하려 할 때 태종이 정안군으로서 사신가기를 자청하니 온 조정이 다 위험하다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정안군이 가시는데 우리들이 베개를 베고 죽을 수 있겠는가?”하여 또한 부사로 가기를 청해 가실 새 동행 중에 혹 모시는데 공경을 다하지 못함이 있으되 공만은 집례를 공손히 하고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황제가 우대하여 보내더라. 을해년 2월에 경렬공의 상을 당하니 7월에 상이 편전으로 불러 몸을 보할 좋은 음식을 권하시었다.
병자년 12월에 예문관 춘추관 태학사로 도병마사가 되시어 도통처치사 김사형을 따라 일기 대마도를 칠 때 상이 남문 밖까지 나와 전송하고 다음해 정월에 돌아왔다. 무인년에 정당문학으로 명을 받들어 송악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방석의 난이 일어나 아우 은이 죄수라는 말을 듣고 돌아와 여러 왕자를 뵈오니 공을 같이 해치고자 하는 것을 태종이 아무개는 본래 마음이 같지 않으니 연좌하지 말라하고 집에 돌아가게 하였다가 일이 끝나매 밖에 내보냈다가 곧 불러들였다. 경진년 정월에 정종이 즉위할 때에 공이 궁궐 뜰에서 큰 소리로 지금 정안군을 왕세자로 세울 것을 늦추지 말라고 하니 하륜이 공의 말로 인하여 정종께 상언하니 하늘의 뜻과 사람의 마음을 알겠노라 하시고 빨리 위호를 정할 것을 허락하니 태종을 책정한 공은 공에게 비롯되었도다. 태종이 즉위하여 세자서연관을 둘 때 조준과 공과 정총으로 더불어 학업이 갖추어져 강을 권할 만 하다하여 사부빈객의 직을 내리셨다. 계미년에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시무를 적어 정부에 바치니 정부가 이를 들어 시행했다. 상이 공이 금령으로 인해 술을 끊고 직무에 전념한다는 말을 듣고 혹 병이 나지 않을까 염려하여 12월에 궁에서 빚은 술을 임지에 보내 이제부터 약용주로 복용하도록 하였고, 갑신년 5월에 의정부찬성사를 배명하다. 10월에 대간과 형조가 이거이의 당이라고 공을 고발하였는데 상이 순금사에서 국문토록 하고 공에게 일을 보도록 하니 궁에 들어가 사은하고 전에 위태하고 어려울 때의 일에 힘쓴 말을 하니 상이 경이 말하지 않아도 내 어찌 모르겠는가! 경은 의심치 말라하시었다.
무자년에 지평 최자해가 이를 논함에 왕의 뜻을 거역하여 집에 돌아가고 집의 권우 등이 대죄하거늘 공이 대사헌으로 상에게 아뢰기를, “간언은 임금의 이목이라 말이 맞지 않아도 벌주지 못하는 것은 언로를 열고 시총을 넓혀 만세의 계로 삼는 까닭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곧 자해 등에게 직에 나아가도록 명하였다. 갑오년에 우의정 의령부원군을 배명하고 춘추관사로서 선비 뽑는 일을 맡으니 상이 말하기를, “권도, 성개, 이하, 이수는 다 조사이나 시험에 합격한 자가 없으니 가히 시험을 다루는 공을 볼만하다.”라고 하였다. 상이 하륜과 공에게 고려사를 고치도록 명하시고 공민왕이 하는 사실과 많이 다르니 마땅히 고쳐야 한다고 하셨다. 같은 해 좌의정이 되셨다가 을미년에 정승자리를 풀고 수문전대제학 세자부를 맡게 하셨다. 병신년에 영의정이 되어 바로 그만 두시고 을해년 12월 14일 자택에서 돌아가시니 조정에서 조회와 저자를 철폐하시고 부조와 장구를 보내고 시호를 충경이라 하였다.
상이 법가를 갖추어 백관을 거느리고 공의 집에 와 제사지내니 그 제문에 ‘오직 경은 준수한 생김과 타고난 산하의 정기로 백가의 학문을 꿰뚫고 변화무쌍한 응수의 재주가 있어 성조를 돕고 상왕께서 명경에 가실 때 따라가 어려움을 막아내고 왕위에 오를 때에 크게 도운지라 더욱이 경은 과인과 구은이 있고 경의 손은 인척이 되어 백관의 의표가 되고 4세를 보필하더니 이제 가셨노라. 이 마음 어찌하리오.’라고 하였다. 상왕이 재상 윤회를 보내어 교서를 주어 제수를 내리니 그 글에 이르되, ‘오, 경은 성품과 자색이 영호하고 식견이 고매하여 의에 따라 창업의 계획을 비밀히 정하고 순리에 따르고 인심을 한데 모아 개국에 큰 업적을 협찬한지라 내 조근할 때는 부관으로 돌아다니며 노고를 아끼지 않고 같이 고생을 감수하였으며 왕위를 이어받은 후에는 더욱 도와주더니 한번 병에 구천을 가실 줄이야 어찌 알았으리오!’라는 말이 이에 미치자 슬퍼 마지않더라. 태조가 한양에 자리할 때 친히 능을 건원릉으로 정하고 공의 묘지는 능 밖 불암산 주을동의 언덕으로 공에게 내려 후일 장사지낼 곳으로 삼고 또 밭과 사람을 내려 영세토록 전하여 무덤과 시신을 지키게 하니 위로 경렬공을 먼저 모시고 이어 공을 장사지냈도다. 공의 구택은 한양 남부 명철방 제2리 성 밑이니 또한 국초에 도읍을 정할 때 술자가 상명으로 내린 것이다. 공이 따로 집 서남가에 별당을 짓고 이름을 취미라고 하니 종남산 위에 못 미치는 곳이라 집가에 바위가 있는데 그 모양이 거북 같아 공이 이로 인하여 호를 구정이라고 하였다. 공이 활달하고 많은 큰 계략을 가졌으나 겉으로는 검속하지 않은 것 같으나 속은 꽉 차고 명찰하여 문장이 평정하고 청려하고 경제의 그릇됨과 넓고 깊은 안목이 있으며 또한 산술에 능통하여 전 사람이 풀지 못한 것을 밝혀내니 세상에서 남산이라 하더라. 임인년에 상왕의 명으로 태조묘정에 추배하고 사람을 보내 제사지냈다. 건원릉비음에 적힌 공신 48인 가운데 공이 14번째이고, 그 후 헌릉비음에 또한 적힌 39인 중 공이 13번째이더라.
배위 변한국부인 파평윤씨는 고려 시중 관의 후예로 판삼사 파평군 정후공 호의 따님이니 공보다 먼저 돌아가 장서 땅 송도 천수원 뒤에 장사지냈고 후부인 숙안택주 남양홍씨는 관찰사 이의 따님으로 장지는 듣지 못하였노라. 윤부인이 두 아들을 길렀으니 장자는 경문 병조의랑이요 차자는 경무이다. 의랑공은 유삼자하니 장자는 좌의정 지요, 둘째는 직제학 간이요, 셋째는 의산군 혼이니 태종의 따님인 정선공주와 혼인했다.
공은 세상에 드문 재주로 젊어서 어두운 세상에 대한 경륜이 늦게 이루어지니 그 계략은 헤아릴 수 없더라. 그러나 연대가 오래되고 가승을 잃어 깊이는 알 수 없으나 적어놓은 글과 전해오는 말을 모아 문자로 만든 것이 이러하노니 어찌 그 당시를 밝히어 뒷사람이 보게 하리오. 그러나 다행히도 헌릉 영릉 치제문에 있어 공의 성덕과 대업을 대략은 알 수 있으니 또 어찌 한스럽다 하리오. 옛날에 한나라가 천하를 얻어 종묘를 정할 때 진평의 공이 많으되 스스로 그 많은 음모를 당하여 내 세대에서 폐하였다 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송의 여러 공신 중에 조륜같은 이는 죽을 때에 자손이 행걸하고 조빈만이 후덕하여 대대로 현달하였다. 공과 같은 이는 자손이 귀하고 성한 뒤에 돌아갔고 이제 300년 후예가 번성하여 그치지 않으니 조대가 미치지 못하는 바라. 물의 근원을 알고자 하면 그 흐름을 보아야 하고 나무의 근본을 알고자 할 때엔 그 잎을 보라. 공의 덕을 증명할 사람이 이러하니 어찌 기사의 자세함을 묻겠는가? 명하기를,
하느님이 뛰어난 무극을 시켜 거칠고 괴로운 세대를 구제함에
대개 설계는 반드시 양신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고려 국운이 쇠진하고 태조가 곧 일어날 무렵에 기이한 인물들이 같은 소리로 호응하니
그때 작전계획을 짜는 곳에서 이리저리 모사하는 일을 맡은 이가 바로 충경공이었다.
공훈은 개국공일등공신이요 벼슬은 영의정이다.
이미 그 창업을 도왔었고 또 그 정치에 가담하여 내외 치적은
실로 명철한 소하의 법령이요, 엄하고 곧음은 조참의 보수 그것이었다.
사조를 섬기어 공은 태조와 태종 두 능비음기에 새겨졌고
장례는 태조 배장지에 배향은 태조묘정이니 위대한 덕업이라.
녹을 하늘에서 받으니 생전에 영화되고
사후에 슬퍼함은 또한 그 당시 누가 비할 자 있으리오.
또한 현손 충간공은 공을 이어 정승자리에 올랐었고 적선한 나머지
경사는 멀리 후손에까지 미쳐 대대로 번영을 이어 이룩한 것은 역시 공의 음덕의 소치라.
지금 마땅히 소자출을 생각해왔으나 유덕을 사모한지 300여년 묘비가 없는 것은
후손의 책임이라. 유사를 모아 시를 붙여 돌에 새기노니 이 후 오래오래 한없이 남으리라.
숭정기원후 네 번째 임진년(순조 32, 1832년) 5월 일 세움.